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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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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9월 17일 (일) 22:12:47
최종편집 : 2023년 09월 17일 (일) 22:54:26 [조회수 :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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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고전 1:26-31
(2023/09/17, 창조절 제3주)

듣기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부르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로코의 대지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는 소식과 거의 동시에 리비아의 대홍수로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주님께서 위로와 사랑의 손길로 그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빌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도 성심껏 그들이 재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후원을 하려고 합니다. 자연재해는 무차별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피해는 가난한 나라나 사회 계층들에게 집중됩니다. 기후 붕괴의 조짐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규모는 날로 커질 거라는 예측이 우세합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은 어느새 잦아들고, 묵시록적 공포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인류애가 발현되어야 할 때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인 레베카 솔닛은 대규모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연대의 몸짓에서 세상의 희망을 봅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 최악의 행동을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오히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인류에 대한 희망을 봅니다. 그는 믿음이 행동을 결정한다면서 “우리가 형제를 보살피는 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낙원에서 추방된 사람”(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해영 옮김, 펜테그램, p.12)이라고 말합니다. 재난을 복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 씀에 따라 복이 유입되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창12:2b)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단순하게 복을 뜻하는 ‘베라하bᵊrāḵâ’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삶이야말로 복된 삶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고전 1:26)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부르심을 특별한 소명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며칠 전에 만난 어떤 의료인은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짐바브웨에 의료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말하더군요. 연휴를 봉사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감사원장을 지내셨던 한승헌 변호사님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 아니겠냐고 하신 말씀이 제 기억에 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서 고생하는 이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쩌면 그분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있는 분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부르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부르신 것을 뜻합니다. 부르심은 그러니까 욕망 위에 구축하던 옛 삶의 자리를 떠나 사랑 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욕망은 자기 회귀적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세상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사랑은 자기에게서 벗어나는 능력입니다. 자기에서 벗어남으로 더 큰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부름 받았다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
부르심은 은총입니다. 자격시험을 보고 입장을 허락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기준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았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 21:31b)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적 지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세상의 담지자인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기들의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자기의 삶에 멀미를 느끼는 이들입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변화는 언제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모든 말은 어떤 상황 속에서 발생합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 첫 마음을 잃어버렸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고전 1:26) 한마디로 스펙을 자랑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던 그들이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은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감격 속에 있을 때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너그럽고 겸허합니다. 문제는 감격에 지속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격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일상의 환멸입니다.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돌아간 자리에 남은 지저분한 흔적처럼, 감격 이후의 시간은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기가 소외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가인의 후예인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분쟁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따지는 동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성도들 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친밀한 감정과 사랑이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편이니 아볼로 편이니 싸우는 사람들을 두고 바울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르심 받았을 때의 처지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그 뜨겁던 사랑과 함께 함의 감격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구성하는 계층은 사실 다양했습니다. 회당장도 있었고 로마의 재무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인 대부분은 ‘명예’를 매우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생각하는 그 시대에 무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녹아 새로운 존재로 빚어져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인 면들이 드러나면서 사랑의 공동체는 위험에 처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해 조금은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강함을 자랑하는 사람들,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어리석은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조를 아시겠지요? 소위 잘났다 하는 이들과 대비되는 이들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것들’입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바울은 그 당시의 통념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다수는 당시 사회에서 그 성원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 곧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인간의 존엄을 되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을 택하신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 새로운 피조물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기준이 되려는 욕망이 강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그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 소통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무리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자기 생각 속에 욱여넣으려 합니다. 그래서 불화를 만듭니다. 새로운 세상은 자기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통해 도래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배우려 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말씀은 깨어져 열린 마음에 자리를 잡는 법입니다. 스스로 취약해질 때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 사람은 겨우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죽음의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지금까지 집착해온 자기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음을 자각합니다. 돈, 출세, 명예, 권력은 다 부차적인 것들이 됩니다. 우애로운 가족관계, 벗들과의 친밀한 만남, 나뭇잎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 별이 총총한 하늘,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마치 기적에나 접하듯 기뻐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숨결이 가득 차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생명이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세상은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때 열립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6, 28) 하신 주님의 말씀은 암담한 세상 현실에 눈을 감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암담한 현실을 돌파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삶을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그릇됨을 지적하는 저열한 쾌감을 멀리해야 합니다. 헛된 자만심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될 때 이웃 사랑이 시작됩니다. 이웃 사랑이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의 출발점은 우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아차리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 속에서 생성될 때라야 우리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고전 1:30).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새로운 창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절이라 칭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절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화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화해한 이들은 사람을 가르는 담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 은혜의 풍성함
이제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고전 1:30). 의(dikaiosynē)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가능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거룩함(hagiasmos)이란 어떤 걸까요? 아브라함 J. 헤셸은 “경건이란, 삶으로 번역된 신앙이며 인격이라는 몸을 입은 영”(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4,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327)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거룩함의 표상입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일 뿐입니다. 죽은 신앙은 딱딱해서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스스로 잘 믿고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이들이 많습니다.

구원(apolytrōsis)은 속박에서 풀려남 곧 해방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도 말 일이고,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고정된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진 이들은 자기 삶을 사랑의 빚으로 인식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 116:12). 이 마음 하나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나는 명령받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 평화를 만드는 것,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 우울한 세상에 명랑한 기쁨을 가져가는 것, 불의에 저항하는 것,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지혜에 접속할 때 우리는 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추열매에 노란빛이 스며들고, 밤송이가 누렇게 변해가는 이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주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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