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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함을 잃어버릴 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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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0월 20일 (금) 04:30:08 [조회수 : 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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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함을 잃어버릴 때

김기석/청파교회

무릇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딱딱하다. 살아있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고사목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림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동일성 속에 머물 때 안정감을 느끼지만, 낯선 세계와 만날 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그 당혹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개시 가능성이다. 대립되는 세계와의 만남이 조성하는 긴장감 속에 머물 때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정신의 탄력이 증대된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무르려 할 때 우리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나 제도, 사회조직이 다 마찬가지이다. 경계선 위에 서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팔을 벌릴 때 자기 갱신이 일어난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명령은 ‘떠나라’는 것이었다. 익숙한 세계, 언제든 울타리가 되어줄 사람들이 있는 세계, 긴장하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낯선 세계에서 외인으로 산다는 것은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취약하기에 자기를 늘 성찰하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이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익숙한 세계를 떠난 사람이라야 평화의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삭도 떠나는 사람이었다. 행복하던 시절은 모리아 산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기억의 뒤안길로 물러가고 말았다. 짐승처럼 묶인 채 아버지의 칼날 앞에 섰던 사람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대교 전통은 이삭의 순종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삭이 감내해야 했던 트라우마에 더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소설가 이승우는 “이삭은 그때 이미 죽음을 맛보았다. 그는 살아 있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죽은 다음에, 죽었는데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이삭은 그 날 이후 성서의 무대에서 잠시 사라진다. 버림받음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삭은 비로소 집에서 쫓겨났던 이스마엘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타자에 대한 이해란 이런 방식으로 발생하곤 한다.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도 집을 떠나야 했다.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형의 분노를 피해 황량한 광야길을 걸어야 했다. 그가 베고 잠들었던 돌베개는 그의 신산스러운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낯선 곳으로의 이주 체험과 그곳에서 겪었던 서러움의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그의 성품을 이루었다. 야곱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끝끝내 버텨내며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긍정의 밑바닥에는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요셉의 삶도 떠남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잔인한 운명이 그를 아래로 아래로 밀어넣었다. 형들에 의해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졌고, 존엄한 인격을 박탈 당한 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내려갔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 철저한 낮아짐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 그는 자기 앞에 모습을 드러낸 형들과의 만남을 통해 마침내 자기에게 닥쳐왔던 모든 시련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유한한 시간의 지평 속에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신적 섭리 앞에서 누가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히브리인들도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굽을 떠나야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한 달음에 당도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시련과 인내의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사람들의 가슴 속에 형성되는 지향성이 아닐까? 로마의 가혹한 통치가 지중해 세계를 유린하던 때에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의 꿈을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주셨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는 것이 당연하던 세계를 해체하고, 높은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새로운 세상의 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꿈에 사로잡힌 이들을 세상은 불편하게 여겨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라고 모함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은 불온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불온함을 잃어버린 교회,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는 굳어지게 마련이다. 교단 총회를 보면서 느낀 소회이다.
    

 (2023/09/27일,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속으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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