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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盧忍)선교사의 만주 봉천 무순 활동 자료공개!(1936년)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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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8월 06일 (일) 23:03:40
최종편집 : 2023년 08월 06일 (일) 23:12:18 [조회수 :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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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盧忍)선교사의 만주 봉천 무순 활동 자료공개!(1936년)

 

노종해(CM리서치)

 

로인 선교사(盧忍)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원문과 정리하여 공개합니다!(조선일보, 소화11년, 1936.4.25.자)

로인(盧忍, 노인:1905~1951) 선교사는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파송(1932년) 만주 봉천 선교사입니다.(*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임)

   
▲ 24세 때(1929) 로인(盧忍) 선교사(1905-1951)

 

   
 

朝鮮日報(1936年4月25日)

조선일보 보도기사(1936년)를 오늘날 표기에 맞추어 정리하였습니다. 글짜는 당시 표기를 원칙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정리:노종해 )

《무순량농장착공, 삼백작인도 취농
무운경찰의 조정이 성립되여, 조선인반대도 진압

[撫順] 무순현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元帥林驛) 앞 고려령자촌(高麗營子村) 일대의 고려농장과 남잡목역(南雜木驛) 앞 남만농장은 작년부터 부근 일대의 지주들에게 수천 개간의 토지(土地) 승락을 도합 오백 일경을 받고 무수현 에서 실로 제일가는 모범농장으로 만들 작정으로 홍파(洪波) 최원식(崔元植) 씨 등의 노력 아래 소작인 삼백 명을 이주시키고 방강(防江) 수구개굴(水溝開掘) 등의 공사를 시작하여 일반의 큰 기대를 갖게 하는바, 작년의 수해로 수천 원의 손해를 보고 삼백 명에 가까운 소작인은 폐농을 당하고 유리하게 되어 비참한 광경을 이루어 금년도의 북구공사가 어떻게 될른지는 매우 주목되더니, 이 농장의 사정을 들은 동양성결교 무순교회(東洋聖潔敎 撫順敎會) 전도사(傳道師)인 로인(盧忍) 씨가 자진 출자하여 이를 인계하여 복구공사에 착수하기로 하고, 고려농장 책임은 무순협성정미소주(撫順協成精米所主) 리태성(李泰成) 씨가 이를 인계하여, 실농장하였던 삼백명의 소작인도 힘을 얻어 복구공사에 전력하고 있어 무순현 하 주재 동포의 자자한 칭송을 받고 있었는데, 돌연 동 농장 일대 지주들의 계약개정(契約改訂) 및 수전개발반대(水田開發反對)의 봉화를 들여 진행되든 공사는 중단되고, 사건은 점점 악화되어 필경에는 봉천총령사관(奉天總領事館)과 무순현청(撫循縣廳)에까지 호소한 바 있었으나, 시국의 변동 등 기타의 관계로 거듭 연기되어 농경기(農耕期)를 앞둔 삼백명의 소작인은 또다시 실농의 쓰라림을 당하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불안에 싸여 있던 중, 금번 무순 경찰서와 만주국 무순현청의 극력 주선으로 지난 이십일 당지 현청의 상전참사관(上田參事官) 일행과 경찰서의 고등계 형사 오응룡(高等係 刑事 吳應龍)씨가 농장현장에 출장하여 민주인 지주 백여명과 조선인 동포소작인 삼백여 명을 소집하여 놓고 일장 설명을 하고 량방대표에게 권구 조정을 하여 그동안 방강, 수구개굴 등의 일체 공사를 금지하였던 것을 즉시로 허가하는 동시 량방지주와 소작인 간에 원만한 타협이 성립되어 우수에 싸였던 삼백명의 소작인은 환히의 곡광이를 들어 복구공사의 완성을 촉진하고 있다.》-朝鮮日報 昭和 十一年(1936年)4月25日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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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朝鮮日報 昭和 十一年4月25日

   
 

[撫順] 무순현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元帥林驛) 압 고려령자촌(高麗營子村) 일대의 고려농장과 남잡목역(南雜木驛) 압 남만농장은 작년부터 부근일대의 지주들에게 수천개간의 토지(토지승락을 도합오백일경을 밧고 무수현 에서 실로 제일가는 모범농장으로 만들작정으로 홍파(洪波) 최원식(崔元植) 씨등의 노력하에 소작인 삼백명을 이주식히고 방강(防江) 수구개굴(水溝開掘) 등의 공사를 시작하야 일반의 큰 긔대를 갓게하든바 작년의 수해로 수천원의 손해를 보고 삼백명에 갓가운 소작인은 폐농을 당하고 류리하게 되어 비참한 광경을 이루어 금년도의 북구공사가 엇더케 될른지는 매우 주목되더니 이농장의 사정을 드른 동양성결교 무순교회(東洋聖潔敎 撫順敎會) 전도사(傳道師)인 로인(盧忍)씨가 자진출자하야 이를인계하여 복구공사에 착수하기로하고 고려농장 책임은 무순협성정미소주(撫順協成精米所主) 리태성(李泰成) 씨가 이를인곟여 실농장하엿던 삼백명의 소작인도 힘을 어더 복구공사에 전력하고잇서 무순현하재주동포의 자자한 칭송을 밧고 잇섯는데 돌연동농장일대지주들의 계약개정(契約改訂) 급 수전개발반대(水田開發反對)의 봉화를 드려 진행되든 공사는 중단되고 사건은 점점 악화되여 필경에는 봉천총령사관(奉天總領事館)과 무순현청(撫循縣廳)에까지 호소한바 잇섯스나 시국의 변동등 긔타의 관계로 거듭연기되여 농경기(農耕期)를 압둔 삼백명의 소작인은 또다시 실농의 쓰라림을 당하지나 아니하는가 하야 불안에 싸혀 잇든 중 금번 무순경찰서와 만주국무순현청의 극력주선으로 지난 이십일 당지 현청의 상전참사관(上田參事官) 일행과 경찰서의 고등계형사(高等係刑事 吳應龍)씨가 농장현장에 출장하야 민주인 지주 백여명과 조선인동포소작인 삼백여명을 소집하여노코 일장설명을하고 량방대표에게 권구조정을하야 그동안방강, 수구개굴 등의 일체공사를 금지하엿든 것을 즉시로 허가하는 동시 량방지주와 소작인 간에 원만한 타협이 성립 되어 우수에 싸엿든 삼백명의 소작인은 환히의 곡광이를 들어 복구공사의 완성을 촉진하고 잇다.-朝鮮日報 昭和 十一年(1936年)4月25日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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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인 선교사"는 누구인가?
-만주선교사 파송(1932), 사역활동-

필자는 '로인(盧忍)' 선교사의 '손자'로 조부님에 대한 얘기를 아버님(노병례)으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어왔으나, 정확한 자료를 접하지 못하여왔다.

그러나 최근 '활천(活泉)' 지의 “만주봉천 활동 소식” 보도를 접하고, 최근에는 조선일보 기사(1936년)를 찾아보고 문서정리하여 공개하게 되었다.

"활천"(1932년10월호)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이를 문서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래는 “노인”(盧忍) 선교사에 대한 장남 노병례(노종해 부친)의 기록이다.

노문진(盧文珍, 1906-1951)-기독교 입신 후 개명: 노인(盧忍)

    “노문진(1906년 생)은 20세 시 일본 동경 자유주의 서양 신학문 배우러 갔다가, 갑자기 걸리신 병 1926년 경, 와세다(早稻田) 성결교회( 聖潔敎會에)서 구원 치유 받으시고 고향집에 오셨을 때, 간증전도하시니 곧 할머님과 아내 회개 입신, 곡식 저장의 고방(庫房)간과 부엌 등에 섬겨 모시던 귀신 당직개(싸리함) 다 부셔 태워버리고 그 때부터 2키로나 먼 교회에 눈이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다니신 독실한 신앙심”(참고-盧炳禮: 피와 눈물의 “평화의 뿌리”, 九旬記念特集, 서울, 삼일인쇄 2013.p394)

   
▲ 동양선교회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神學院, 1932년3월)

 

    또한 “나(盧炳禮)의 아버지는 26세 시 일본 동경(東京)에서 구원의 체험으로 귀국 당시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神學院)에 입학 졸업 직 전 1932년 만주 봉천(奉天=심양) 북능(北陵)이라는 곳과 무순(無順) 등지에서 선교사로 4-5년 동안 열심히 개척전도하시다....선교사에서 생겨난 위장병, 늘 아프시던 것 더욱 심한 통증으로 피난 못가신다고...”(필자 소유 미발간 문서)

 

   
▲ 동경 와세다(早稻田) 성결교회 시절(1929)-앞줄 우측이 노문진(노인)


<기독교백과사전, 3권>(교문사)에는 "노인"(盧忍)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 "노인"(기독교대백과사전 3권. p624)

"노인(盧忍), 1905-? 성결교 목사, 1930년 동양선교회 서울신학원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하였고, 그해 7월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만주 봉천성 북능(北陵), 포하, 구연둔, 북간도 옹성자, 무순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참고문헌 성결총회 30, 34."(기독교대백과사전 3권,교문사 발행)
 


    정리하면, 조부 노인(노문진,1905-1951) 선교사는 동경으로 유학 가셨고, 20세 때인 1926년에 “와세다 성결교회”에서 신앙체험으로 기독교로 입신하셨으며, 1929년 초 귀국하여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 하시였다.
 
    1932년 초 성서학원 졸업 직 전 후, 동양선교회로 부터 “만주선교사”로 파송 받아, 당시, 남만주 지역으로 선교지 확장되던 때 동년 7월 12일, “봉천포하”에 도착하여, 즉시 북치고 소리 높여 찬송하며 “노방전도”에 착수하였고, 북능과 포하에 교회개척 설립활동에 임하였다. 과로로 질병이 악화 되어 사역을 마치고, 일제말 1940년 초 고향(평남 평원)으로 귀향하였고, 투병 중 해방과 6.25사변을 격는 중, 결국 1.4후퇴 때 피난하지 못하고, 1951년 별세하시었다. 부친(노병례)에 의하면, "동향 이웃 지인은 노인 목사님은 피난길에 서 되돌아 오셔서, 곧 체포 되어 총살 당하셨다‘고 증언하여 별세함을 알았다고” 증언하셨다.

    필자는 손자 노종해(盧宗海)로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부모와 함께 1.4후퇴 때  남하하였다. 국내목회 13년 중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헌신하여 파송(기감, 1985년4월4일) 받았으며, 선교사로 33년 동안(1985-2018) 사역 후 정년은퇴하고 국내 체류 중이다.

앞으로 더욱 심층적으로 “세계 한인선교사님들과 사역활동”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조부님의 선교사 헌신의 삶도 기억하면서, “달려 갈길 다 달려가도록” 세계선교사명 감당할 것을 결단하고 있다.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rch)

 

   
▲ 푸순현(무순현)
   
▲ 무순(푸순) 위치-심양.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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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3-08-08 13:08:58
저희 집안과는 반대네요
祖父는 일제시대 면서기(부면장)였고, 外祖父는 모 지방 경찰서장(조선인 중 지방경찰서장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제에 대한 충성 못지않게 그의 말 한마디에도 따르는 조선인의 추앙이 있어야만 한다. 즉 일제시대에 명망이 높았던 전국적인 인사가 建準 呂運亨이라면 외조부는 지방에서의 여운형 급이었다고 비교하면 딱 맞는다. 백범 김구가 귀국하여 통영에 왔을 때 외조부를 만나기도 했다.)

8.15 해방이 되자 완전 백수가 된 祖父는 멸치잡이로 생계를 유지했다. 손자인 내가 군에 입대하려고 하니까 군대 가기 싫다면 자신의 빽으로 빼줄 수 있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면내에 영향력이 있다고 하면서... 나는 조부의 제안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군에 입대했다.

外祖父의 경우 해방이 되었어도 한동안 잠잠했는데 한 2개월 쯤 지나자 군중이 몽둥이 등을 들고 외조부집으로 들이닥쳤다. “일제 부역자 타토!”를 외치면서... 이때 外祖母가 나섰다. 내 시체를 밟기 전에는 절대 우리 영감에게 손댈 수 없다고 막아섰다. 외조모는 평소 가난한 이웃에게 쌀이며, 고기를 틈틈이 나누어주었고 동네 거지들에게도 밥을 먹였으며 학비가 없는 학생에게 남몰래 학비도 보태주는 등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일제 타도를 외치는 군중 속에서 외조모의 보살핌을 받은 사람이 수두룩했음은 물론이다. 군중 속에서 몇몇이 “이집은 악질이 아니다! 다른 집으로 가자!” 이렇게 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때 외조부는 방안에서 일본도를 꺼내 할복자살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외조부는 완전 무위도식하는 한량으로 지내고 외조모가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김치를 팔아 집안의 생계를 꾸렸다. 나는 외조모의 김치 맛 지금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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