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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산들바람처럼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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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8월 25일 (금) 01:16:34 [조회수 : 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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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마음 둘 곳 없음이다. 의지적이든 비의지적이든 많은 이들과 접촉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마음의 헛헛함은 쉽게 스러지지 않는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을 서성거리기 일쑤이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저곳을 꿈꾸고, 이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는 피곤함은 온전히 현재에 머물지 못함에서 비롯된다.
 
끊임없는 소음 속에 머무는 동안 우리 마음은 점차 둔감해진다.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광장이나 일터 혹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이 함부로 배설하는 욕설과 비난에 노출된 영혼은 작은 자극에도 예민해질 때가 많다. 정신의 여백은 사라지고 회복력 또한 약화된 채 살아간다. 모두가 지쳐있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심정에 공감될 때가 많다. 어디 무거운 짐을 부려놓듯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없어 삶이 힘겹다.

떠남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발생한다. 휴가를 뜻하는 단어 vacation이나 vacance는 ‘비우다’라는 뜻의 라틴어 ‘vaco’에서 나온 말이다. 휴가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 본질이라는 말이다. 정신과 감각을 고요히 하고, 세상일도 잠시 단절하고, 열망하던 일도 내려놓을 때 보이는 것이 있다. 휴가는 현재를 심화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설악산을 노래하다가 하늘로 돌아간 시인 이성선은 ‘다리’라는 시에서 어느 날 우연히 보았음직한 광경을 담담하게 기록했다.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넌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리를 건너던 그는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먼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때의 바라봄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유현한 세계 혹은 맑음의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넌다. 그는 뭐가 그리 바쁜지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통과하여 어느새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무심히 볼 수도 있는 광경이지만 시인의 마음에는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가 안쓰러웠던 것일까? 잠시 숨을 고른 시인은 쓸쓸하게 말한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오래 전 보트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를 둘러본 적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저마다 우비를 입고 그 장대한 폭포를 경험할 생각에 부풀어 들떠 있었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물보라와 폭포에 걸린 무지개를 보며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보트가 폭포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물벼락을 맞곤 했지만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유리 칸막이 안에서 배의 상황을 모니터하는 스태프가 눈에 들어왔다. 부루퉁한 표정의 그는 책을 읽으며 간간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사뭇 차가웠다. 그에게 그곳은 어쩌면 권태롭기 이를 데 없는 일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분주함은 우리에게서 우정의 가능성을 앗아간다. 친구의 쓸쓸함을 직감하면서도 그의 곁에 더 머물러 줄 생각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그의 우울이 내게 옮겨올까 두려워서.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은 흐르는 모래처럼 우리를 자꾸 빨아들인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있었다. 또래 속에 섞여들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학교는 두려운 곳이 되었고, 결국 그 아이는 전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한 첫날, 매사가 조심스럽고 낯설었다. 그런데 점심 시간에 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같이 밥 먹을래?” 그 한 마디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 그 아이를 깊은 외로움으로부터 건져냈다. 

지금 외로운 이에게 다가가 가만가만 손을 내미는 사람,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이 곁에 가만히 다가서서 그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은 이 덧거친 세상에서 평화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사람이다. 자기로 가득 찬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기를 비워 맑아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더운 여름, 산들바람처럼 지친 누군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월간 에세이 2023/07월 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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