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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오래 전부터 열려있었다
김윤형  |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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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9월 25일 (월) 23:48:39
최종편집 : 2023년 09월 25일 (월) 23:51:05 [조회수 : 3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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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이주현 옮김, 1984Books. 2021)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평안히 잘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심란한 마음이었습니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본 첫 시신이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제 마음을 어지럽게 하더군요. 할아버지의 시신을 제가 직접 관에 넣어 드릴 때도, 성인 남자 6명이 들어야 했던 크고 무거운 관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화장 후에는 유골이 되어 성인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 수 있는 작은 상자에 들어가셨을 때도, 국립괴산호국원에 안치되셨을 때도, 그 일련의 모든 순간들이 제게는 형용할 수 없는 먹먹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함께 했던 추억도 많이 떠올렸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늘 술에 취하신 상태로 어린 저에게 “이 짱구같은 놈”, “야이 못난 놈” 하면서 꿀밤을 때리셨으니까요. 저를 볼 때면 늘 ‘사랑한다’고 말해주셨던 외할머니나, 표현은 잘 못해도 기쁘게 맞아주셨던 친할머니와 비교하면 할아버지는 ‘마귀 할아범’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를 ‘나를 괴롭히려고 태어났나봐’라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아빠가 할아버지를 보러 간다면 늘 가기 싫다고 떼썼던 기억들이 납니다.

 하지만 제가 자라면서 저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는 조금씩 따뜻하게 변해가셨죠. 더 이상 저를 “짱구 같다”라고도, “못난 놈”이라고도 말하지 않으셨고 꿀밤을 때리지도 않으셨죠. 물론 그렇다고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셨지만, 저를 볼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주시면서 “열심히 하면 돼”, “잘할 수 있을 거야” 같은 말들을 해주시기 시작하셨죠.

 스무 살이 넘어서야 그것이 할아버지의 서투른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제게 꿀밤을 때리셨던 것조차 말이지요. 그래도 ‘할아버지가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다정하게 표현하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더 무뚝뚝하게 대하고 솔직하게 대하지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할아버지의 서투른 표현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조금은 생겨났지요.

 이처럼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언젠간 이 순간들을 모아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순간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가 될 거라 생각했었죠. 왜냐하면 지금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수록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의 저에겐 그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글을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건 며칠 전에 읽은 한 책 덕분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을 무렵, 저는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처음 보는 독립 서점을 발견했습니다. 독립 서점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저이기에, 저는 그 서점에 들어가 천천히 책을 구경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 눈에 확 띄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환희의 인간>이라는 책인데, 그 이유는 그 책의 띠지 때문이었습니다. 책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그 문구를 본 순간, 그 책을 읽을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런데 그 책의 첫 페이지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아세요? 그 책의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이 책이 저를 크게 변화시킬 것만 같은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책을 구매한 뒤 집에 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환희의 인간>을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죠. 글을 쓰다 보면 할아버지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의 문을 열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대리석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 느낀다. 여러 달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충격에 뒷걸음질 친다. 더는 세상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68)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고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죠.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겨진 자와 떠난 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벽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영원히 갈라놓는 것만 같죠. 하지만 보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부재 속에서 꽃들이 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듣게 된 것이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 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 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70)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이 세상의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뱅의 글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니 여전히 이 세상에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인지 요즘은 길을 걸을 때, 하늘을 바라볼 때, 나무를 볼 때, 이런 순간들 속에서 할아버지를 어렴풋이 느끼며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보뱅은 <환희의 인간>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문은 없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이 푸르름 안에서 꽃의 웃음과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 곧장 나누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를.”(185)

 할아버지, 저는 이 책을 통해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이러한 것들이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는 중입니다. 또한 신학을 한다는 것,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으나 제가 보지 못했던 문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할아버지가 저에게 많은 말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그러니 앞으로도 저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제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 저 또한 부끄럽지 않은 손자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사랑을 담아, 김윤형 올림.

김윤형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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