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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언제까지,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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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1월 20일 (월) 10:21:14
최종편집 : 2023년 11월 24일 (금) 22:41:35 [조회수 :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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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언제까지, 어디까지일까?

 

독일 베를린 백림감리교회 김정애

오래 전 독일 로이틀링엔에 위치한 독일감리교신학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다. 교회사 수업시간에 학생들 간에 토론이 있었다. 한 학생이 푸념 섞인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외국 여행을 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독일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상대방은 바로 얼굴 표정이 굳어지며 히틀러나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자신 같은 독일의 젊은이들은 조부모대의 죄악의 대가를 지금도 치루고 있어 국제 사회에 나가면 고개를 못 든다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의해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독일은 과거 나치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죄하고, 이러한 참상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기억, 추모, 교육하는 일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해 독일에 거주하는 일부 아랍인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 유대 시위와 폭력적 행동들, 또 이에 맞서는 유대인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는 독일 정부는 이스라엘의 안보가 곧 독일의 ‘존재 이유’라고 언급할 만큼 이스라엘과의 강력한 연대를 표현하였다. 2008년 메르켈 총리는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독일의 역대 연방정부와 총리는 이스라엘 안보에 대한 특별한 역사적 책임에 헌신했다. 독일의 이러한 역사적 책임은 독일의 존립 근거의 일부이다,”라고 강조했다. 

독일의 루터교회들은 나치정부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속죄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다음 세대들을 교육하는 일에 적극 동참하면서, 해마다 두 가지 행사를 하고 있다. 첫째는, 1년제 자원봉사자를 유대인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던 나라들에 파견하여 희생자 유가족들과 유대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는 1938년 11월 9일 나치 돌격대와 독일인들이 유대인 상점들과 유대인회당을 공격했던 ‘깨진 유리의 밤(크리스탈나흐트)’을 기억하며, 매년 11월 9일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기억하는 행사를 하는 것이다. 


1. 속죄와 평화 봉사 활동 (Aktion Suehenezeichen Friedensdienst) 


베를린 샬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구에 위치한 할렌제교회(Halensee Kirche)에서는 매년 9월 첫 째 주일에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 이 예배에서 [속죄와 평화 봉사 활동 / Aktion Suehenezeichen Friedensdienst (ASF)] 소속으로 1년간 자원봉사자로 떠나는 교회 젊은이들을 축복하며 활동지역으로 파송한다. 올해는 이 지역에서 4명의 청년들이 이 활동을 위해 자원하여 교육을 받았다. 

이 활동의 시발점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 정권 시절 판사생활을 했던 로타르 크레이시크(Lothar Kreyssig, 1898-19860)는 당시 나치의 명령에 저항하던 고백교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Brandenburg an der Havel) 지방의 지방법원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후견판사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한편 정신장애인에 대한 책임도 맡았었는데, 1940년 여름 자신의 책임 하에 돌봄을 받던 장애인들이 다른 보호소로 옮겨진 후 대다수 바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나치제국의 법무장관인 프란츠 귀르트너(Franz Gürtner)에게 이 사실에 대해 문의하였고, 장애인들이 안락사의 일환으로 살해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런 잔인한 업무를 제국 총리였던 필립 볼러(Philipp Bouler)에게 맡겼었다. 로타르 크레이시크는 필립 볼러를 살인혐의로 신고했다. 그는 독일에서 이러한 행동을 한 유일한 후견판사였다. 물론 그의 신고는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크레이시크는 강제로 퇴직을 당했다. 1944년 그와 그의 아내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 유대인 여성을 숨겨 생명을 구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는 의로운 편에 서서 나치의 범죄와 많은 독일인들의 침묵에 용기 있게 대항하였다.

크레이시크는 1958년 60세의 나이에 독일 복음주의 교단의 지원을 받아 [속죄와 평화 봉사 행동 Aktion Sühenezeichen Friedensdienst (ASF)]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단체를 설립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호소하였다. “우리는 과거 나치 정부에 의해 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들의 조국에서 우리의 손과 수단으로 한 사람이 그곳에서 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곳이 어떤 마을이든, 교회이든, 병원이든, 혹은 어떤 단체이든 우리의 화해의 표시를 쌓아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장 큰 피해, 상처를 준 폴란드, 러시아, 이스라엘에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1959년부터 지금까지 [속죄와 평화 봉사 행동]은 해마다 독일 전역에서 지원한 백 명이 넘는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나치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본 나라들로 파송하여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이들은 활동지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함께 1주일을 지내면서 교육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1년 동안 독일 히틀러 정권이 점령했던 국가들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는다.

나치로부터 유럽이 해방된 지 올해로 78년이 되었다. 나치 치하에서 직접적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 중 극소수만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속죄와 평화 봉사 행동]에서 파송되는 자원봉사자들은 파송되는 나라의 양로원, 요양원, 유치원, 유대인 기념관, 혹은 유대인 묘지 등에서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 직접적으로 나치 정권 하에서 고통을 겪은 이들이거나 그 후손들, 혹은 전혀 관계없는 유대인들 - 과 대화하고, 그들에 대한 사죄를 행동으로 실천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었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독일인과는 다른 모습의 독일인을 경험하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이루어 가게 된다. [속죄와 평화 봉사 행동]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이후 여러 분야의 중요한 자리에서 일하면서 독일의 과거사 반성과 희생자 추모에 더욱 큰 동력이 생기게 되었다.


2. ‘깨진 유리의 밤 (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


‘크리스탈나흐트’, 일명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1938년 11월 9일-10일에 일어났다. 이날 독일 전역에서 나치돌격대와 독일인들에 의해 1천 곳이 넘는 유대회당이 불탔으며, 1만 여 곳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고, 약 3만 명가량의 유대인들이 검거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 끔찍한 테러의 밤에 수많은 상점의 유리창들이 깨어진 탓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깨진 유리의 밤’이다. 이 사건은 히틀러 집권 이후 거의 6년 동안 지속된 치밀한 유대인 차별과 박해의 정점으로 대학살 사건의 전주곡이 되었다. 나치정권의 유대인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을 시작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 마그데부르크의 파괴되어 버린 유대교 상점 - 출처:나무위키
   
▲ 불타는 유대교 회당 / 출처: 나무위키

올해도 ‘깨진 유리의 밤’ 85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추모 행사가 열렸다. 독일 베를린 샬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 구에 속한 루터교회 청소년, 청년 연합회는 해마다 ‘깨진 유리의 밤’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연극을 공연한다. 매해 팀이 구성되면 부활절이 지난 때부터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역사적 자료들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그 해의 연극 주제를 결정한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면서 한 주제를 선정하고, 연극 대본을 써내려가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완성된 대본으로 역할 분담과 함께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11월9일 무대에 올린다. 

올해는 ‘지하실의 참새들’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정권은 모든 청소년 모임들을 금지하고, 오직 ‘히틀러-청소년’{Hitler-Jugend}이라는 단체만을 허용하였다. 게슈타포는 나치정권이 금지한 모임이나, 그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사실에서 모티브를 가져 온 연극 ‘지하실의 참새들’은 어느 한 건물의 지하실에 모여 외국 방송을 몰래 듣고, 전쟁 상황에 대해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며, 나치의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계몽하는 일을 하는 한 비밀 청소년(‘참새들’) 그룹에 나치 정권에 의해 부모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혼자 남게 된 한 유대인 아이가 합류하면서 일어나게 된 일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대부분 십대인 학생들이 교회의 음악감독(Kantor)과 함께 준비한 이 연극은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는 면에서나 예술적인 면에서나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공연이 끝난 후 한 참가자에게 독일의 수치스럽고 참혹했던 역사적 사건을 그려내는 것이 아직 어린 청소년들로써 어렵지 않았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또래 그룹이 모여 대본을 쓰고 함께 연극을 준비한다는 것에 마음이 들뜨고 모이는 것이 즐거웠으나 함께 자료들을 연구하며 깊이 들어갈수록 가슴 아픈 역사가 실제적으로 다가와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역사적인 책임감과 함께 앞으로 감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이 연극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올 수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유럽연합을 이끌어가는 리더국가로서의 독일의 위상과 저력은 단지 경제적 부강함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지나간 과오를 낱낱이 밝히며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 그것이 국가적 차원이던지, 교회적 차원, 혹은 개인적 차원이던지 - 위에 소개한 두 가지 행사에 참여하면서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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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8.48.116.237)
2023-11-20 12:36:42
독일은 조상을 배척해도 괜찮은 構造고, 영국 벨기에 일본 등은 불가능한 구조다
빌헬름 2세가 망명지에서 히틀러에게 친서를 보냈다. “존경하는 나의 총통! 당신을 적극 지지하고자 합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후임으로 황태자를 지명해 王政復古 시켜주기 바랍니다.” 이걸 이리저리 흔들어 댄 히틀러는 호엔촐레른 가문과 융커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프러시아 군국주의 세력이 히틀러 품에 안기는 결정적인 원인을 카이저가 제공했다. 사실 카이저는 反히틀러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정복고를 이루고자 하는 일념으로 히틀러와 거래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하고 말았다. 카이저는 연전연승하는 독일의 승전보를 접하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敗하자 카이저도 없고 총통도 없었고, 황태자를 비롯한 살아남은 극소수의 융커세력은 전범으로 몰려 정국주도권을 장악할 수도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융커세력은 러시아의 허허벌판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독일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괜찮은 구조가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實事求是로 미국과 영국 쪽에 줄을 서야만 오늘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직감했다. 유태인 상인이 장악한 미국은 꾸준하게 홀로코스트를 거론했고 독일은 그때마다 참회한다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렇게 하여 국토의 2/5를 러시아와 폴란드에 뺏기고 겨우 남은 국토는 美英佛露에 4등분 된 채 살아남았다.

일본은 천황이 살아있다. 천황이 죽었다면 독일과 비슷한 경로를 걸었을 수도 있지만 천황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천황이 일으킨 전쟁 책임 운운하는 건 일본국민으로서는 아주 不敬한 일이다. 戰後 독일인은 자기들 살아남고자 히틀러, 카이저 욕하며 씹어대고 ‘정치적 올바름’쪽으로 방향을 틀어도 거리낄게 없었으나 일본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벨기에 레오폴드 국왕은 식민지시대에 히틀러 2배인 1천만명의 非유태인을 학살했다. 히틀러 저리가라 할 학살자인데 벨기에 왕실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벨기에 국민은 모르는 채 하고 넘어간다. 영국도 노예거래로 말이 많은 데 국왕의 묵인 하에 노예상인에 의해 자행된 인간 사냥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실이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몇몇 인권운동가 이외에는 모르는 채하고 넘어간다.

히틀러보다 더 사악해도 정권을 유지하고 있으면 까딱없다. 김일성, 습근평, 스탈린, 이디 아민, 푸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다루는 태도가 히틀러 버금가도 데 뭐 어쩌겠는가? 유태인이 이스라엘에서 정권을 딱 쥐고 있으니 인권운동가들이 아무리 나팔을 불어도 입만 아플 뿐이다.

일본, 영국, 벨기에 등은 조상의 책임을 후손이 나누어 맡아야만 되는 구조이고, 독일은 조상의 책임은 조상에게 몽땅 떠넘길 수 있는 구조다. 유달리 인류애가 뛰어나서 독일인이 홀로코스트 등에 사죄한다는 건 迷信이다. 스멀스멀 ‘독일의대안’이라는 정당이 반유태주의를 내걸고 독일에서 기민당 다음 가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공공연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 한분을 알고 있는 데 이 사람 曰 "사죄할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허구한 날 사죄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으로 먹고 사는 사기꾼 전부 다 확 쓸어버리고 싶다. 우리 조상은 정말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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