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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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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1월 27일 (월) 03:37:07 [조회수 : 3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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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사 55:9-13
(2023/11/26, 창조절 제1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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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참으로 너희는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잣나무가 자랄 것이며, 찔레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화석류가 자랄 것이다. 이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할 것이다.]

∎ 길이 막힐 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겸비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소설 절기로 접어들며 기온이 많이 내려갔습니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분들, 온기 없는 방에서 지내는 이들,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의 따스한 사랑이 전해지기를 빕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사흘 간의 휴전이 헝구적인 평화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코러스가 부르는 노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안티고네’ 332-333행,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p.105). 인간에 대해 깊이 통찰했던 아우구스티누스도 “사람이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심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몸에 배지 않은 선보다 버릇이 된 악이 자기를 지배함을 자각했기에 자기를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 감정, 의지는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죄는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입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지만 동시에 귀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깨진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현실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탄식은 더욱 직정적입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 17:9) 식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물은 그저 자기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오직 인간만이 거짓을 지어냅니다. 그게 생존에 유익하다고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혹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거나 자기를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인간은 거짓을 지어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이 아주 썩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교리화한 것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마치 썩은 사과와 같아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기 비하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니체는 이런 인식을 ‘노예 도덕’이라 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심연 속에서 우리는 희미한 희망의 빛과 만납니다. 그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레오나드 코헨의 ‘Anthem’이라는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모든 것 속에는 갈라진 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틈을 통해서 빛이 스며든다”(There is a crack, a crack in everything/That‘s how the light gets in). 살다보면 이런 저런 상처가 누적되어 마음에 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그 금이 깊어져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코헨은 그 갈라진 틈으로 빛이 비쳐든다고 말합니다. 은총이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시 51:17)이라는 시인의 고백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런 진실일 겁니다.

∎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망치고 하나님은 고치십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신비를 경험한 바울은 십자가의 신비를 이런 말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25) 오늘 읽은 이사야 본문은 사람들이 소위 제2이사야서라고 부르는 긴 단락의 일부입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 이하부터는 신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인 주전 6세기에 활동했던 익명의 예언자가 전한 메시지를 이사야서에 합쳐놓은 것입니다. 그를 본래의 이사야와 구분하기 위해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제2이사야는 정치적 격변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이들에게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하나님(사 40:29)을 전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 신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역사의 주관자임을 알 때 우리는 비애에 사로잡히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이 비록 무력해 보여도 반드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사 55:8)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9)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높음’을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 지혜이자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굴복시키는 것은 노예 도덕이 아니라 인격의 모험입니다. 가끔 낯선 분들과 우연히 마주쳐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거리에서, 전철에서, 서점에서 저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려웠던 시기에 저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 덕분에 시련의 어둠을 이길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면구스러운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계심을 깨닫고는 외경심에 사로잡힙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 비유가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막 4:26b-27)

제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제가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주님은 누군가를 치유하고, 위로하고, 북돋고, 꾸짖고, 각성시키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대지를 촉촉하게 적심으로 씨앗이나 뿌리를 깨워 싹을 내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일하고 계심을 알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 55:11). 이 말씀이야말로 어둠의 시대를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 역사의 새로움
조금 비관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시대를 매우 위험한 시대로 파악합니다. 뭔가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로운 시대를 꿈꾸지만 그 꿈은 점차 악몽으로 바뀌고 있고, 한가롭고 고요한 삶을 고대하지만 세상은 날로 소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우리 시대를 가리켜 ‘재앙의 징후들이 가득한 정상 상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기후 위기가 빚어내는 폭염과 한파, 대형 산불, 물 부족과 식량 위기,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항시적인 위험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삽니다. 위기라고 말하면서도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비정상의 정상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잘 간직하라 이르십니다. 레위기는 번제에 대해 말하면서 거듭해서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뜨려서는 안 된다”(레 6:12, 13)고 가르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탄식하는 이들은 많지만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된 인간이 세상의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인간입니다. 뜻을 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릭 리지웨이가 쓴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의류 브랜드인 ‘파타고니아’의 지속가능경영 부사장인데 평생을 모험가로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오지를 찾아다니고 그 비경을 찍어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리는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는 인생 하반기에 아내 제니퍼와 함께 파괴되고 있는 자연을 보호하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제니퍼가 예순아홉 번째 생일을 맞던 날 그 가족은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니퍼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투병하는 8개월 동안 제니퍼가 자주 한 말은 ‘다 그런 거지’였습니다. 그가 자기 운명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에게 닥쳐온 곤경이 자기 정신을 퇴색시키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정신과 의사가 병실을 찾았습니다. 그녀가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는지 정신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환자 분을 화나게 하는 일이 있나요?” 의사가 물었다.
“네!” 제니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뭔가요?”
“인종 차별이요!”
“아…네 그렇군요. 그건 괜찮고.”
“또 다른 것도 있어요!”
그녀가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뭡니까?” 의사가 물었다.
“이민자들에 대한 편협한 태도요. 그게 정말 저를 화나게 해요.”
(릭 리지웨이, <지도 끝의 모험>, 라이팅하우스, p.509-510)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의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세의 평안으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달려갈 길 마치는 순간까지 자기가 붙들고 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썼습니다. 희망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 오늘 우리의 소명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런 사실을 일깨우신 하나님은 이제 그 백성들을 새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참으로 너희는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사 55:12)

타향도 정 들면 고향이라고 이미 바빌론 생활에 익숙해진 이들은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등 시민으로 만족하고 살 것인지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가진 자유인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바빌론을 떠나라’ 이르십니다. 비록 시련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힘겨운 도전의 여정이라 해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를 용기를 낸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을 이사야는 인상 깊게 표현합니다.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심훈이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썼던 ‘그 날이 오면’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시인들은 우주적 신명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바빌론은 어디입니까?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이들이 우글거리는 바빌론, 건강한 노동보다 불로소득을 더 좋아하는 이들의 바빌론,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혐오함으로 자기 정당성을 찾는 이들의 바빌론, 사람들을 차별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바빌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돈벌이나 쾌락의 수단으로 대하는 이들이 득세하는 바빌론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시대의 어둠에 짓눌려 우울한 단조로만 노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서 잣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바꾸고, 찔레나무가 자라던 곳을 화석류(hăḏas)가 자라는 곳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어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제니퍼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 되심을 기뻐하는 이 날,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새로운 미래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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