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창비) 

  2023년 도서 추천의 첫 책으로 <파국이냐 삶이냐>를 선정한 바가 있다. 그 이후, 정책적인 팬데믹 종료 1년이 된 시점에서 과연 우리의 세계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상기해 보고자 주디스 버틀러의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를 선정했다. 팬데믹의 기간이 예상보다 길었고 국제적인 분쟁 이슈가 바로 연이으면서 과거를 반성하고 반추해 보는 기회 없이 너무 일선에 내몰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버겁도록 힘겨웠던 2023년 살이를 불과 며칠 남겨 놓고 ‘대체 왜 이리 힘든 것인지, 내년에는 좀 나아질련지.’ 복을 간절히 빌어보는 많은 이들의 심경에 통감되어 “삶의 조건들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일”로서 “세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 방법”(위의 책 166-7p)을 확보하는 연말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의 젠더학을 거의 완성시켰다고 해도 무방한 주디스 버틀러를 크리스천으로서 읽기 참 쉽지 않다. 소개할 책 내용 중에도 비성서적인 현상 해석과 과도한 근현대식 비평현상학을 근거로 한 해석들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다만 목회자로서는 더욱, 또한 크리스천들도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철학과 논리를 까막눈으로 거부하기보다 알고 올바르게 비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실은, 책 표지를 보면서 어느새 제목을 육성으로 읽고 있었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탄식과 얼마간의 분노와 좌절이 뒤섞인 목소리였을 것이다. 장 피에르 뒤피(<파국이냐 삶이냐>의 저자)와 비슷한 사고 과정을 겪은 버틀러는 형이상학적인, 이상적인 철학의 세계에서(플라톤의 이데아야말로 진정한 메타버스다.) 실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 만연한 현장에서 느끼는 신체에 직면한 철학으로의 방향 전환에 더 용이해 보인다. 신체와 사회가 맺는 강압적인 방식과 교육된 편견들에 대항해 오던 대상을 젠더와 비체에 두던 버틀러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훨씬 더 광범위하게 넓혔다. 즉, 비극적 사건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현상에 대한 폭넓은 인지다. 백신보유와 의료서비스에 대한 인종, 국가, 나이별 불평등과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경제활동에 내몰린 가난한 계층에 대한 차별적 가치체계가 그것이다.
 
 감명을 주는 책 제목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1951년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의 에세이에서 온 것이다. 세계대전 동안 변해 버린 세계에 대한 비통함이 담긴 ‘비극’에 대한 사회철학 상고가 버틀러에게 시사한 관점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경계 지어진 생물로서 외부로부터 온전하게 봉인되어 있는 독립자가 아니다. 나는 다른 이들의 폐를 통과하여 순환해온 공기를 들이마시는 공유의 세계 속에서 다시 내 숨을 내 뿜고 있는 것이다. (69p)
 우리는 서로에게서 온전히 독립되어 있지 않다(그리고 온전히 똑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계약이나 동의보다 먼저 이미 서로의 삶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136p)
 
 버틀러는 ‘격리’와 ‘비대면’이 불러온 ‘접촉에 대한 인식 변화’를 주목한다. 비말, 호흡기 전염을 막기 위해 서로 단절된 현상은 역으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상호연결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그것들을 단절시키는 것이 윤리라는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오히려 우리가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시키고 개별적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신체 접촉, 체현의 상실이 불러온 갖가지 사회적, 정서적 이슈가 속속히 보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면과 접촉은 단순한 만지기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는 상호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되는 유기체라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도 생각난다. 좋든 싫든 우리는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고 주고 있으며 이것이 세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 공동체란 소리다. 

 교회는 성도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곧 출간을 앞두고 있는 쪽복음 <고리도전후서>를 준비하면서도 뼈저리게 느낀 점이다. 존경하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반나치운동으로 죽임을 당한 본회퍼 또한 나치와 전쟁이라는 비극에 대항하는 성도공동체의 역할과 교회가 사회와 변증법적으로 협력할 수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성도라는 세계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중 자아의 화해를 꾀할 수 있는 영리한 방식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버틀러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세계가 나에게 들러붙어 있고 나에게 스며들어 있는 방식인 그러한 밀착의 형태’ 즉 ‘나의 반영성’이며 메를로 퐁티식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세계 사이의 포용’일 것이다. 동시에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육신으로서의 실재 ‘삶, 그리고 그 삶을 영위해온 세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둘 다이다. 그것은 그 둘 사이의 운동이다.(46p)’

 교회가 겪은 팬데믹 시기의 변화에 대해서 아직까지 우리는 제대로 현상비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그 전부터 팽배해 있던 ‘사회’와 ‘성도공동체’의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할것인지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 대가일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해서 버틀러에게 얻은 힌트는 그녀 철학의 핵심인 ‘애도’에 있다. 책의 4장 ‘살아있는 이들에 대한 애도 가능성’은 셸러가 말한 비극, 그리고 팬데믹의 비극이라는 현상을 ‘상실’로서 이해한다. 버틀러는 꾸준히 애도 가능한 이들과 가능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불평등으로 사회를 비판해왔는데, 팬데믹 동안 죽음에 대한 차별, 즉 특정 국가인의 죽음, 빈민과 인종의 죽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죽음과 백인. 유명인들의 죽음을 대하는 차별적 태도가 자본주의에서 시작된 인간가치 셈법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과 결을 같이 한다. 

 누구의 삶은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156p)에서 촉발된 애도가능성은 결국 팬데믹 시기의 폐기 가능성(의료서비스와 살만한 삶의 사각지대에서 가치순위가 밀린 계층)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불평등은 버틀러보다 우리가 더 이야기해야 옳을 것이다. 가난한자, 약한 자, 병든 자를 보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포용을 우리가 먼저 제시하고 세계를 품어야했다. 그렇지 못한 채 격리제도에 반항하는 방식이나 과학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팬데믹을 보냈다면 적어도 상실의 시기를 겪고 우울에 빠져있는 세계를 위한 희망이 되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버틀러가 제시하는 우울 해소의 방식, 즉 상실을 인정하고 상실의 사건 자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방어기제를 해체하는 과정 이후에 주변에 팽배한 상실의 감각을 애도와 요구로 바꾸어내는 것(161p)보다 우리는 참된 애도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천국의 소망과 복음의 진리를 갖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책 속에 적힌 유의미한 질문문장을 몇 개 소개하며 마친다. 이 질문에 대해서 메를로 퐁티와 셸러, 버틀러의 대답으로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깊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저런 통계들이 나타나는 세계는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산다는 것, 여러 생명체들 중의 하나로서 산다는 것, 생명의 과정들 중의 한 생명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무엇이 삶을 살 만하도록 만드는가? 세계가 슬픔에 젖어 있는 대상일 때, 그러한 세계에서 거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주체인가, 객체인가? 우리가 접촉을 상실하거나 서로와 가까이서 나누었던 숨결을 거의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계에서 살기 원하는가? 

박창수 목사 (인천 성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