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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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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1월 05일 (일) 14:06:54 [조회수 : 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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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라
시 100:1-5
(2023/11/05, 추수감사주일)
듣기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울려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 어둠 속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으며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싶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전쟁 난민들의 신산스런 처지가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인해 절망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병원, 난민캠프, 학교, 그리고 구급차까지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 미친 살육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전쟁을 그치라는 요구가 하마스를 편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이 상황이 중단되기를 촉구해야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소개된 탈리오의 법칙 곧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을 우리는 원시적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과도한 처벌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이에게 몇 배로 되돌려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 그러합니다. 탈리오 법칙은 그러한 넘치는 복수 욕망에 제한을 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라멕은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허세를 부리듯 말합니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 4:23-24)

오늘 우리는 확성기를 통해 증폭된 라멕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폭력은 폭력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누군가의 가슴에 증오와 원망과 분노를 심는 일입니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게 마련이지만 폭력의 기억은 가슴에 새겨져 좀처럼 스러지지 않습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 작가 장 아메리의 증언은 생생합니다. 그는 고문을 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첫 번째 구타와 더불어 세상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고 말합니다(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안미현 옮김, 도서출판 길, p.91).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영원히 떠돌이로 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폭력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허탄한 신화일 뿐입니다. 그것은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행복의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아침이면 일어나 일터로 나가고, 저녁이면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친구들과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며 낄낄 거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하고, 여행자가 되어 세상을 느긋하게 떠돌기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 어두운 시절에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 곁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마땅치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체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는 어떤 것일까요? 다른 이들이 겪는 불행이 내게 찾아오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고 해야 할까요? 남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게 되어 감사하다고 고백해야 할까요?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일까요? 강요된 감사가 때로는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 충만의 윤리
감사가 강박관념이 되면 안 되지만 믿는 사람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앞에 멈춰 서서 자기 삶을 골똘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멈춰 섬이 중요합니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 것처럼 욕망의 벌판을 겅중겅중 뛰면서 자기를 성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은 늘 뭔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마음은 한껏 달아올랐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입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 분노, 서운함, 억울하다는 생각이 물결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우리 마음은 어느새 흙탕물처럼 흐려졌습니다. 노자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말이 떠오릅니다. ‘누가 혼탁한 물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을까?’(孰能濁以靜之徐淸)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차분히 돌아보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사는 모든 일이 다 선물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경민 님이 가사를 쓴 찬양 ‘은혜’를 아시지요?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미국 원주민 부족인 오논다가어에서 ‘감사’를 뜻하는 단어는 ‘모든 것에 앞서는 말’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그 부족민들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한 주를 시작하고 끝낼 때 학생들이 모여 ‘감사 연설’을 합니다. 대지, 물, 물고기, 초목, 작물, 약초, 베리, 동물, 새, 바람, 달과 별과 태양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를 돌아보며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입니다. 감사 연설은 인간이 세상을 책임진 것이 아니라 나머지 뭇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일깨웁니다. 그 부족 출신의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는 그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감사는 충만의 윤리를 계발하지만, 경제는 공허를 필요로 한다. 감사 연설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음을 일깨운다. 감사는 만족을 찾기 위해 쇼핑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는다. 감사는 상품이 아니라 선물로 다가오기에 경제 전체의 토대를 뒤엎는다. 감사는 땅에게도 사람에게도 좋은 치료약이다.”(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p.169)

오늘 우리가 낭독한 시편 100편은 온 세상 사람들을 기쁨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울려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1) 시의 화자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대관식에 모든 민족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고 부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꿈을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세계로 형상화했습니다. 이 세상의 특징은 ‘함께’라는 말 속에서 드러납니다. ‘홀로’ 만족하는 이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약자와 강자가 함께 어울리는 세상,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은 어떻게 열리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할 때 비로소 그런 세상의 꿈이 실현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이런 꿈에 매달립니다. 이런 꿈이 우리의 일상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도록 허용할 때 어둠의 지배력은 약화됩니다. 비록 지금 현실은 어둠이 지배하는 것 같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꿀 수 있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누구인가?
김현승 시인의 시 ‘감사하는 마음’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떠오릅니다. 그 시의 마지막 연이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이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시인은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3)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생명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빚어졌습니다. 그렇기에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종교인들의 허위의식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본래 인생이란 우연일 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기가 모이면 생기고 흩어지면 사라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생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니 굳이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 생명을 소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의 백성(ʿam)이라는 말은 단순히 소속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는 세상,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던 우리를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의 우애를 나누는 샬롬의 세상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감사드려야 하는 까닭은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과 테러로 찢긴 이들의 곁이 되어줄 마음이 우리 속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 속에 담긴 속뜻은 이런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하셨고,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아주 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 나오는 한 구절이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사 53:6).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 뭇 민족들의 찬양(4-5)
4절과 5절에서 시인은 주님께 나온 뭇 백성들을 찬양의 자리에 초대합니다. 민족과 피부색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빈부귀천 혹은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찬양의 자리에서 배제되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가르던 담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4)

감사의 노래, 찬양의 노래가 들려와야 할 땅에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 비명 소리, 탄식 소리, 애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라멕의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울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부를 노래는 무엇일까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를 아시지요? 신라의 신문왕 때 동해의 어느 섬에서 베어낸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데, 이것을 불면 적병이 모두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이고, 세찬 바람이 잠잠해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息) 피리(笛)라 하여 사람들은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합니다.

이런 신통한 피리는 더 이상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이 피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세상의 굉음 속에서도 끝끝내 그 노래를 포기하지 않을 때, 그 노래가 일으킨 파장에 따라 함께 노래 부르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 노래가 마침내 우렁우렁한 합창으로 변할 때 세상은 조금씩 변화될 것입니다. 그 노래의 주선율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5) 이 노래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꿀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노래가 세상의 어둠에 지친 이들에게 빛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를 그 놀라운 합창대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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