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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시작이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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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년 01월 10일 (수) 03:05:52 [조회수 :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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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는 말한다. “시간을 이용하시오. 시간은 아주 빨리 사라지니까! 질서가 당신에게 시간을 버는 법을 가르쳐줄 거요.” 악마는 시간은 이용해야 하는 것이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허비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메피스토의 세계에서 향유를 위한 멈춤은 허용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이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한 해의 끝자락에 섰다. 시간을 타고 사는 것 같았지만 실은 시간에 떠밀리며 살았다. 조급증에 시달리며 질주해 온 우리 발자취가 어지럽다.

해변에 떠밀려온 부유물같은 시간의 흔적을 살펴본다. 지난 일 년 동안도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신림동과 서현역에서 일어났던 세칭 묻지마 칼부림 사건, 강남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힘 있는 학부모들의 갑질과 서이초 교사 순직 사건 또한 우리 사회의 병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오송 지하 차도 침수 사건, 물살에 휩쓸려 죽어간 해병대 채 상병 사건, 새만금 잼보리 사태는 우리가 여전히 안전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입증해주는 사건이었다. 국제적으로는 튀르키예의 강진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파괴와 죽음이 일상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해 가자 지구는 폐허로 변하고 있다. 맹목적인 증오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날이 갈수록 다양한 이해집단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서로를 향해 쏟아붓는 거친 언어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조롱과 냉소가 따뜻하고 친절한 말을 압도하고 있다. 공론장은 가짜 뉴스에 의해 장악되고, 사람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신뢰는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다. 고의로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의 선동선전에 기꺼이 속으려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진실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전국의 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여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이다. 이익을 보면 의를 잊는다는 말이다. 이익 동기가 진실을 압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장으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은 보장되지 않는다.

영국의 콜린스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는  AI이다. 인공지능의 약자이지만 콜린스 사는 이것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의 정신적인 기능을 모델링하는 것”이라 소개한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 열풍이 불었다.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경전을 보기보다는 AI에게 묻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포스트 휴먼 시대 혹은 트랜스 휴먼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물어야 했지만, 이제 그런 질문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신적 능력을 간직한 인간의 출현을 오히려 반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낙관론이 유지될 수 있을까?

기후 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 모두의 고향인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임계점에 거의 도달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경제 발전이라는 세이렌의 달콤한 노래에 이끌려 인류는 파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은 ’ 19세기 말 허무주의와 급진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공포스러움을 보여준다. 소설의 제사에 도스또예프스키는 악령에 들린 돼지떼가 비탈길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는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자기 시대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또한 지금 몰락의 비탈길을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멈출 수 있을까? 비관적 전망이 많지만 희망을 섣불리 버릴 수도 없다.

한나 아렌트는 니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뿌리를 파헤친 <전체주의의 기원>의 마지막 문장에 희망의 씨를 하나 남겨놓았다. 모든 역사의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 그는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후 방점을 찍듯 말한다. “실제로 모든 인간이 시작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이 문장을 꼭 붙든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 2023/12/30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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