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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李信) 목사의 강론: “깨달음이 있는 신앙”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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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1월 06일 (월) 17:08:09
최종편집 : 2023년 11월 08일 (수) 06:35:56 [조회수 :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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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李信) 목사의 강론: “깨달음이 있는 신앙”

 

이신(李信) 목사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자나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1. “깨달음”이란 말에 대해서

구역성경에 보면 원래 “깨달음”이란 말은 인간의 자연적인 기능이 아니라 일종의 하나님의 선물로서(왕상 3:9. 단 2:12)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하여 주시는 카리스마적인 것이다.
 

   
▲ 왕상 3:9, 단2:12

 
그래서 시편에는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면 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27, 73, 125, 144, 169)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또 마땅치 않을 때 도로 회수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사 29:14)

   
▲ 이사야 29:14

그러므로 “깨달음”은 인간이 교육적으로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천래적(天來的)으로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다. 특히 하나님에게 속한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는 자연적인 기능이나 방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천래적인 깨달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기도하는 가운데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노라” 하면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 총명이 어두워진 것을 통회하고 자복할 때에 이상(異像)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단 9:13-27)

신약성경에는 “깨달음”이란 말(  )이 사십 회나 나오는데 주로 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 관련되어 말씀하고 있다.
 

   
▲ 신악성경에 40회나 나오는 "깨달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주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아직도 알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하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신 것을 복음서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막 7:14, 8:17, 21, 마 13:13, 51, 15:17, 16:9, 11:24-25) 특히 예수께서는 비유로 당신의 메시아 되심과 그 나라의 임재를 말씀하셨을 때 그 청중의 “깨달음”을 강력히 촉구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마 13:13-15, 19, 23, 51) 그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단순한 이지적인 것으로는 오히려 깨닫기 힘든 위에서부터 주신 통찰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官員: 잘난 사람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고전 2:6-7)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전 역사(全歷史)를 구원하실 수 있는 눈과 이해력은 단순한 지적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천래적 깨달음이 필요하다.

 

2. 깨달음과 믿음
 

   
▲ 이신 목사(좌측, 앞줄 첫번째-제1회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1959년)


 깨달음이 있는 믿음은 예수께서 항상 그 제자들에게 바라시던 믿음이었다.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도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지식했던 자였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기가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잘 보존했다는 자부심마저 가지고 내놓았으나 주인이 그 돈을 맡길 때의 심정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은 주인의 돈 맡기는 심정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증식하여 내놓았을 때 주인은 매우 기뻐하였다.(마 25:14-30)

어떤 명령과 강요라든지 그런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 교류가 생기고 그렇게 해서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요 천지가 없어져도 믿음직한 말씀임을 깨닫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의식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꼭 지적(知的)으로 알아야만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신앙을 고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인격과 통하는 영적(靈的) 혜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대립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다.(고전 1:20-21)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의 능력은 이런 “깨달음이 있는 믿음”에서 생긴다.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어떤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또는 어떤 권리에 좌우돼서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무한한 영력(靈力)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믿음” 가운데서 바울이 그렇게 고조했던 노예 종교의 자리에서 해방된 참 자유인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이제는 노예와 상전과의 관계에서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자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고 하였던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神)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하였다. 성령은 “지혜와 깨달음의 영”(사 11:2)이시다.
 

   
▲ 이사야 11:2

 
성령이 임할 때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오의(奧義)를 속에서 깨닫고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따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은 새 영(靈)을 줄 것인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除)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약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신앙과 신약적인 신앙의 다른 점은 참으로 “깨달음이 있는 믿음”이냐 하는 이 차이인 것이다. 과거의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구속하나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끄는(强勸) 도다”(고후 5:14) 하였는데,

 

   
▲ 고후 5:1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자가 속에서 부토 솟구쳐 올라오은 강함으로 그 예수를 자랑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앞 절에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그처럼 강력한 영력(靈力)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는 데서부터 용출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봉사하기를 원하신다. 구약시대에도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드리고 예물을 원하셨다.( free will offering, willingly, voluntarily: 출 5:19, 레 22:18, 21, 23, 38, 민 15:3, 신 12:6, 17, 에스랴3:5, 8:28, 시 119:119)
 

   
▲ 출애급기 5:19 등 구약성경에서


 사실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점은 그것이 자원하는 제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일 것이다. 신약에는 바울의 표현대로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였다”라고 한 자발적인 그것이다.(choosing of one’s self, 고후 8:3-4; forwardneness, willing mind, readiness, willing mind: 고후 8:11, 19, 9:2, 행 17:11)

 

   
▲ 고도 후서 8:3-4

 

   
▲ 고린도 후서 8:11, 19, 9:2, 행 17:11

참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낳을 때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하나임께 드려야지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런 자발의식은 “깨달음”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마음,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마음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발의식이 솟구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믿음 가운데서 바울이 그렇게 강조했던 노예적인 종교의 자리에서 해방된 참 자유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이제는 우리들의 신앙이 상전과 노예와의 관계처럼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곧 나의 일이요 가장 귀하고 생명이 넘치는 것임을 깨닫고 자발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 5:1)고 하였던 것이다.

 

3. 성령과 깨달음
 

   
▲ 신학 강의와 개척교회 현장에서:(좌로부터)-심영진 목사, 이신 목사, 고광석 목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았을 때 그의 제자들은 실의에 차서 다 자기 갈 속으로 흩어져 버렸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같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그들에게 번갯불처럼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가졌었다. 그 후부터 그들은 담대해졌고 솟구쳐 오르는 영력을 이기지 못하여 사방으로 나가서 복음을 힘차게 전하기에 이르렀다.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야말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순간인 것이다. 예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하신 대로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싻 곧 메시아가 받을 영을 “깨달음의 영”(사 11:2)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사야 11:2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고(고전 3:17), 또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음”이 있다. 여러 가지 깨달음 가운데서도 성령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도록 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간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인가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 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밖에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3) 그러므로 “깨달음이 있는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요 인간적인 지혜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신 목사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구사하시어, 글자를 사진으로 표기하였다. (강론:李信/문자정리:노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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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신(李信, 1927-1981) 목사는 감신 졸업 후(1950년) 전도사로 목회 시작하셨으나, 한국전쟁 때 고향인 여수 돌산으로 피신 중 환원운동으로 전환하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안수받았다.(1951년) 성서연구회 등 강의와 교회개척,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시다가 도미유학(1966년)으로, 밴더벨트 신학대학의 석, 박사(1971년)로 귀국하여 이대 등에서 강의하시었다. 

최근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 ”돌의 소리“ 등 유고를 후손 이정배 교수/ 이은선 교수, 이경 교수들에 의해 출판하여”성령신학“, ”영성신학”으로 토착신학, 한국적 K-기독교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강론은 “돌의 소리”, PP167-176의 글을 문서정리 하였다.(정리:노종해-2023. 11. 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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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 목사는 슐리어리즘 영의 신학자요 화가이시다!

 

   
▲ 이신 저: 돌의 소리(동연, 2012)
   
▲ 이신:"돌의 소리", 뒷 표지의 책 소개 글!
   
▲ 이신 저: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종로서적, 1992)
   
▲ 이신 그림: 새 그리스도로지(1980년)
   
▲ 이신 그림: 엄마와 아이들(1960년)
   
▲ 이신의 "한국 쉬르리얼리즘 연구소"(1979년)
   
▲ 이신 목사 저서와 영의신학, 토착 K-기독교 연구 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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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8.48.116.237)
2023-11-08 18:46:43
李信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기독교인을 구닥다리 취급하고 있는 교인들이 제법 된다.

李信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우위에 두었다.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는 한 인간이 자유의지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말짱 도루묵이란 거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위에 두다가 중간에 몇 몇 서적이나 종교선동가들의 감언이설에 선동당하여 뭣 모르고 섣부르게 ‘인간의 자유의지’로 넘어갔다가 주체성을 확립하고부터는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로 回歸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여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하여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을 훨씬 능가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을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하면 납득되는 경우가 차고도 넘친다.

이스라엘-하마스전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교 설명하고자 한다.

최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을 예로 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평화, 휴전을 부르짖는 사람들(주로 진보적인 지식, 종교인)이 인도주의니 인류애니 뭐라고 떠든다고 해서 전쟁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이런 전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남예멘-북예멘-사우디아라비아, 로힝야族과 미얀마族, 아프리카 종족분쟁... 지금 현재도 무수히 많다. 입에 평화를 달고 사는 진보지식인이나 진보종교인들 역시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그들도 별수 없이 총 들고 적을 무찌른다고 난리다. 상대에 대한 양보가 일절 없다. 웃기는 건 다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도덕군자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키릴 모스크바大주교다. 러-우전쟁은 불쌍한 러시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서 정당하고, 이-하전쟁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벌이는 전쟁이라서 즉시 휴전해야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어야한다고 한다. 편리한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다. 이런 사람들이 진보지식인(진보종교인) 중 유난히 많다. 전두환 타도하자는 사람이 김일성에겐 고개 숙인다.

러-우전쟁, 이-하전쟁을 구약에 나오는 무수한 전쟁과 연결시키면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누가 전쟁하고 싶어서 하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보복’을 동시에 부여했다. 예수님이 평화를 좀 더 강조한 것만 가지고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약에 나오는 대로 무수하게 전쟁한 것은 무엇이냐? 기독교인은 ‘三位一體’ 아니냐? 하나님의 전쟁 불사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평화 강조만을 偏食하는 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부조리가 쌓이고 쌓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랑의 다른 측면 보복심리가 쌓이게 되면 폭발(전쟁, 싸움, 살인)하게끔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천당’도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전쟁’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에게 무조건 단 ‘설탕’만 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인간에게 쓰라린 ‘사망(전쟁)’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 일관성 있게 조리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어떤 사건을 설명하면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耳懸鈴鼻懸鈴되고 만다. 이 부분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떠받들고 있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9.11테러 보복은 정당하고, 對하마스 보복은 부당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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