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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함으로 잿빛 도시를 밝히는 사람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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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0월 14일 (토) 05:21:55 [조회수 : 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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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를 찾는 이들이 즐겨 찾는 개스타운 근처에는 노숙자들이 몰려 있는 거리가 있다. 약물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끼리끼리 모여앉아 몽롱한 시선을 주고받는 사람들, 남루한 차림새로 길에 누워 있는 사람. 묵시록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차에 탄 사람들은 차창을 통해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외면할 뿐, 아무런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그 거리를 걷지 않는다. 거리에 밴 냄새를 견디지 못하거나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운동 특기자로 대학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학업에 열중하던 레이첼(가명)은 졸업 이후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 노숙자들을 돕는 일을 택한 것이다.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하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딸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심 대견해 하셨다. “어렵지 않아요?” “아니오, 재미있어요. 하하하.” “위험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 착해요.” “냄새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제게는 냄새가 전혀 역겹게 느껴지지 않아요.” 짐짓 괜찮은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 일을 즐겁게 수행하고 있다. 그들이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식사와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레이첼의 긍정적인 태도에 노숙자들도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레이첼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가끔 타박을 해도 웃으며 응대한다.

가끔은 낯선 이들의 욕받이가 될 때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심리적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들의 처지에서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된 노숙자들은 레이첼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거리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레이첼은 명랑하고 싹싹하다. 그의 명랑함은 그 칙칙한 장소를 밝히는 한 줌 햇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햇살 한 줌이 누군가에게는 응달로부터 벗어날 희망으로 비췰 수도 있지 않을까? 거리에 나앉은 이들도 모두 행복을 꿈꾸던 사람들이다. 지금의 처지를 동경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어디선가 트랙에서 벗어났고,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며 큰 차이로 나타난 것뿐이다. 그들은 문명의 가속화된 시간을 견디지 못했거나, 중첩되어 찾아오는 절망의 인력을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을 숨 막히게 하는 제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이도 있을 거고, 아무리 몸부림쳐 보아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에 내몰린 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다. 누구도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줄 수 없다.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다르듯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 역시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산의 모습은 선 자리에 따라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바라보는 자리가 바뀌면 산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알 뿐이다. 인간은 총체적 인식을 지향하지만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노자는 도덕경 14장에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을 일러 ‘평평함’이라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일러 ‘희미’하다고 한다. 잡는데 잡히지 않는 것을 일러 아주 ‘작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들이 섞여 하나를 이룬다”고 가르친다. 세계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은 인간의 복잡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 복잡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이다.

우리 앞에 현전하여 있는 이들을 대체 불가능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 그들이 저마다의 꿈의 지층을 품고 있지만 잠시 흐름을 멈춘 사람 혹은 일시적으로 길을 잃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성숙한 관계의 단초이다. 그들과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존중이 필요하다. 그때도 그들을 당위의 굴레에 가두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와 생각과 지향이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이들은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일 뿐이다. ‘너는 왜 그렇게 살아?’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는 세상은 위험하다. 레이첼은 노숙자들을 클라이언트라고 부른다. 쉬는 날에도 거리에서 아는 노숙자를 반가워하며 팔랑팔랑 뛰어가 안부를 묻는다. 그 명랑함이 잿빛 도시를 밝히고 있다. 레이첼이 늘어날 때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김기석/청파교회
(2023/09, <월간 에세이>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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