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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이진경  |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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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9월 11일 (월) 23:43:11
최종편집 : 2023년 09월 11일 (월) 23:44:29 [조회수 : 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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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음악의 아버지 바흐,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 천문학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등등. 어떤 분야와 관련하여 그 분야의 대가에게 붙여지는 ‘아버지’라는 명칭은 매우 영광스럽고 존경어린 칭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분야가 살상무기라면 어떨까? 더군다나 그것이 전 인류를 소멸시킬 만큼의 끔찍한 대량살상 무기라면? 그런 분야의 아버지가 과연 존경과 영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 대량살상의 아버지로 불린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오펜하이머였고 그는 무려 ‘원자폭탄의 아버지’였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말하자면 모든 분야에 통달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만능인(homo universalis)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철학, 문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언어의 천재였다. 그는 현대어 뿐 아리나 여러 고대어를 섭렵했다. 그의 뛰어난 언어 능력을 보여주는 유명한 예는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오펜하이머는 네덜란드어를 배운 단 일주일 만에 네덜란드어로 물리학을 강의했던 것이다. 그는 산스크리트어까지 공부하여 힌두교 경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원자폭탄 실험 직후 그가 했다는 유명한 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말 역시 힌두교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 등장하는 말이었다.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살면서 아인슈타인처럼 유대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나치가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는 소식과 함께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위임받는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조직 운영 능력까지 겸비한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천재들을 모으고 연구에 박차를 가해 마침내 인류 최초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 중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 폭탄이 실제로 일본에 투하되어 이차세계대전이 종전되었다는 것이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는 오펜하이머가 과거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반공산주의 열풍의 희생양이 되어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선과 악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적인 천재 오펜하이머의 삶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컴퓨터의 활용을 극도로 배제한 아날로그적 제작 방식과 함께 3시간 분량의 아이맥스 영화로 소개한다.

자신이 만든 무기가 전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펜하이머는 처음에는 이론적으로,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에는 경험적으로 절실히 자각하게 된다. 그 깨달음이 불러일으켰을 양심의 가책과 윤리적 갈등과 고민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현실의 오펜하이머는 그저 윤리적 회의나 좌절감에 빠져들지 않고 어떻게든 이 무기를 전 인류가 함께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현시키려 애쓴다. 여러모로 불완전한 한 인간이 거의 감당하기 불가능한 윤리적 결정 앞에 고뇌하고 갈등하는 모습 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그 선택의 대가를 통렬히 치르는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에게 불을 건네주고 영원히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오펜하이머 전기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제목을 붙였고, 영화는 바로 이 전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론적인 핵분열을 실제적인 폭발체에 적용하려 했을 때,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폭발로 인한 핵분열이 대기 중으로도 계속 연쇄되어 일어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었다는 사실을 영화를 우리에게 알게 해준다. 즉, 폭발이 한정된 장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기로 확장되어 전 지구로 팽창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낀 장군이 원자폭탄 실험 직전 그 확률을 묻자 오펜하이머는 ‘0에 수렴한다’고 답변한다. 0이 아니고 0에 수렴할 확률, 그러니 그 실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그 실험으로 전 지구가 폭발할 수 도 있다는 ‘만의 하나’를 배제하지 않은 채 실험을 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로 인하여 인간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경지의 힘에까지 다가서게 되었다. 비단 원자폭탄뿐일까, 이미 여러 분야에서 신의 능력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인간은 천사도 악마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친히 인간의 손에 맡겨두신 지구는 점점 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 오펜하이머의 어두운 대성공을 곱씹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맞닥뜨렸던 고통스런 선택이 여전히 우리 앞에 동일하게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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