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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극복과 평화를 위한 노력– 독일에서의 지속적인 여정과 에큐메니칼 파트너로부터의 배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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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8월 29일 (화) 13:15:28
최종편집 : 2023년 08월 30일 (수) 00:23:52 [조회수 :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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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3

분열 극복과 평화를 위한 노력

– 독일에서의 지속적인 여정과 에큐메니칼 파트너로부터의 배움 –

 

로즈마리 밴너 감독/세계감리교협의회 제네바 총무

   
 

서론 – 개인적 발언

1989년 11월 9일, 남편과 함께 아조레스 제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현지 언어에 능숙하지 못했으나 날씨 뉴스를 보기 위해 TV를 켰다. 뉴스에서 본 것은 믿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고 있었고 모두 환호하는 것이었다. 장벽은 더 이상 국가를 두 개로 나누는 요새가 아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불확실함과 소란, 두려움, 희망에 대한 많은 기도 후에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2006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비무장지대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고 남북한의 경계선을 보았다. 독일의 분단은 한국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국민들의 아픔을 느꼈고 그 중 일부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

이 자리에서는 독일의 역사 중, 특히 통일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후 독일의 통일에 관한 고찰을 나누도록 한다.

 

1. 독일 역사에 대하여

 

1945년 5월 8일, 독일 나치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을 4분할하였다. 당시 수도였던 베를린도 4개 동맹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지리적으로 베를린은 소비에트 지역에 속해 있었다. 1949년 5월 23일, 베를린의 세지역이 서구 체제를 따르는 민주 국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형성하도록 허용되었다. 1949년 10월 7일, 소비에트 지역은 나중에 바르샤바 조약으로 불리는 동구권 내의 사회주의 국가인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되었다. 두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 연합군은 베를린이 계속해서 분단된 도시가 될 것이며, 소련이 점령한 부분이 동독의 수도가 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서독에서 베를린으로, 혹은 반대로 이동할 때는 항상 동독을 거쳐야 했다. 한국과는 다르게 두 독일 국가 간의 전쟁이 없었고 가족, 교회 및 시민 사회 간의 관계 지속이 가능했다.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동독은 점점 폐쇄된 국가가 되었고, 1961년 8월 13일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경계선에 철조망과 자동소총, 스파이 등으로 자국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분단된 독일은 냉전의 체제나 군사적으로 주요 전장이었다. 오늘날까지 미국의 핵무기는 독일에 배치 되어있다. 두 독일 국가의 관계는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수상이 동독을 방문하여 “융합을 통한 변화”라는 정치적 전략을 시행하면서 개선되었다. 80년대 후반,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경제적 부실, 자유민중운동, 모스크바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자유와 자본주의를 향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의미하는 “페레스트로이카” 허용 등이 있다. 동독에 관해서는, 동독과 서독의 소수의 사람들 만이 분리된 두 국가의 신속하고 평화로운 통일을 꿈꿨다. 독일은 “재통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토 중에는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의 일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비록 독일 국가가 하나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독일과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2. 통일을 위한 동독 교회의 기여

 

동독 정권은 무신론을 따랐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었지만 큰 박해는 없었다. 교회 생활과 에큐메니칼한 관계는 여전히 가능했다. 오히려 50년대에 큰 감리교회들이 세워졌고,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갔다. 연합감리교회는 1970년에 두 개의 지역에서 연회를 세웠지만 동독과 서독의 두 연회는 지속적으로 소통하였다. 성도들의 파트너십을 통하여서 70년대부터 서독의 성도들은 동독의 파트너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비자를 받기도 하였다. 공산정권의 비밀기관은 교회생활을 비판적으로 감시했지만 성도들과 교회 건물은 예배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 문제에 참여하고 덜 제약적인 미래를 꿈꾸고 전략을 세우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교회는 무장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의 그릇이 되기도 했다. 때때로 동독은 지출의 11%를 군사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인내와 창의성 그리고 기민함을 가지고 군사화에 반대했다. 교회가 억압적인 국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할 때 썼던 한가지 영리한 방법은, 교회는 책이나 전단지 등을 인쇄하려면 국가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옷감이나 장식에 인쇄하는 데는 허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한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작은 섬유공장에서 전 소련 대통령인 흐루쇼프가 1959년 뉴욕에서 UN에 준 선물인 유명한 동상의 이미지를 인쇄했다. 동상에는 미가 4:3의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재킷과 셔츠에 인쇄된 단추를 달았다. 이러한 상징은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대중의 증언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 조직된 “평화기도회”에 참석했다. 평화기도 운동은 8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80년대 후반에 이 기도회는 영적 자양분을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변화를 위한 대중들의 평화 시위를 주선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동독 내에서 발생했다. 사실 독일의 통일은 분단으로 인하여 억압받고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노고의 결실이었다. 변화를 위해 목숨을 건 동독의 사람들과 서구에서 운동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주요 목표는 비무장과, 삶의 질 개선,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민주주의, 이동의 자유였다. 장벽이 허물어지고 국경이 개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많은 동독 사람들이 빠른 통일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의 미래를 위한 해방운동을 통하여 더욱 적합한 절차를 밟아 가길 원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독일의 미래를 위하여 사회주의적 특성(독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남용을 제외하고)을 받아들이고 더욱 하나된 국가를 건설하길 바랐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매우 매혹적이었고, 불과 1년 만에 통일이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였고 그것은 동독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3. 초국가적 및 국제적인 기여

 

변화를 위해 동독 외부의 교회들로부터 기여가 있었나? 그렇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교회는 지속적으로 관심과 경계를 통하여 장벽이나 무기가 주 안에서의 연합이 깨지지 않도록 지켰다. 그리고 교회는 동독 시민들이 기독교의 국제적 정세를 알게 하기 위해 여러 행사 및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1983년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에서 나온 안은 동독과 전체 "동구권"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밴쿠버 WCC 총회에서 동독 대표단은 1933년 디트리히 본회퍼가 요청한 바에 따라 평화에 관한 에큐메니칼 평의회를 발족할 것을 제안했다. 총회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정의, 평화 및 창조의 보전을 위해서 일하도록 격려했다.

1989년 5월 유럽 에큐메니칼 총회와 1990년 서울 세계 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동독에서 1988년과 1989년에 드레스덴 마그데부르크, 드레스덴 순으로 세 차례 에큐메니컬 총회가 열렸다. 동독 정권은 교회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정의, 평화 또는 피조물 보호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WCC와 같은 국제기구로부터 국제적인 파트너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따라서 동독의 교회들은 1988년과 1989년에 세 차례 전국 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변화를 향한 움직임을 논의하는 발판이 되었다. JPIC 총회는 모두의 기여가 장려되도록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개인이나, 교회 지도자 및 여러 사람들이 평화와 비무장, 민주주의의 과정에 대해 논의했다. 예정된 유럽 및 세계 의회에 기여하기 위해 작성된 의회 보고서는 해방 운동의 도움이 된 자산이었다.

감리교의 초국가적 관계는 어떤가? 앞에서 정치적 현실로 인해 연합감리교회의 구조적 분열을 언급한 바 있다. 그래도 관계는 계속됐다. 방문이 계속되었고, 절차가 까다로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유지되었다.  동베를린에서 단체들이 만나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분단된 나라와 교회의 현실속에 익숙해졌었다. 기도조차도 다소 나른한 의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때로는 다른 나라에서 온 형제들이 우리보다 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한 가지 예시로 1989년 3월 29일부터 4월 2일까지 연합감리교회의 여성부는 동독의 포츠담에서 감리교 세계연맹과 여성연합교회의 유럽 지역 세미나를 개최했다. 동독의 감리교 여선교회에게 이러한 국제 행사를 주최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과 모든 자료는 정부 관리에 의해 검토되었지만 그래도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오늘 날까지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온 여성들이 동서독의 독일 자매들에게 물었다. “통일이 될 것을 믿나요?” 두 그룹 모두 부인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매우 현실적이었고 관계 개선이 된것으로도 감사했다.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인원들은 상징과 기념으로 촛불을 받았다. 영국의 한 참가자는 “감사합니다.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촛불을 받습니다. 통일 후에 이 초에 불 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불과 몇 달 후에 촛불이 켜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 그리스도인을 위한 열린 창

 

1989년 여름, 동독의 많은 시민들이 헝가리나 체코를 거쳐 나라를 떠났다. 억압적인 정권에 대한 공개 시위는 매주 숫자가 증가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는 전국의 교회들이 평화기도를 진행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평화기도 운동은 80년대 초에 시작되었던 운동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그리스도인들과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은 기도에 집중했다. “우리는 극복하리라”와 같은 찬송가는 자신감과 희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참으로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공한 장소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만남을 가졌다.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들과 변화만을 위한 정치적 의제에 집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표현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다. 압제적인 독재의 폭력과 위협의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샬롬과 그리스도의 평강과 성령의 사랑이 역사하는 곳이 되었다. 기도 후 많은 도시의 거리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민중운동에 대한 국가의 공포와 폭력적 반응은 커졌지만 시위는 집단 폭력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가 열렸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 정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곧 여행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물었다. “정부는 언제 국경을 여나요?” 대변인은 “이제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즉시 검문소로 갔고 보안 요원들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게이트를 열었다. 갑자기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곧 더 많은 절차가 따랐다. 장벽 붕괴와 통일 사이의 중간 기간에 기독교인들은 신속하게 설치된 "원탁"에 참여했다. 지역에서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평화롭고 정당한 이동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예를 들어 정부와 보안 경찰의 문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여 불의가 폭로되고 피해가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교회에서 활동적이었던 사람들은 그러한 과정을 가장 잘 이끌었다. 교회는 독재정권에서도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장소였다.

연합감리교회의 마틴 랭 목사는 당시 동독의 기독교 교회 협의회 총무로 재직 중이었으며 전국 원탁 회의의 3인 사회자 중 한 명으로 감리교 회의에서의 경험을 통해 엄청난 변화 과정을 촉진했다.

통일은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인내의 결실이었고, 모스크바의 거대한 정치적 변화의 결과였으며, 기도의 응답이었다. 겸손과 감사함으로 교회가 중요한 행위자였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통일 과정에서 교회는 더 이상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동서의 교회는 어떻게 하나의 교회로 재결합할 수 있는지 내부 프로세스에 재빨리 집중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해 관련성을 유지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5. 계속되는 긴장과 분열

 

기쁨과 축하의 시간을 보낸 후 구 동독의 정치 구조, 공공 서비스, 경제 및 사회 생활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서부에서의 삶은 큰 혼란 없이 계속되었다. 동독의 산업은 무너졌다.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고 실업률이 늘었다. 새로 설립된 회사와 정부 직책을 포함한 공무원의 중요한 직책은 서독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인프라를 구축하고 생활 수준을 균등화하는 데 많은 돈이 사용되었지만 동독의 많은 사람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자신을 패배자 또는 서구 경제의 축복에 감사해야 하는 단순한 수령자로 인식했다.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대화를 나눈 동독의 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서독에서 온 동료들은 자신들이 항상 역사의 올바른 편에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역학의 대부분은 아마도 피할 수 없었고 많은 일들이 잘 진행되었다. 오늘날 독일이 하나의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민감하게 서로의 말을 들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감리교 목사인 볼프강 루노프는 1991년 목회자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열린 국경이 자동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오류임이 입증되었다.” 그는 또한 “우리(동, 서독인)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서로에게 훨씬 더 낯설었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이끌려 왔다” 고 말했다. 통일을 향한 과정에서 우리 독일은 서독을 향한 조급함과 무지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통일 33년이 지난 오늘, 동서간 긴장이 다시 고조되는 듯하다. 구 동독 지역인 “신연방주”에서는 새로운 우익 정당인 “독일대한당”이 서독에서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사람들을 그런 이유로 비난했다. 벽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좋든 나쁘든 더 이상 “서쪽”- “동쪽”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만남은 있지만 과거와 현재의 분열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독일에 있는 44,816명의 감리교인 중 약 1/3이 구 동독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중앙총회의 주요 사무실은 남독일연회 회원들이 차지한다. 우리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국경을 넘어 사랑받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임무는 계속된다.

 

6. 배움

 

한국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감히 독일에서의 경험에서 배운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기적을 위한 준비

남한과 동맹국, 북한과 동맹국 사이의 긴장은 독일보다 더 나쁘다. 게다가 분열은 70년 이상 계속되고 있으며, 독일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친척이나 형제자매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실적으로 조속한 통일이나 평화협정 비준까지 기대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가능한 다음 단계와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지?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깊은 균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큰 그림을 보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을 염두

세계화된 세상에서 국가적 갈등이나 지역적 갈등 같은 것은 없다. 독일의 분할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초래한 끔찍한 참화 이후 초강대국들의 결정이었다. 분단은 승전국 4개국의 공식 합의로 끝났다. 한반도의 평화 부재는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남용했기 때문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우리는 이러한 글로벌 이해관계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잊어서는 안된다. 막대한 군비 지출과 제재가 북한 주민의 생계에 미치는 피해와 미군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신매매된 한국 여성들의 고통과 “적”의 악마화의 씨앗이 개인과 사회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봐야 한다. 평화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해 작은 변화라도 기도하고 노력해야한다.

폭력을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저항

동독의 변화를 위한 투쟁에서 기독교인의 큰 공헌은 그들의 강한 확신이었다. “폭력은 없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어라!” 월요기도회가 끝난 후 시위대는 거리 밖에서 무장 세력과 마주하게 될 것을 알고 촛불을 들고 교회를 떠났다. 나는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인간의 투쟁에 다른 예가 있지만 때때로 폭력적인 행동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무장에서 오지 않을 것이며 폭탄은 정의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교회와 에큐메니칼 단체 내에서 그리고 그 이상으로 (국제적인) 파트너가 필요하다.

여러 측면에서 동서독인들은 미래에 대한 관점과 기대가 제한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어려움이 압도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 파트너 국가와의 더 나은 관계에 대한 간청이 짜증나거나 지루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감히 적용한다. "정의와 함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상이 필요하다."

 

평화로운 통일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과 평화의 왕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희망으로 길러지는 여정이자 지속적인 과제이다.

평화를 지위로 묘사한다면 독일에는 평화가 있다. 그러나 동독과 서독 사이의 긴장은 증가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에는 평화조약조차 없다. 평화, 정의, 화해, 통합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정의와 함께 평화를 향한 여정에서 충실한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제안을 받을 것임을 알고 이 여정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

다음은 동독에서 은퇴한 목회자 볼프강 루노프 목사의 말이다. 그는 1991년에 이렇게 썼다.

“우리(기독교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용서 받았습니다.

당신은 인정받았습니다.

당신은 변하였습니다.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회중에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기대를 가지고 경청하고 우리가 받은 것을 제공하는지 여부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스텝은?

현재 북한 기독교인과 조선기독교총연합회와의 직접적인 만남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만남은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향한 여정을 이어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2023년 6월 21일부터 27일까지 최근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진술에서 가능한 다음 단계로 두 가지 주제가 언급된다.

“현재의 대립의 고리를 깨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단계는 임시 휴전 협정을 평화 조약으로 대체함으로써 1950-1953년 한국 전쟁의 종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70년 동안 전쟁이 중단된 것은 비논리적이며 한반도의 현재 현실에 개입하는 데 매우 비건설적인 맥락이다. 더욱이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 협정은 WCC의 지원을 받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북한의 KCF의 오랜 약속이자 목표다.” 그러한 평화 조약을 옹호하고 다양한 정부와 가능한 모든 접촉을 활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 능력 획득을 막으려는 그들의 명시적인 목적에 실패했지만 북한 한국인과의 외교적 협력과 정치적 대화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한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 제재 완화를 주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한다. “그(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베소서 2:14)

 

Bishop Rosemarie Wenner, Geneva Secretary World Methodist Council

Lecture Round Table for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ugust 28-29, 2023

 

Overcoming Divisions and Working for Peace

–  Learnings from an Ongoing Journey in Germany and from Ecumenical Partners

 

Introduction – Personal remarks

November 9, 1989, my husband and I were in vacation on the Islands of Acores. Although we only spoke a few words of the local language, we put the TV on to look at the weather card. What we saw in the news, was unbelievable. People were crossings the checkpoints in Berlin Wall from East to West, everyone seemed to celebrate. The wall was no longer the fortress to divide the country in two separate nation states. What a miracle. What an unexpected change after weeks of uncertainty, tumoils, fear, hopes and many prayers.

At the World Methodist Conference in Seoul in 2006, I took the opportunity to visit the Demilitarized Zone and I saw the border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I felt the pain of the people of Korea, some of it I knew, although the consequences of the division in my home country were not as hard as it still is here. Since than my prayers for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became more intense. Today, I am honored to join hands in the ecumenical efforts to pray and work for reunification and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You asked me to speak about the German history and particularly about the role of the church in the process of unification. Reflections on the unification in Germany

Remarks on the German history

When World War II ended with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Nazi-Germany May 8,1945, the victorious countries USA, United Kingdom, France, and the Soviet Union divided Germany in four sectors. Berlin, the former capitol, was also divided and occupied by the four allied states. Geographically, Berlin was in the Soviet sector. May 23, 1949, three of the sectors were allowed to form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a democratic state which joined the Western systems. October 7, 1949, the Soviet sector became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a socialist state within the Eastern bloc later called Warsaw Pact. When the two states were formed, the allied forces agreed that Berlin would continue to be a divided city, the part under soviet occupation became the capital of the GDR. Travel from any place in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to Berlin and vice versa always meant to transit through the GDR. Other than in Korea, there was never a war between the two German states and relationships between families, churches and civil society were possible. In the 50s and 60s, the GDR became more and more a closed state, protected by the Berlin Wall which was built August 13, 1961, fences at all border lines with death strips, automatic ripples, and a system of spies and pressure towards its own people. And the divided country of Germany was a main battlefield for the cold war between systemic and military blocs. Until today, US nuclear weapons are stationed in Germany. Other than in Korea, there was never a war between the two German states and relationships between families, churches and civil society were always possible. Between the two German nations, relationships improved in the 1970s, when Chancellor Willy Brandt visited the GDR and implemented a political approach called “change through convergence”. In the late 80s, several factors which led to the collapse of the soviet imperium: economic mismanagement, people’s movements demanding freedom, and Mikhail Gorbachev in Moscow allowing for “perestroika” which means political and economic change towards freedom and capitalism. Regarding the GDRonly a few people in East and West Germany dared to dream of a quick and peaceful unification of the two separate states. For Germany, I avoid the word “re-unification”. Nazi Germany covered also parts which today belong to Poland and other countries - and although the German nation became one, we build a new state, not comparable with Germany before World War II.

Contribution of Churches in the GDR towards unification

The GDR regime was atheistic. Followers of Christ were facing certain difficulties and detriments. Yet there was no massive persecution. Church life and ecumenical relationships were possible. Rather big Methodist Churches were built in the 50s, many people went to church at that time. The United Methodist Church had to divide in two Episcopal Areas in 1970, but the two Central Conferences in East and West kept relationships. There were congregational partnerships and from the 70s onwards, groups from West Germany received visas to visit their partner churches in the GDR. Although church life was critically observed by the secret service of the communist regime, congregations and church buildings were not only places to worship, but also places to engage in social justice issues and to dream and strategize a future with less restrictions. Churches became particularly a vessel for the peace movement in opposition to armament. In times, the GDR used 11 % of the spendings for military expenses. With perseverance, creativity and even shrewdness, Christians opposed the militarization. Here is one example for cleverness to publicly critique an oppressive state: Churches needed the permission of the state if they wanted to print books, flyers etc. No permission was needed to print ornaments on fabric. A Christian owned a small factory to produce textile printings. He used the image of a famous statue, a gift that former Soviet president Chrustschow had given to the United Nations in New York in 1959: The statue illustrates Micah 4:3: “They shall beat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hooks: nation shall not lift up a sword against nation, neither shall they learn war any more.” Many people – young and old – put the textile button on their jackets and shirts. The symbol was a public witness for a peaceful future. In addition, many people attended “Peace Prayers” which were organized in many churches. The peace prayer movement started in the early 80s. In the late 80s, these prayers became a place not only for spiritual nourishment, but also for arranging public peaceful demonstrations for change. All of this happened within the GDR. In fact, the unification of the country is a fruit of the labor of those who were oppressed and who suffered most under the division. It is probably fair to say that neither those courageous people in the GDR who dared to risk their life for change nor people who supported the movement in the West really believed in the unification of the country. The aims of the activists were disarmament, better life conditions, an end of the political oppression, true democracy, and the freedom to move. Even after the fall of the wall, when the borders were open and people could meet, many people in the GDR including many Christians did not want a quick unification, but a longer process to discern a future for Germany according to the values that guided the liberation movement. My personal hope was that we together would discern a future that takes up learnings from socialism (without the dictatorial and ideological misuse) and build a truly united state. But capitalism was very attractive. After only one year, the unification took place. Basically, it was an adaptation of the GDR to the Western system with dramatic changes for all in the GDR.

Transnational and international contributions

Have there been contributions from churches from outside the GDR to enable change? Yes. It could be summarized under the heading: Churches cared and kept the bounds, so that walls and weapons could not destroy the unity in Christ. And churches provided possibilities for citizens of the GDR to take part at international Christian discernment and several events and conventions. Particularly a process which emerged at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ssembly in Vancouver 1983 became important for the developments in the GDR and the entire “Eastern Bloc”. At the Vancouver WCC Assembly, the delegation of the GDR suggested to initiate an Ecumenical Council on Peace, according to what Dietrich Bonhoeffer had asked for in 1933. The Assembly took up the suggestion and started a process where churches were encouraged to work on the intersections of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There were three Ecumenical Assemblies in the GDR 1988 and 1989 in Dresden, Magdeburg and Dresden – in preparation for a European Ecumenical Assembly May 1989 and the World Assembly in Seoul 1990. The GDR regime was not supportive to the churches, nor did it care for the topics justice, peace or creation care. But it wanted to be recognized as an international partner by international bodies like the WCC. Therefore, the churches in the GDR were allowed to organize three national conventions in 1988 and 1989, which became a platform to discuss a move towards change. The JPIC Assemblies were structured as such that it was an open process where all were encouraged to contribute. Individuals, church leaders and grass rout initiatives focusing f.e. on peace, disarmament and democracy shaped the process. The Assembly reports, written as a contribution to the upcoming European and global assemblies, were an asset for the liberation movement.

What about Methodist transnational relationships? I mentioned earlier the structural divide of United Methodist Church because of the political reality. Relationships continued though. There were visits, the process was demanding, but it worked. Groups met in East Berlin; financial support was made available. Nevertheless, we all got accustomed to the realities in a divided country and church. Even prayers became a somewhat languid ritual. Sometimes, siblings from other countries were more hopeful than we that change might happen. Let me share one example: March 29 to April 2, 1989, the women’s division of the UMC managed to organize the European Area Seminar of the World Federation of Methodist and United Church Women in Potsdam, which is in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It meant a lot to the Methodist Women in East Germany that they were allowed to host such an international event. Of course it was not easy. The program and all material was checked by government officials. It was a blessed time though. Until today I hear stories of the seminar. Women from other European countries asked the German sisters from East and West of the wall: Do you believe in re-unification? Both groups denied. All were quite realistic at that time – and grateful for some improvements in the relationships. At one of worship services, every participant received a candle as a symbol and souvenir. One participant from England said: “Thank you. I take the candle as a reminder to pray for unification. And I will lighten it after it happened.” Nobody what have thought that the candle would be lightened only a few months later.

An open window for Christians

Summer 1989, many citizens of the GDR left the country via Hungary or Czech Republic. Public demonstrations against the oppressive regime grew in numbers week by week. Every Monday, at 5 pm, churches around the country were open for peace prayers. This was not new. The peace prayer movement started in the early 80s. Now, more and more people came. Christians and those who hoped for chance centered themselves in prayer. Hymns like “We shall overcome” helped to gain confidence and hope. Churches were truly sacred places open to anyone. Hundreds met and used the space offered by Christians. There were tensions between those who focused on prayer and others who focused on their political agenda for transformation only. Yet the power of the gospel as it is expressed in Jesus’ sermon on the mount was experienced. In a time of violence and threats of an oppressive dictatorship, churches became a place where God’s shalom, Christ’s peace and the love of the Holy Spirit were at work. The prayers were followed by demonstrations in the streets of many cities. Fear and violent reactions from the state towards the peoples movement increased, but the demonstrations did not end in mass violence. And the fact that November 1989 the checkpoints in the Berlin wall were opened, was completely unexpected. It kind of happened incidentally. A spokesperson of the Government said in a press conference that travel would become easier soon. Someone asked: When does the government open the borders? The spokesperson said: “I believe now!” People went immediately to the checkpoints and those in charge for security decided to avoid chaos and opened the gates. Free movement was possible, all of a sudden. More steps had to follow soon. In the interim period between the fall of the wall and the unification, Christians engaged in the quickly installed “Round Tables”. From local to national level, those who worked for change discussed how to manage a peaceful and just move. It was important, f.e., to avoid that documents of the government and the security police were destroyed, so that injustice could be disclosed, and harm been done was not forgotten. Those who had been active in churches knew best to lead such a process; churches had been places of democratic decisions even in the dictatorship. Rev Martin Lange from the United Methodist Church, at that time serving as General Secretary of the Christian Council of Churches in the GDR, was one of three moderators of the national Round Table and helped with his experiences in Methodist conferences to facilitate the tremendous change process.

The unification was the fruit of many people’s labor and perseverance, it was the result of a huge political change in Moscow, and it was an answer to prayers – an unexpected and overwhelming answer though. With humility and gratitude one can testify that the church was an important actor. In the process of unification after 1990, the church was no longer such an important place to be. And we, the churches in East and West, focused quickly on our internal processes how to reunite as one church. We probably missed opportunities to stay relevant for our country and the world.

Tensions and divisions continue

After a time of joy and celebration, the hard work to organize political structures, civil services, economy, and social life in the former GDR became very challenging, whereas life in the West continued without big disruptions. The industry in East Germany collapsed; many companies were closed. Unemployment rate was high. Important positions in newly built companies and in the civil service including governmental positions were given to people from West Germany. Although much money was spent to build up the infrastructure and to equalize the standard of living, many people from the GDR felt badly treated. They quickly saw themselves as losers and/or mere recipients who had to be grateful for blessings from the Western economy. A pastor from East Germany with whom I chatted in preparation for this lecture, said: “I – and many others in East Germany- constantly asked myself: What could we have done better? Colleagues from the West seemed to be convinced that they always were on the right side of history.”

Many of these dynamics were probably not avoidable and many things went very well. There is one democratic German state today, which is a blessing. But we could have done better, if we would have listened to one another with more sensitivity. We did not realize that change takes time. The Methodist pastor Wolfgang Ruhnow said at a pastors meeting in 1991: “It proved to be an error that open borders would automatically lead to open minds.” He also said: “We (the German people from West and East) were far stranger to one another than we suspected, and we are led by different interests”. In the process towards unification, we in Germany missed opportunities because of our impatience and – for the West – of our ignorance. Today, 33 years after the unification, tensions between West and East seem to increase once more. In the “new federal states”, as we call the area of the former German Democratic Republic, a new right-wing party “Alternative für Deutschland” gains more attraction then in the Western part. People in the West blame their fellow Germans in the East for that. The wall is still in place in many people’s minds. In the churches, “West”-“East” questions are no longer discussed, for good or bad. We have places of encounters, but we rarely talk about the former and current divisions. About one third of the 44.816 Methodists in Germany live in the region of the former GDR. But with few exceptions, the main offices in the Central Conference are taken by members from the South Germany Annual Conference. We are one country, we are one church, yet the task to cross borders and to build a beloved and just community continues. 

Learnings

It is impossible for me to tell you in Korea how to do the hard work of peace building. I dare, however, to share some learnings from my experience in Germany.

Preparations for miracles

The tensions between South Korea and allies and North Korea and allies are worse than it was in Germany. In addition, the divide continues for more than 70 years and there are only very few possibilities for people to meet relatives and/or siblings in Christ, which was possible in Germany. Realistically, there is no reason to expect re-unification or even the ratification of a peace treaty soon. Nevertheless, history proves that unexpected change can happen. It is wise to think of possible next steps and scenarios if there is a miracle. What would be of help for the most vulnerable? How would it be possible to overcome not only the economic challenges, but the deep fractures?

Look at the big picture and be mindful of the day-to-day experience of the most vulnerable

In our globalized world, there is nothing as such as a national or local conflict. The German divide was a decision of super-powers after the terrible misery caused by Germany in World War II. The division ended by a formal agreement of the four victorious countries. The lack of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is a conflict which is used and misused by super-powers for their own interest and purposes. We who wish to become peacemakers must face these global dynamics. AND we must not forget the impact on the daily lives of ordinary people. See the harm that the huge military expenses and the sanctions cause on the livelihoods of North Koreans. See the pain of women in South Korea trafficked to “satisfy” US soldiers. See how the seed of demonization of “the enemy” bears fruits in individuals and in the societies. Pray and work for changes, perhaps small ones, to pave the way to peace.

Withstand the temptation to justify violence as a means to work for change

The big contribution of Christians in the struggle for change in the GDR was their strong conviction: “No violence! Beat swords into plowshares!” After the Monday Prayers, demonstrators left the churches with candles, knowing that they would face armed forces outside in the streets. I know there are other examples in human fights for more just societies. Sometimes violent acts were unavoidable. But true peace will not arise from armament and bombs will not bring justice.

We need (international) partners, within Christian churches and ecumenical bodies and beyond

In many aspects Germans in East and West had limited perspectives and even limited expectations for the future. For some, pain and difficulties were overwhelming. For others, the plea for better relationships with the communist partner country was either annoying or boring. There is an African saying: “It needs a village to raise a child”. I dare to adopt it: “It needs a world to work for peace with justice”.

Peaceful unification is never “done”, it is a journey, an ongoing task, nourished by our longing for justice and our hope in Christ, the Prince of Peace

There is peace in Germany if one describes peace as a status. Yet the tensions between East and West are still there, if not increasing. There is not even a Peace Treaty in Korea. Wherever we are in our efforts for peace, justice, reconciliation, and unity, we need to do the next faithful step on a journey towards peace with justice. As followers of Christ, we are called to be leaders in this journey, knowing that by God’s grace, we will receive what the offer.

Here is again a quote of Rev Wolfgang Ruhnow, a retired pastor from East Germany. He wrote 1991:

“We (Christians) are told:

You are forgiven.

You may receive.

You can be transformed.

You are needed.

You are not alone.

You are on your way – not at the destination.

In all our congregations this can be experienced – the crucial question is though whether we listen with expectations and give off what we receive.”

And finally: WHAT NEXT?

Currently, possibilities for direct encounters with Christians in North Korea and the Korean Christian Federation seem nearly impossible. These encounters are crucial for keeping the journey towards a peaceful future on the Korean Peninsula alive.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n its recent Central Committee meeting June 21-27,2023 issued a statement on the 7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Armistice Agreement. In this statement, two topics are mentioned as possible next steps:
“To help break this current cycle of confrontation, we believe that an important step would be to formally acknowledge the end of the Korean War 1950-1953 by replacing the temporary Armistice Agreement with a peace treaty. Seventy years of suspended state of war is illogical, and a deeply unconstructive context for engaging with current realities on the Korean Peninsula. Moreover, a peace treaty to replace the Armistice Agreement is a longstanding commitment and objective of the South 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as well as of the KCF in North Korea, supported by the WCC.” Let us advocate for such a peace treaty and use all possible contacts to our various governments.

Secondly, we should advocate “for relaxation of maximum pressure sanctions on North Korea, which have failed in their stated purpose of preventing North Korea from acquiring nuclear weapon capabilities but which present major obstacles to diaconal cooperation with the North Korean people, as well as to political dialogue”.

Most of all, let us continue to pray without ceasing, as we confess: “For he (Christ) is our peace; in his flesh he has made both groups into one and has broken down the dividing wall, that is, the hostility between us.” (Ephesians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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