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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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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10월 01일 (일) 20:57:40
최종편집 : 2023년 10월 09일 (월) 00:10:07 [조회수 : 2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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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합니다
시 131:1-3
(2023/10/01, 창조절 제5주)

듣기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 버리다, 돌아서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추석을 잘 보내셨는지요? 추석은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보고 잃어버렸던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삶이 사랑의 빚임을 잊을 때 사람은 작아집니다. 욕망의 거센 물살에 떠밀리는 동안 성정은 거칠어지고 명랑함을 잃게 됩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바장이다 보면 우리가 지금 인생의 어느 때를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성찰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에 자꾸 접속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1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열두 번째 노래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선지자 미가는 이 질문에 대해 아주 뚜렷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번제물이나 올리브 기름 혹은 우리 몸의 열매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합니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b)입니다. 저는 다양한 형태의 무신론 가운데 가장 위험한 무신론은 ‘실천적 무신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잘 믿고 있다고 여기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 임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사는 동안 형성한 자기 나름의 세계관, 가치관, 태도 등을 상징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이념에 집착하는 이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며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

이 번역은 의미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번역되었지만 시적인 운율을 살리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구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lō’라는 단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는 ‘아니다’라는 부정사입니다. 개역개정판은 이 단어를 다 살려서 번역했습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교만한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교만함이란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 곧 자화자찬입니다. 교만함과 연결된 단어 레브(lēḇ)는 마음이라 번역되지만 인간의 의지 혹은 이해가 거하는 자리를 뜻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이해는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시인은 그런 현실을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는 여러 시련을 겪은 끝에 높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고 두 손을 모았는데, 천사가 와서 그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느부갓네살은 천사에게 화를 내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너는 왕관을 쓴 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누구도 왕관을 쓴 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라는 번역에서 생략된 것은 ‘눈’입니다. 원래는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입니다. 눈(ʿayin)은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감각입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습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만든 틀을 통해 바라봅니다. 시인은 오만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만함이란 젠 체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만한 이들은 사실은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보다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가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우래憂來’의 앞부분을 되새기곤 합니다. “약령사학성弱齡思學聖,젊어서는 성인을 꿈꾸었는데, 중세점희현中歲漸希賢, 살다보니 현인도 쉽잖구나. 노거감우하老去甘愚下, 늙으니 하우도 감지덕지(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달게 여김), 우래부득면憂來不得眠, 그 걱정에 잠도 못 이루네”. 요즘 제 마음이 이러합니다. 교만한 마음, 오만한 눈을 내려놓아야 현실이 제대로 보입니다.

∎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
그 다음 대목을 보겠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1b) ‘아니다’에 걸리는 세 번째 내용은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는 것’,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큰 꿈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기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시인은 정반대의 길을 가리킵니다.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생을 권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큰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관계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목소리, 숫자, 힘 등이 떠오릅니다.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고진하 시인의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라는 시에는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세상에 대한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성적, 연봉, 아파트 평수 등이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그런 기준이 세워질 때 사람들은 다른 삶의 가능성에 눈을 감고 오직 한 방향으로 질주합니다. 지옥으로의 탈주인 셈입니다. 주님은 힘 있는 이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힘없는 이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지만 세상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런 현실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은 자기를 남과 구별해주는 특별한 것에 집착합니다. 과도함이 병인 줄 모르는 게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자족할 줄 모르고, 멈출 줄 몰라 삶이 고단합니다. 노자는 도덕경 12장에서 ‘말을 달리며 즐기는 사냥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고 말했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는 마음,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애쓰는 동안 기쁨과 감사는 고갈되고, 사랑해야 할 이웃들은 제거하거나 물리쳐야 할 적이 됩니다. 그럼 이긴 사람은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패자라고 하여 행복할까요? 선망과 원망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들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족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불안의 해독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족하라고 해서 세상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고,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하지만 싸움에 매몰되어 삶의 경이로움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숨결을 알아차리는 민감함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손해입니다.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눈을 버리고, 큰 일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평안이 찾아옵니다.

∎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
욕망은 우리의 의지가 특정한 방향을 향해 내달리도록 만듭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늘 숨이 찹니다. 다른 이들을 돌아볼 여백이 자기 속에 없기에 그들은 깊은 공감의 능력을 보이지 못합니다. 일렁이는 버릇이 있는 강물이 바다에 이를 때 고요하고 잠잠해지는 것처럼, 흔들림 속에 있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오늘의 시인의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버리고 내려놓자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2)

1절에서 마음을 뜻하는 단어는 ‘레브’였습니다. 인간의 이해와 의지의 자리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2절에서 마음이라 번역된 단어는 ‘네페쉬nep̄eš입니다. 이 말은 충족되지 않은 욕망, 감정, 열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마음이 차분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면 숨이 가지런해집니다. 숨가쁜 질주를 멈출 때 평온이 찾아옵니다. 시인은 그 상태를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모습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젖을 뗐다는 말은 이제 어느 정도 성장하여 더 이상 젖을 먹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젖을 만족스럽게 먹은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배가 고프면 아이는 허겁지겁 엄마 젖을 빨지만, 어느 정도 배가 차면 젖 빠는 것을 멈추고 엄마의 눈을 바라보기도 하고 방긋 웃기도 합니다. 무언의 교감이 일어나기 때문일 겁니다. 언어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자기를 한없이 사랑하는 엄마의 시선을 느끼며 아이는 평안한 잠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시인은 아기가 누리는 고요함과 평온함을 한껏 누리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안함이 우리에게도 있는지요?

∎ 신뢰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
시인은 이제 그런 삶의 경험 속으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3) 믿음이 영혼의 평안을 얻는 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 삶의 경험이 주변으로 조용히 확산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 도처에 흩어져 나가서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조용히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딱딱한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듯 그렇게 조용하지만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사람이라야 다른 이들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삶이 무거운 것은 자기를 의지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의지할 만한 토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자기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영혼의 징표입니다. 찬송가 214장 3절의 가사가 새록새록 다가옵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넘어지기 쉬우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아주소서’. 새롭게 빚어주실 주님의 손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주님을 깊이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상을 고대합니다.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 때 불안의 안개가 걷힐 것입니다.

물론 믿는다고 하여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은 여전히 찾아올 겁니다. 그래도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낙담하지 않습니다. 잠시 쓰리기는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을 때 우리는 현실의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 37:5). 노여움과 격분과 불평을 내려놓고 이 말씀을 등불 삼아 걸을 때 우리는 마침내 의가 이루어진 세상에 당도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 안에서 생명과 평화를 매개하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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