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를 건강하게 사신 박경희 권사님이 소천하셨다. 성탄을 전후로 열흘 남짓 대기하며 지냈다. 장례 치룰 날을 예정해 둔 채, 하늘의 부르심을 기다리다니 참 죄스런 일이었다. 결국 1월 2일에야 천국환송을 한다니 이 땅에서 100세를 채우신 셈이다. 소천 후 일주일을 영안실에서 보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는 가족이 없어, 구청에서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이 걸렸다. 

  다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자신의 정신을 지니셨으니 복된 일이다. 그리고 날마다 <하늘양식>을 붙들고 사시던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 오죽하면 작년 이맘 때 이렇게 문자를 보내주셨다. 물론 요양보호사의 핸드폰을 통해서다. 평소 가장 자주 오간 메시지를 꼽으라면 건강, 독일에 있는 가족,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단연 하늘양식이었다. 하루에도 열 번씩 읽고 또 읽는다고 하셨다.

  “하늘 양식만 먹고 사는 98세 박경희권사 문안드립니다/ 2022년 12월 9일 꿀물을 주셔서 감사히 마셨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박경희 권사”

  나는 1997년 박경희 권사를 인터뷰한 일이 실마리가 되어 지금껏 이어진 관계로 살았다. 독일에서 목회하던 당시 연간(年刊) <통일아침> 편집자로 활동했는데, 당시 동포들 중 이산가족의 사연들을 엮어 소개하였다. 교포신문에 난 수기를 읽고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함부르크에 있는 따님 댁을 방문하였다. 한인식당을 경영하던 딸과 사위는 훗날 평화통일을 위한 까치밥을 장만하는 데 헌신하였다. 

  할머니는 2006년, 독일에서 30년 만에 귀국하여 홀로 지내셨다. 은평감리교회가 노년의 생애를 따듯하게 돌보아 주셨다. 세상에서 똑같은 인생은 없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눈부시다.
  

2018년에 월간 <기독교세계>에 쓴 글이다. 

하늘양식을 먹으며 산다

  모든 사람은 역사를 산다. 또 자신이 출현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듣다 보니 박경희 권사(은평감리교회)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여느 할머니처럼 요양원과 다름없는 골방을 지키며 살지만, 90평생의 많은 시간은 세상을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

  1925년생이니 올해 세는 나이로 아흔네 살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의 복을 누리지만, 언제 하나님 곁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막다른 처지에 다다랐다. 이젠 여한이 없다. 박 권사는 2006년 독일 함부르크 딸의 집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죽겠다며 1975년에 출국한지 30년 만이다. 

  “한국에 사는 시영동생이 누님 이제 한국에 오세요. 제가 잘 모실게요 해서 돌아왔어요. 그런데 이젠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가 됐어요. 옆에서 ‘여보 누님이세요’라고 해도 고개만 끄떡여요, 글쎄. 그렇게 똑똑했던 사람이...”

  박 권사는 10년 가까이 은평천사원 시설에 머물며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자리를 옮겨 하루 3시간씩 요양사의 간병을 받으며 홀로 지낸다. 사실 노인만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를 도우라고 온 요양사는 실은 나보다 더 힘들어요.” 누구나 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할머니는 독일에 두고 온 늙어가는 외동딸을 생각하며 서로 의지한다고 했다. 

  지금 할머니가 가장 의지하는 것은 뜻밖에도 <하늘양식>이다.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천사의 양식이 필요한 법이지만, 눈도 귀도 어두울 90대 노년에 하나님의 말씀 책을 하루 세 끼 밥 먹듯 즐겁게 산다는 것은 참 강건하고 행복한 일이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면 그 날치 하늘양식을 읽어요. 샅샅이 읽고, 또 읽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읽으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지 않겠어요. 의지가지 없는 내가 하늘양식 없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돌아보면 박 권사는 평생 하늘양식으로 살았다. 인생은 나그네였고, 삶은 광야와 다름없었다. 그는 소련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는데, 황해도 신계곡산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다며 고향을 떠나 연해주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 후 먼 길에 아들집을 찾아오신 할머니는 다시 귀국하시면서 맏손녀를 데려가기를 소원하셨다. 처음에 세 살 터울의 언니가 따라가기로 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자 언니가 떼를 쓰는 바람에 대신 박 권사가 할머니 손에 잡혔다고 하였다.

  “개성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면서 소학교를 마치고 우체국 급사로 취직했어요. 그러다 1년 후에 교환수가 되었고, 해방 후 중앙전화국으로 전근해 영등포에 살았지요.” 

  남편은 전라도 광주의 방직공장 직원이었다. 아내가 임신하자 함께 살려고 남편은 전근을 신청하였고, 먼저 영등포 역으로 이삿짐을 보내왔다. 1950년 6월 27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온다던 남편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6.25가 터진 까닭이리라. 전쟁 중에 찾지도 못하고, 물어볼 데도 없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딸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50살도 못 되어 암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요. 마지막으로 딸이나 보고 죽어야겠다는 심정으로 간호사 딸을 찾아 독일에 갔지요. 금새 죽을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세 손주 키우다 보니 30년이 훌쩍 지나갔지요. 내 이야기 ‘천둥소리’를 교포신문에 발표해서 상으로 커다란 텔레비전을 받기도 했어요.”

  한평생 거미줄처럼 이어온 박 권사의 자서전은 한도 끝도 없다. 분명한 것은 야곱처럼 고달픈 나그네 길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이젠 진짜 <하늘양식>에 의지하며 산다. 하루에도 열 번씩 천국의 양식을 먹으면서 순간순간 하늘의 소망을 키워간다.

  (2018년 2월호, 월간<기독교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