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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나르는 사람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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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2월 07일 (목) 00:30:16 [조회수 : 2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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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나르는 사람들

어느 해 가을, 만산홍엽(滿山紅葉) 시절에 산길을 걷지 않는 것은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며 경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을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던가. 모처럼 산의 품에 안긴 채 느긋하게 걷는 동안 마음속에 깃들었던 그늘이 조금씩 벗겨져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소나무 등걸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싸들고 간 점심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먼 산을 바라보며 밥을 먹다가 문득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둘러보니 입에 도토리를 문 다람쥐 한 마리가 앙증맞은 앞발로 가랑잎을 헤적이고 있었다. 녀석은 그곳에 도토리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 셈이었다.

문득 시인인 벗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다람쥐는 하늘에 뜬 구름을 보고 그 밑에 도토리를 묻고는, 구름이 걷히면 묻은 자리를 찾지 못한 덕에 참나무가 번성한다는 것이었다. 시적인 표현이었겠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들렸다. 뭔가 비밀에 접한 듯한 흔감(欣感)한 마음에 혼잣말을 했다. “내가 다 봤다.” 다람쥐가 자리를 떠난 후 녀석이 숨겨둔 도토리를 찾아볼 생각에 가랑잎을 들추어 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굳이 찾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 멋진 순간을 다람쥐와 나 사이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어쩌면 세상은 이렇게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뭔가를 파종하는 이들 덕분에 푸르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심은 것 덕분에 살고, 우리가 심는 것을 후세 사람들이 먹을 터이니 생명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송파구에서 개척교회를 담임하는 K목사는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교인들의 헌금만으로는 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 덕분인지 학생들이 왜 수학을 어려워하는지 잘 이해하게 되었고,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노하우를 개발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교육의 기회가 적은 농어촌 교회 목회자 자녀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야겠다고 작정했다. 물론 무료였다. 교재를 마련하고 학생들을 모집하고 시간을 들여 정성껏 가르쳤다. 몇 달 간의 집중 학습을 통해 학생들은 수학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멋진 섬김이었다. 입소문 덕분인지 그의 수학 교실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K목사는 잠시 동안 목수로 살고 있다. 목회자로 사는 동안 말과 삶이 분리된 것 같아 늘 고심하던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주문받은 가구들을 제작하기도 하지만, 지붕이나 집 담장을 수리하기도 한다.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하고 노동은 고되지만 그의 표정은 밝다. 어쩌면 그가 일하는 그 현장이야말로 그의 목회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문받은 일만 하지 않는다. 예술가적인 천품을 지닌 그는 자기 일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돈벌이에만 마음을 쓴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의 태도에 감동한다. 화려하진 않아도 세상 도처에서 빛을 나르는 이들이 있다.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자 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말한다.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6:2) ‘그 손’이라는 구절은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라는 구절과  연결된다. ‘그 손’은 집을 고치거나 짓는 손 곧 노동하는 손이다. ‘그 손’이라는 표현 속에는 은근한 무시가 내포되어 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빈한한 가문의 사람, 노동자라는 범주 속에 가둬두려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사는 게 약자의 슬픔이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인정의 경계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 익숙함의 함정이다. 익숙한 데만 머물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없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배제함으로 자기들의 진부한 삶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어둠에 일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빛을 나르는 이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어둠에 삼켜지지 않는다. 그 밝은 빛을 감추어 사람들 속으로 스며드신 예수님이 그리운 계절이다.

(* 2023/11/22일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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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8.48.116.237)
2023-12-07 16:12:21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一說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隊商의 일원이 되어 인도에서 유학하다가(머물다가)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멀리서 온 ‘이사’라는 사람이 머물다가 간 흔적은 지금도 인도 도처에 남아 있다. 이걸 근거로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도 나왔다. 이 책의 저자는 예수님 말씀 속에 은근히 불교 가르침이 녹아들어가 있다고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 당시 隊商이 인도를 넘어 중국까지 넘나들었으까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지금으로 치면 나사렛 예수가 하버드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에 다녀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각설하고 무식꾼이 유식꾼으로 돌변하자 마을 사람들이 놀랐다. “너 목수 출신 아니냐?”라는 반응은 예수님이라서 달리 특별하게 차별한 게 아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민중은 똑 같다. 갑자기 돌변한 사람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하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반신반의 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시골이나 다 똑같다. 단지 예수님이란 이유만으로 차별한 게 아니다.

나 역시 동창회 같은 데서 무슨 말을 하면 “너 학교 다닐 때 C학점이나 맞고 아주 빌빌 대던 놈 아니냐? 혹시 너 뭘 잘못 먹은 것 아냐? 너 언제 그리 똑똑해졌냐?”하면서 조리돌리며 핀잔을 준다. 그러면 나는 씩 웃고 만다. 이런 게 다반사다.

그 당시 마을 사람이 돌변한 예수님을 보고선 “너 목수 아들 아니냐?”는 등의 놀란 반응을 보였는데 이걸로 예수님에 대한 ‘은근 무시’라고 하는 건 너무 나갔다. 세월이 흘러 목수가 예수님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마을 사람들로서는 나올만한 반응이다. 아무도 모르는 동네에 가서 예수님이 가르침을 전하면 원래부터 그런가보다 하지 예수님이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와 같은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본문 글 마지막 문장은... 예수님이라는 걸 알고서도 고향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배제했을 경우에나 어울린다. 목수의 아들이 예수님으로 돌변한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을 견강부회하여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빈한한 가문의 사람, 노동자라는 범주 속에 가둬두려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강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사는 게 약자의 슬픔이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인정의 경계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 익숙함의 함정이다.”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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