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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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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9월 10일 (일) 14:13:35 [조회수 : 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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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
눅 6:43-45
(2023/09/10, 창조절 제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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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어디에나 사람은 있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로코 지진 사망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교사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 절기에 접어들었지만 낮에는 여전히 무덥습니다. 백로 무렵을 가리켜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고도 하는 데,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철학자 김용규 선생님은 딸 유림 씨와 함께 쓴 은유에 관한 책을 제게 건네주시면서 둘째 권에는 날짜 대신에 ‘능소화 필 때’라고 적으셨고, 셋째 권에는 ‘조팝나무가 하얘질 때’라고 적어주셨습니다. 책이 나온 시기에 따라 달리 적은 것입니다. 밋밋한 아라비아 숫자보다 계절 감각을 담은 그 말이 한결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때를 아름답게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 때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누리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오늘도 목마름 속에서 허위허위 인생의 언덕을 오르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에 흠뻑 젖어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주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환대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분들이 많았지만 성심을 다해 맞아주시고,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시간이 제게는 아주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랜 이민 생활을 하면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분들을 만날 때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분들이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아픔이 떠올라 숙연해졌습니다. 문화도 풍속도 다른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민자들에게는 모어의 세계에 사는 이들이 알지 못하는 신산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금방 그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지만, 낯선 세계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낯선 곳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취약함이 기본값인 삶을 산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 일들을 겪었기 때문일까요? 한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그분들이 집 이외의 장소에서 모국어를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고, 정서적으로 자신이 수용되고 있음을 느끼는 아주 소중한 장소입니다. 물론 사람이 모인 곳에 갈등이 없을 수 없고, 여러 가지 불협화음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향이 되어주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물론 그 구심점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있습니다.

조금 나이가 든 탓일까요? 이전에는 똑똑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 깊은 사람, 겸손한 사람,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VIEW라는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저는 진리 혹은 진실에 목마른 많은 이들과 만났습니다. 그분들과 성경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면서 하나님 체험이 어떻게 무르익어 가는지를 되짚어보았습니다. 인간을 찾아오시는 낯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는 하나님의 마음, 그러나 하나님을 충분히 알았다고 느끼는 순간 마치 손살을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다시금 낯설어지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께 자기 삶을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 교우들과도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나무와 열매
오늘 본문은 이번 여정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말씀입니다. 내용은 단순합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살이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수수께끼인 존재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늘 변화함 속에 놓여 있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는 평안한 때에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살지만, 비상한 상황이 닥쳐오면 새로운 모습으로 자기를 변화시키기도 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최고의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이 밴쿠버의 한 마트에서 생선을 손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존재의 전락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기 삶에 성실한 사람입니다. 과거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를 변화시켰으니 말입니다.

동일한 구절도 놓인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말은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을 오도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잘 분별해야 한다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불화, 교만, 사나움, 배타성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맥락이 조금 다릅니다. 누가는 이 말씀을 ‘남을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남에게 후히 주라’, ‘남의 눈에서 티를 빼주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빼내라’는 교훈 끝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나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늘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라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시편 1편은 누가 복 있는 사람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않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이미지야말로 사람들이 그리는 기독교인들의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너무 환경 조건이 좋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나무는 곧게 높이 자라지만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속절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좋은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라 하겠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락함 속에서 모자란 것 없이 자란 사람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실패를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일수록 공감의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한계에 직면해서 절망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족적이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낯선 이들과 만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들과 불필요하게 엮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런 이들은 이웃의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동료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고통은 우리가 한사코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것이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일 수도 있고,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두 가지 문 앞에 세웁니다. 하나는 원망, 질투, 불평, 분노의 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은 늘 다른 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이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고문하며 삽니다. 다른 하나는 공감, 인정, 존중, 사랑의 문입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이들은 자기가 고통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지금 시련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신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우리 마음에 쌓고 있는 것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 가시나무는 성경에서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가시나무로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겠지만 언어를 기호로 사용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가시나무 혹은 가시덤불이 가리키는 것은 인정이 메말라 황폐해진 마음, 타자들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린 마음,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목사님이 만든 곡 ‘가시나무’라는 노래는 이런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의 쉴 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당신의 편할 곳 없네/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가시나무 같은 마음으로는 다른 이를 품을 수 없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가시나무 같은 마음을 품고 사는 이들과 만나면 우리 몸과 마음에 상처가 많이 남습니다. 똑똑하지만 품이 부족한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자기의 옳음에 집착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형편을 헤아릴 줄 모릅니다. 신앙은 커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짐짓 겸허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울타리를 허물고 더 큰 세계 앞에 겸허하게 서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저런 일로 심란할 때면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의 화가인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그림 ‘바닷가의 수도승’(110 * 172cm)을 찾아보곤 합니다. 화면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잿빛 하늘입니다. 바다는 거칠게 일렁입니다. 그에 비해 대지는 아주 작습니다. 그 위에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숭고미를 자아냅니다. 압도적인 세계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미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큰 세계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의 작음을 절감합니다. 그 큰 세계 앞에 설 때 마음이 정화됨을 느낍니다.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스며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씀이 우리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이 누적될 때 우리의 성품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음에 갈무리해 놓은 것이 우리의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오늘 우리는 마음 속에 무엇을 갈무리하며 삽니까?

∎ 멋진 젊은이
이번 여정 중에 만난 아주 아름다운 젊은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는 여성이고 시애틀에 있는 명문 대학을 나온 재원입니다. 골프 선수였던 그는 학업에서도 탁월한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그런데 졸업 이후 그가 선택한 직업은 노숙자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은 그의 선택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 마음이 이끄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밴쿠버에 있는 노숙자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노숙자들이 마약 중독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마약에 처음 손을 댄 날 맛보았던 행복감을 잊지 못해 거듭거듭 마약을 사용하지만, 그런 행복감은 다시는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약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밴쿠버 시내의 어떤 거리를 차를 타고 지나다가 그 긴 거리 전체에 마약 중독자들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치 종말을 맞은 세계를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들과 매일 만나 숙소로 안내하고, 먹을 것을 제공하고, 병원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위험하거나 힘들지 않냐고 묻자 그는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재밌어요’라고 대답하며 킥킥 웃었습니다. 잠시 동안 경험삼아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해 그 일을 계속하는 동안 노숙자들은 그를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노숙자들을 ‘클라이언트’라고 부릅니다. 쉬는 날에도 길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달려가서 안부를 묻고 도울 일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에게 그런 마음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을 통해 그에게 믿음과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좋은 나무는 홀로 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남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자기 마음에 갈무리해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머무는 자리가 어디이든 자칫하면 무거울 수도 있는 분위기를 유쾌함과 명랑함으로 가볍게 전환시키는 명수입니다. 그 젊은이를 보며 저는 깊은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던 주님과 그는 깊이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설 땅이 되어 주고 있고, 칙칙한 어둠에 갇힌 이들에게 한줌 햇살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우리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 것은 아닌지요? 너무 자기에게 몰두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마음에 선을 쌓고, 그 선을 꺼내어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라는 부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로 절기입니다. 온 세상의 메마름을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부드럽게 적셔줄 수는 있지 않을까요?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빕니다. 그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우리도 누군가의 굳은 마음에 이슬처럼 스며들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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