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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본 회퍼, 임기윤 목사 43주기 기억예배 드려518의 첫 목회자 순교자 임기윤 목사 기려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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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7월 26일 (수) 23:40:23
최종편집 : 2023년 08월 02일 (수) 07:40:48 [조회수 :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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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윤 목사 43주기 기억예배에서 이소선 합창단이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지휘자는 임정현 선생은 임기윤 목사의 차남이다.

7월 26일(수) 오후 7시 30분 종로5가의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임기윤 목사의 43주기 기억예배가 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 모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기독교민주화운동,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순교자 임기윤 목사 국가배상 추진위원회, NCC인권센터가 주최한 이날 기억예배에는 임기윤 목사의 유가족과 임목사의 지인들, 주최측 회원, 그리고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 선생,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선생, 이소선합창단원 등 100여명이 참석해 그를 추모했다.

기억예배는 송병구 목사(고난 이사장)의 사회로 황인근 목사의 기도(NCCK인권센터 소장), 박철 목사(감리회 원로목사, 김의기열사 유가족)의 설교, 임정현 선생(이소선합창단 지휘자)의 유가족 인사, 이소선 합창단의 추모의 노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원영 상임이사, 재야인사 박상도 선생(부산YMCA 전 이사장), 김영주 목사(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의 추도사, 신경하 감독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 사회 / 송병구 목사(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이사장)
   
▲ 기도 / 황인근 목사(NCCK인권센터 소장)
   
▲ 설교/ 박철 목사(감리회 원로목사, 김의기열사 유가족)

 

박철 목사는 <임기윤 목사를 역사 앞으로 호명하며>를 제목으로 설교를 전하며 “임 목사님은 전두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며 정의의 편에 섰던 하느님의 충실한 예언자였다. 임기윤 목사님은 얼마든지 죽음의 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민주화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던졌다. 한 알의 밀알처럼 군부독재에 항거하며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이 땅의 민주제단에 바치셨다.”고 회고했다.

고 임기윤(1922~1980) 목사의 고향은 평남 용강으로 해방 전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운동을 하다 해방후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1957년 목사가 된 이후 줄곧 부산제일교회를 담임하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투쟁했다. 유신 치하인 1975년 범교단적으로 40~50명의 목회자가 조직한 '사회정의구현 부산기독인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고 당시 함석헌 선생과 문동환 목사 등의 초청강연회를 여는 등 반유신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임기윤 목사는 설교시간에 전두환의 5.18만행을 증언하고 신군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80년 7월 19일 국군보안사령부 부산분실에 영장없이 참고인으로 불려갔고 조사를 받던 중 사흘 만에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 임 목사는 이미 무의식 상태였고, 5일 뒤인 26일 부산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59세였다.

보안사 측에서는 가혹행위는 전혀 없었고 고혈압으로 쓰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평소 임 목사는 혈압이 높지 않았으며 1979년 신규 생명보험 가입을 위한 건강진단 때에도 이상이 없었다면서 병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부인 최광명 사모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임기윤 목사의 뒷머리 왼쪽이 3센치 가량 찢어져 있고 그곳에 피가 흘러 말라붙어 있었다고 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임기윤 목사는 보안사 내에서의 폭행, 고문 등 가혹행의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2000년 9월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임기윤 목사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해 사망한 경우로 인정된다”며 그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임기윤 목사를 열사로 등재했다.

 

   
▲ 임기윤 목사(1922-1980)

임기윤 목사 사망 며칠 후인 8월 6일.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 한경직을 비롯한 교단의 총회장급 목사 23명이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로 모였다. 이 조찬기도회를 방송사들이 현장 생중계했다. 참석한 목사들은 전두환 앞에서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최선봉에 섰던 “여호수아 같은 인물이 되게 해달라”고 입을 모았다.

이 기도에 힘입었는지 전두환은 8월 15일 최규하의 하야를 받아내고 29일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접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들이 전두환의 청와대 입성에 레드카펫을 깔아준 셈이다. 신군부의 정권찬탈에 일조한 23명의 목회자들은 1993년 반란방조죄로 고발당했고 이들 중 2명만이 1996년 참회성명을 발표했다.

 

   
▲ 임기윤 목사(왼쪽)는 1958년 부산제일감리교회에 부임해 부산대병원에서 숨진 1980년 7월26일까지 담임목사를 맡았다. 순교자 임기윤 국가배상 추진위원회 제공

임기윤 목사는 518로 인해 희생당한 유일한 목회자다. 1980년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의 주도로 진행된 5·18 학살이 일어난 광주 밖 네 번째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암울한 시절 임기윤 목사의 희생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박철 목사는 “독일에 본 회퍼 목사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임기윤 목사님이 계신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희생된 많은 분들이 잊혀지고, 아직 그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임기윤 목사님 또한 보다 널리 기억되었어야 마땅하다.”며 “ 정성껏 추모하지 못하고 충분히 기억하지 못한 우리 모두는 임기윤 목사님께 빚진 자들”이라고 통열히 반성했다.

박철 목사의 지적대로 임기윤 목사는 감리회에서조차 온전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자료에 의하면 1982년 부산제일감리교회에서 3주기 추모예배를 드렸고 1987년 7주기에 사선협, 감청, 한목선 등이 추모예배를 드리고 추모 성명을 발표했으며, 1988년 7월 동대문교회에서 감리교단이 주최한 추모예배와 유고설교집 출판기념회를 가지며 8주기 추모성명을 발표했다. 1991년 11주기 추모예배기록도 있다. 이들 추모예배 순서지에서 공통적으로 임기윤 목사를 ‘순교자’로 지칭하고 있다. ‘고난받는이들과함께’에서 1990년과 1991년에 정기간행물을 통해 10주기와 11주기를 특집으로 다루는 등 나름 임기윤 목사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이후 30여 년간 추모사업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11일 전국 시민사회단체 대표·원로·목사 등 93명이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순교자 임기윤 목사 국가배상 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김영주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송기인 신부)’를 발족하면서 재조명됐다.

박철 목사는 “오늘 우리는 불의한 정권에 의해 죽음을 당하신 순교자 임기윤 목사님을 역사 앞에 다시 그의 이름을 호명(呼名)하고, 그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면서 “앞으로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임기윤 목사님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선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못다 이룬 뜻을 이 땅에서 보다 온전히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임기윤 목사가 설교한 한 구절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때에는 죽고 망하는 것 같지만, 역사는 그를 살려냅니다”를 참석자들과 합창했다.

 

   
▲ 임정현 선생(이소선합창단 지휘자)의 유가족 인사

 

유가족인 테너 임정현 선생(이소선합창단 지휘자)은 참석자들에게 인사하며 “보안사에서 아버지께 지병이 있다고 했다. 주변에 장기려 박사님(의사)도 친하고 어머니도 간호사셨고 집에서 가족들이 약봉지 한 봉을 못 봤는데 지병 있다는 게 말이 되냐”며 의문사를 제기하고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하다. 저는 자식으로서 열심히 사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인사했다. 이어 이소선 합창단이 부른 ‘군중의 함성’과 ‘상록수’를 지휘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기리며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창단된 이소선합창단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길 위에서 노래한다.

 

   
▲ 추도사/ 재야인사 박상도 선생(부산YMCA 전 이사장)

추도사가 이어졌다. 재야원로 박상도 선생(부산YMCA 전 이사장)은 유신시절 임기윤 목사와 함께 재야에서 투쟁하던 일화를 들려주며 “임기윤 목사님은 정의기독자회의를 만들고 76년 초에 기독교 인권 부산 기독교 인권선교협의회를 만들어 부산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주신 어른이셨다.”고 추모했다.

이어서 전두환 일파가 무력으로 518을 일으키고 자기 정권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재야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했을 때 임기윤 목사도 부산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호랑이 같던 임기윤 목사의 성격상 보안사 요원들의 취조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격렬하게 싸웠을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외부적 충격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도 선생(부산YMCA 전 이사장) 추도사

먼저 깊은 회개라고 할까요 회개를 하면서 사과를 먼저 드리고 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우리 감리교회 목사님들 혹은 5.18 재단서 실무를 맡아서 수고하시는 우리 김종세 선생님의 상당한 노력에 의해서 오늘 새롭게 우리 임기윤 목사님을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우선 설교 때 박철 목사님께서 말씀 많이 하셨지만 우선 조금 임기윤 목사님의 생활면과 그 시대 상황을 조금 먼저 아시는 것이 참 중요할 것 같습니다.
71년 선거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와 박정희 씨가 붙었을 때 아주 근소한 차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인해서 박정희가 상당히 권력을 유지하는 데 위기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래서 72년도에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그러고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73년 8월에 일본에 망명해 계시는 김대중 씨를 납치해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74년도에 민주회복국민회의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민주화를 열망하는 어르신들, 선각자들, 지도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분위기가 이제 그렇게 돌아가서 민주화의 열기가 서서히 끌어오르는 그 시점에 부산에서는 부산에 있는 사람들이 서울과 발을 맞춰서 민주화 운동을 야무지게 해야 되겠다는 어떤 그런 분위기들이 솟아나는 가운데 임기윤 목사님을 주축을 해서 임기윤 목사님, 최승모 목사님, 캐톨릭의 송기인 신부님, 김광윤 변호사님 유일하게 어르신들 그 네 분이서 주축이 돼서 정의기독자회의를 만들고 76년 초에 기독교 인권 부산 기독교 인권선교협의회를 만들면서 임기윤 목사님이 회장을 맡으시고 최성봉 목사님이 부회장 캐톨릭의 송기인 신부님이 부회장을 맡으셔서 부산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연세가 임기윤 목사님께서 그때 나이가 55, 56세로 가장 완성하셨을 때고 그다음 최승욱 목사님이 한 10년 아래로서 45세, 김광일 변호사가 41~42세 송진 신부님 신부님이 35~6살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임기윤 목사님이 부산지역 민주화진영의 제일 어르신으로서 역할을 하시고 방패막이 노릇을 하셨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을 제가 알게 되기는 1974년도에 장준하 선생님이 깃대를 흔들어서 추진하던 유신헌법 개헌 청원 운동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때 임기윤 목사님이 어느 날 저를 불러 그 청원 서명 용지를 저에게 주시면서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걸 받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한 뭉터기를 받고 또 다른 장준하 씨의 부산지역의 심부름 하시는 박재우 의원이라고 7대 국회의원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느 사람의 소개로 그거를 저한테 가져와서 제가 74년도에 유신헌법 반대 청원하는 개헌 서명운동을 받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대한민국 전체의 민주화 운동을 대변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성명서라든가 유인물이 다 부산으로 내려오는데 세 가지 루트를 통해서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이제 기독교 장로회의 안병무라든가 서남동이라든가 김관석이라든가 종로 5가를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유인물은 기장 목사님인 최승목 목사님에게 주로 왔고, 감리교 쪽이나 김대중의 동교동에서 만들어진 유인물들은 임기윤 목사님을 통해서 저희들에게 전달됐습니다. 캐톨릭의 정의구현 사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내려오는 문서는 송신부님을 통해 전달됐습니다. 그러면 저는 주로 그거를 여기에 있는 김종세라든가 그 당시에 학원에서 학생운동 하시던 사람들과 학생들에게 가져다 나눠줘서 부산 전역에 퍼뜨리는 그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시대에 소위 박정희와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은 거의 90%가 우리 개신교회 선각자들, 개톨릭의 정의구현 사제단 등 기독교 세력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중심은 주로 KSCF 기독학생 총연맹이 우리나라 우리 유신 시절에 거의 학원가에서 학생 운동을 주도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그 시대 상황을 우리가 조금 알면서 임 목사님이 왜 돌아가셨는가 하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겁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난 후에 박정희의 졸개인 이 전두환 일파는 이미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계획을 다 세우고 1212를 일으키며 착착 정권 찬탈 준비를 해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학생 데모를 하는 각 학원에 프락치들을 넣어서 이 프락치들이 학생 시위가 폭력적으로 될 수 있도록 유발하는 장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의 봄 80년 3월, 4월, 5월에 전두환 일당의 소위 군사독재를 배격하고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학원가의 열기가 전국으로 번지던 그런 때에 전두환 일파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5월 어간에 학원가에 있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 학생들과 지도자들을 전부 예비검속을 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소위 민주화의 핵심 지도자들을 내란 음모죄로 전부 다 잡아들이자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학을 중심으로 광주항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무력으로 무참하게 5.18을 제압하고 난 후에 정권을 유지해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유신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야물차게 각지에서 하고 있는 재야인사들이 걸림돌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학생들은 사전에 잡아다가 조사를 하여 재판에 넘겨 처리하고 난 후, 재야 민주 인사들을 어떻게 하든 자기 정권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전부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제일 어른이신 임기윤 목사님, 김광일 변호사님, 최승무 목사님, 그리고 저 그렇게 보안사에 잡혀갔습니다. 그때 송기인 신부님은 미국 가 계셨습니다. 부마항쟁 나기 전에 천주교 부산교구의 이갑수 주교라고 하는 분이 자꾸 정보부에서 송기인 신부 문제를 거론하니까 송기인 신부님을 공부하러 가라고 미국으로 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5.18 때는 송기인 신부님이 안 계셨습니다.
저희들이 보안사에 잡혀갔는데 보안사에서 취조하는 제일 첫 번째 내용이 뭐냐 하면 ‘김대중은 빨갱이다. 김대중과 함께 하는 사람들도 전부 빨갱이다. 김대중이 빨갱이인지 알고 했든 모르고 했던 김대중한테 속아서 너가 지금까지 제야민주화운동 활동한 것이 사실은 빨갱이 활동을 한 것이다’ 라고 집중적으로 추궁했습니다.

제가 이 말씀만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알지만 임기윤 목사님은 성격이 호랑이입니다. 일반 재야인사들은 정보부 인사들하고 심하게 충돌을 안 하려고 그랍니다. 그런데 정보부나 보안사, 시경, 경찰서, 정보과 정보부 조정관들이 다 나와도 이 임기훈 목사님은 “예이 나쁜 놈. 박정희가 빨갱이지 어떻게 김대중이 빨갱이냐 이 나쁜 놈들아”하고 혼낼 정도로 아주 호랑이같이 무서운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보부에서 나오는 조정관들이나 일반 시경에서 나오는 정부 인사들이 임기윤 목사님 앞에 가면 전혀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아이구 목사님 우리들 입장도 봐달라’는 그 말 말고는 임기윤 목사님한테 어떤 압력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임기윤 목사님이 호랑이셨습다.
저는 7월 20일날 석방되고 임기현 목사님은 7월 26일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그때 제가 보안사에 같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은 임기윤 목사님은 격렬하게 싸우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 잡혀가면 제일 먼저 두두려 패거든요. 그리고 김창용이가 고문으로 국회의원 잡아다 고문하던 고문방에 저희들을 데리고 가 전기의자에 앉아보라 그럽니다. 김창용이라고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이승만 독재정권 때 대한민국에 제일 악질적인 특무대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6.25 때 부산에 특무대장으로 있었는데 이게 김창용이가 쓰던 건데 누구든지 여기 5분만 앉히면 그냥 사람이 가든지 바른말 안 하는 게 없다 하는 식으로 겁을 주는 겁니다.

임기윤 목사님한테도 당신이 지금까지 활동한 게 김대중이가 빨갱이니까 빨갱이와 함께 활동한 당신도 빨강이라고 엄청 닥달했을 겁니다. 그러면 임기영 목사님 성격에 절대 ‘오냐 그렇다’고 이야기를 안 했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빨갱이지 이놈아 어떻게 김대중이 빨갱이냐면서 아마 엄청 심하게 싸웠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싸우고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맞으셨든지 아니면 조금만 잘못하면 군인들이 칼빈 개머리판으로 내리치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임기윤 목사님이 돌아가시지 않나 그렇 생각하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참 그동안 너무나 우리가 참 살기에 바빴는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임 목사님을 너무 잊고 살았습니다. 정말 이분의 고귀한 뜻을 제대로 사회에 참 드러내놓고 이분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우리 그런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스러움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 추도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원영 상임이사

이원영 상임이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임기윤 목사님은 존경받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또한 교회에서 5.18의 참상을 폭로한 행동하는 지성이시기도 했다. 부산.경남 지역 기독교 민주화 운동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임기윤 목사님은 순교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드러내셨다.”면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임기윤 목사님의 43주기 기억 예배를 맞아 모인 이유는 종교인이자 활동가였던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정신을 잊지 않기 위함이고 작은 예수처럼 살다 가신 목사님의 기억 예배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임기윤 목사 43주기 추모제 추모사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추모객 여러분. 또 이 자리에 계시진 않지만 임기윤 목사님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 우리는 오늘 여기서 고 임기윤 목사님의 삶과 숭고한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이 민주화운동을 위해 남긴 발자취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이 가져야 할 하나의 덕목이 되었으며, 그가 삶을 통해 보여준 사랑은 햇볕처럼 우리에게 내리쬐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신군부는 부산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에게 엄중한 감시와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고 임기윤 목사님은 1980년 7월 19일 부산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받던 중 7월 26일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은 존경받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또한 교회에서 5.18의 참상을 폭로한 행동하는 지성이시기도 했습니다. 부산.경남 지역 기독교 민주화 운동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임기윤 목사님은 순교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임기윤 목사님의 43주기 기억 예배를 맞아 모인 이유는 종교인이자 활동가였던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민주주의를 향한 희생정신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런 임기윤 목사의 삶을 기억해야 하며. 그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인해 지금의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들을 도우며 작은 예수처럼 살다 가신 목사님의 기억 예배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이원영

 

   
▲ 추도사/ 김영주 목사(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김영주 목사는 (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임기윤 목사님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시간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전두환 장군을 위한 국가 조찬기도회를 드리고 있었다. 그들 속에 우리 감리교회 지도자도 자리 잡고 있었다”며 “부끄럽다”고 했다. 이어 유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이제야 기억예배를 드리며 국가를 대상으로 의문사에 대한 배상을 추진하고 있는 점을 언급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면서 “우리 감리교회가 임기윤 목사님을 순교자로 명명해서 목사님의 민주화운동 투쟁의 역사와 업적을 감리교인들이 존중하고 존경하고, 배우고, 선교자로 기억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시간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전두환 장군을 위한 국가 조찬기도회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속에 우리 감리교회 지도자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을 대하고, 그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사모님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를 빼앗기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던 아들과 딸들에게 우리는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주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목사님이 가신 지 43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이곳 기독교회관에서 기억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43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들은 국가를 대상으로 배상위원회를 조직해서 그 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목사님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가의 진정어린 사과와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고통당했던 목사님을 위한 배상을 위해서 노력하고자 합니다.
격려해 주십시오. 우리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젊은 목사들이 목사님을 기리고, 그 뜻을 앞으로 길이길이 본받고, 목사님을 우리의 사부로 모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해 주십시오.
목사님, 목사님을 우리 감리교회가 순교자로 명명해서 감리교단 자체에서 목사님을 위한 예배를 드릴 날을 기대해 봅니다. 감리교의 목사로서 살아왔던 민주화 운동 투쟁의 역사와 목사님의 업적을 감리교인들이 존중하고 존경하고, 배우고, 선교자로 기억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감리교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가 지난 날의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새롭게 목사님을 순교자로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목사님의 기일 때 우리가 그동안에 43년 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목사님의 업적을 기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참여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주 목사

 

   
▲ 광고 /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사무총장 전남병 목사

이날 기억예배를 실무적으로 준비한 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사무총장 전남병 목사는 기억예배 말미에 ‘광고’를 전하면서 “기독교인들이 2천년 전에 죽은 한 청년을 기억하면서 지금도 매주 혹은 매일 그 청년을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희 단체는 임기윤 목사님 기억하는 일을 잊지 않고 지속하겠다.”고 다짐했다.
오는 10월에는 임기훈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세미나를 한반도 통일 역사문화연구소에서 주최할 예정이다. 

 

 

   
▲ 사회 / 송병구 목사(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 이사장)
   
▲ 설교/ 박철 목사(감리회 원로목사, 김의기열사 유가족)

설교 / 임기윤 목사의 이름을 호명하며

마가 14:32-36

[설교 박철]

예수께서 30대 초반 나이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셔서 곧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전심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는 고난과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시기로 결심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1980년 7월 19일 임기윤 목사님이 보안대에 끌려갈 때 연세가 58세였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땠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5.18 이후 당시 상황은 살벌했습니다. 언론은 계엄군 보도검열에 의해서 완전 통제되었습니다. 진실은 완전 차단된 상태였습니다. 이미 5.17일부터 전국에 걸쳐 예비검속이 실시되어서 재야인사들도 다 숨어 있었습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공포의 분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주일예배 설교시간에 임목사님이 전두환의 5.18만행을 증언하고 신군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1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보안사에는 임기윤 목사님이 평소 지병인 고혈압이 원인이 되어서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간호사 출신인 최광명 사모님의 증언에 따르면 뒷머리 왼쪽이 3센티 가량 찢어져 피가 말라 붙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임 목사님은 전두환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하며 정의의 편에 섰던 하느님의 충실한 예언자였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은 얼마든지 죽음의 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민주화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던졌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군부독재에 항거하며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이 땅의 민주제단에 바치셨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은 청년시절 해방 전부터 조만식 장로를 따르며 민족운동에 헌신하다 해방 후 북한 공산정권의 검거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셨습니다. 평소 강직한 성품으로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그분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셨습니다.

특히 1975년에는 범 교단적으로 5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여 조직한 ‘사회정의구현 부산 기독인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시면서 반 유신 민주화투쟁에 앞장서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박정희 정권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는 80년 광주항쟁을 무참히 총칼로 짓밟으며 권력을 훔친 전두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임기윤 목사님이 주검이 되어 돌아온 열흘 뒤 8월 6일 롯데호텔에서 한경직 목사를 비롯하여 교단의 총회장급 목사 스물세명이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개최합니다.
이 조찬기도회에서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은 앞을 다투어 전두환을 “다윗과 같은 지도자로 칭송하고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최선봉에 섰던 “여호수아 같은 인물이 되게 해달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또 전두환을 향해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내란과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사회악을 제거하는 의인’이라고 추켜세우다니. 한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내란죄의 수괴에게 보란 듯이 ‘면죄부’를 준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이 치욕스런 허물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의 주류교회는 이런 부끄러운 과거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 기도회 후 21일 만에 전두환은 8월27일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1일 취임합니다. 한국교회는 5·18광주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을 위하여 레드카펫을 깔아준 셈이었습니다. 과거 역사에서 뼈아프게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배운 교훈은 쉽게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임기윤 목사님은 5.18로 인해 순교한 유일한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타살당한 임기윤 목사님의 죽음을 외면했습니다. 암울한 시절, 목사님의 헌신과 희생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어떤 그럴듯한 변명과 핑계도 그분의 삶과 죽음이 지향했던 가치에 비해 아름답고 의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못입니다. 정성껏 추모하지 못하고 충분히 기억하지 못함이 잘못입니다. 우리 모두는 임기윤 목사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부산 민주화운동의 첫걸음, 순교자인 그분을 잊어서도 몰라서도 외면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독일에 본훼퍼 목사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임기윤 목사님이 계십니다. 임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43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묻혔던 정의의 씨앗은 그동안 서서히 싹을 틔웠습니다. 광주정신이 밑받침이 되어 민주화운동의 줄기가 얼어붙었던 땅을 녹이고 흙을 깨뜨리며 솟아올랐습니다. 6월항쟁을 통해 잎을 돋우었으며, 촛불항쟁을 통해 우리는 승리의 기쁨과 환희를 맛보기도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처절한 실패와 배신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이 별안간 아주 형편없는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총칼과 탱크로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대량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하였다면, 42년 후 윤석열과 정치검찰이 조국 가족을 도륙하고 검란에 의하여 정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전두환을 칭송한다는 윤석열과 그 졸개들이 5.18민주묘역에 떼거리로 몰려가서 기념사도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기만과 위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불러온 이들도 마땅치 않습니다. 나라는 1년 만에 시궁창에 처박혔습니다. 나라가 검찰공화국으로 전락한 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불교 법화경에 ‘화택(火宅)’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마치 법화경에서 볼 수 있는 화택, ‘불난 집’ 같습니다. 대통령이란 자가 집에 불을 질러놓고, 부채질하고 있으면서, 그런 행동이 불을 끄기 위한 우국충정의 결단이었다는 논리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나라 전체를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습니다. 매우 불길한 조짐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민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시 촛불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매우 위중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우리 기독인들은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가만히 골방에서 기도하며 침묵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불의한 정권에게 저항하고 비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강자들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회적 강자들의 억압과 횡포에 대해 저항하는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사회적 약자 편에 선 사랑이요, 항상 정의를 담고 있고, 공분(公憤)을 담고 있는 사랑입니다. 불의한 일에 분노할 줄 모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셨다면, 우리도 타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요15:13)

임기윤 목사님은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을 때, 5.18 신군부세력에게 저항하고 비판했던 것처럼, 그것이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불의한 정권에 의해 죽음을 당하신 순교자 임기윤 목사님을 역사 앞에 다시 그의 이름을 호명(呼名)하고, 그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임기윤 목사님은 감리교 목사님이십니다. 5.18 광주밖 열사 가운에 감리교인으로 임기윤 목사님과 김의기 열사와 김세진 열사가 있습니다. 저는 감리교단에서 36년동안 목회를 하고 3년 전 은퇴했는데, 감리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기념하는 일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대로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희생된 많은 분들이 잊혀지고, 아직 그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기윤 목사님 또한 보다 널리 기억되었어야 마땅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목사님의 뜻을 나누었어야 마땅합니다.

앞으로 살아남은 우리가 할 일은, 임기윤 목사님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선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못다 이룬 뜻을 이 땅에서 보다 온전히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애쓴 아름다운 사람! 참된 믿음의 사람, 임기윤 목사님! 우리도 목사님을 따라, 목사님의 어깨에 우리의 팔을 얹고, 그 길을 함께 행진해 나갔으면 합니다.

바라기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더 넓고 깊게 확장되고, 작금의 오만하고 극악무도한 정권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하루빨리 꼬꾸라지는 날이 올 것을 기도합니다. 나아가 남북의 화해, 평화통일이 앞당겨지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임기윤 목사님의 영전에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마지막으로 임기윤 목사님의 설교 한 대목을 낭독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때에는 죽고 망하는 것 같지만 역사는 그를 살려냅니다.” 아멘.

 

   
 
   
 
   
 
   
 
   
 
   
 
   
 
   
▲ 이소선 합창단의 추모의 노래
   
▲ 이소선 합창단의 추모의 노래
   
▲ 축도 / 신경하 감독
   
 

 

   
 
   
 
   
▲ 1980년 4월28일 임기윤 목사(왼쪽 세 번째)가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 발언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순교자 임기윤 국가배상 추진위원회 제공
   
▲ 1970년대 임기윤 목사(왼쪽)와 김대중(오른쪽) 전 대통령(2009년 작고). 생전 이희호(2019년 작고) 여사는 “진주교도소로 이감된 남편을 수발하기 위해 부산역에 갈 때마다 임기윤 목사가 마중 나왔다”고 말했다. 순교자 임기윤 국가배상 추진위원회 제공
   
▲ 1970년대 임기윤 목사(뒤쪽 가운데 안경 쓴 남성)가 함석헌 옹(앞쪽 백발)의 뒤를 따라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임 목사 옆은 이희호(안경 쓴 여성) 여사로 보인다. 순교자 임기윤 국가배상 추진위원회 제공

 

 

자료

   
 
   
▲ 임기윤목사 국군보안부 부산분일연행 19일부터 21일가지의 행적
   
▲ 결의안[임기윤목사 사망 및 신앙생활 탄압 관련]
   
▲ 임기윤목사 국군보안부 부산분일연행 19일부터 21일가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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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고빔 (125.128.68.152)
2023-08-01 15:22:20
감리교회에 이런 분이 계셨군요
“기독교인들이 2천년 전에 죽은 한 청년을 기억하면서 지금도 매주 혹은 매일 그 청년을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희 단체는 임기윤 목사님 기억하는 일을 잊지 않고 지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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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onnuree (121.187.120.162)
2023-08-01 08:44:54
김경환 비판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세속화라고 보는 무지함, 좌파나 전광훈 운운하는 것 등을 보면 김경환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종북좌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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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김경환 (211.54.116.232)
2023-08-02 00:58:53
디트리히 본회퍼 語錄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 없다.” (1944년 7월 16일).

“우리들의 1900년에 걸친 기독교의 선교와 신학은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 위에 세워져 있다. 기독교는 항상 ‘종교’의 하나의 형식이었다.” (1944년 4월 30일)

도대체 구약성서에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이 문제된 곳이 있을까? 일체의 중심점이 이 세상에서의 신의 의와 신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닐까? (1944년 5월 5일)

나는 언제나 구약성서的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때라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인생과 이 세상이 상실되면 모든 것이 상실되고 종언을 고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인생과 이 세상을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죽은 자의 부활과 새로운 세계를 믿는 것이 허락된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언젠가 은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 너무나 조급하게 그리고 너무나 직접적으로 신약성서 적으로 존재하고 느끼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결코 基督者的이 아니다. (1943년 12월 5일).

나는 한계에 처해서가 아니라 중심에서 … 신에 대해 말하고 싶다. … 신은 우리들의 생활의 한가운데서 피안的이다.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에서가 아니라 마을의 한가운데 있다. 이것이 구약성서的이라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신약성서를 구약성서的으로 읽는 일이 너무나 적다. (1944년 4월 30일)

나의 평가: (1)본회퍼는 신약보다는 구약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 (2)神을 절대자로 여기는 듯하면서도 그 내심에는 인간중심(사회구제 등)을 더 강조하는 듯해서 신에 대한 개념, 인간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했다. 즉 본회퍼 사상은 미완성 또는 미숙하다고 본다. (3)구약성서的이라 함은 하나님 중심이고, 신약성서的이라 함은 인간의 죄를 대속한 예수님 중심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념인데 이 통념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는 본회퍼의 견해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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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onnuree (121.187.120.240)
2023-08-02 10:24:28
김경환님의 주장을 따른다면 사무엘은 세속화된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사무엘상 15:22 KRV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형제와 다툰 것이 생각나거든 제사보다도 먼저 화해를 하라고 하신 예수님은 반기독교 종북좌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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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김경환 (211.54.116.232)
2023-08-02 12:39:36
1. 루터도 비판하는 데 본회퍼는 신성불가침인가? 2. 예수님은 자본주의자, 사회주의자, 사법체계 순응자로서 <복합주의자>이라고 본다!
1. 나의 맨 처음 댓글의 요지는 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볼때 본회퍼의 反히틀러운동의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루터와 칼빈도 비판받는 세상에서 본회퍼는 절대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신성한 존재인가?

2. 사무엘, 예수의 발언 등의 반론에 대해서 답변한다. 일하지 않고 땅속에 돈을 묻어둔 사람에게 호통치는 예수님의 모습은 <자본주의자>이고, 가난한 자와 약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회주의자>이고, 빌라도 앞에서 성실하게 재판을 받는 예수님의 측면은 <투항주의자(지존질서 순응자)>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본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 투항주의자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기독교는 자본주의자, 사회주의자, 투항주의자 등 복합적인 기독교이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님은 反기독교도 아니고, 종북 좌파는 더욱 더 아니다. 예수님은 김일성을 추종하지 않는 좌파성향도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추종자에는 종북좌파 딱지를 붙일 순 있을진 몰라도 예수님은 아니다. 예수님에게 좌파라고 딱지붙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예수님은 우파이고, 동시에 좌파이면서 또한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보수파(사법체계 순응자)다. 복합적인 예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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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onnuree (121.187.120.100)
2023-08-09 11:22:10
본회퍼를 위험한 세속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사상이다.
교회와 복음은 세상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변화시켜야 한다.
교회 안에만 안주해 있어서는 결코 주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김경환님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전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속에 빠져서 죄인들과 놀아났다. 아주 신성모독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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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김경환 (211.54.116.232)
2023-07-30 14:30:27
디트리히 본회퍼 비판
1. 교회의 세속화 추구

본회퍼는 교회활동을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세속적 사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인 차원에서 내려와 교회가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줄이면, 교회가 영적단체가 아닌 사회단체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2. 그 당시 민중으로부터 외면 받은 告白교회의 일원

帝國교회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히틀러는 90% 이상의 압도적인 찬성투표로 총통에 당선되었는데 이에 반대하는 고백교회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본회퍼는 나치패망 후 “독일에 오로지 히틀러를 지지하는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反히틀러운동을 한 교회도 있었다.”라는 독일교회의 免避用 항변도구로 가끔 사용되곤 했는데... 본회퍼의 반독재운동이 한국 左派系列의 귀를 솔깃하게 했고 최근에는 전광훈 등 張三李四까지 본회퍼를 들먹이고 있는 실정이다.

3.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본회퍼 사상을 따를 경우 영적 사명보다는 세속적 사명에 치우쳐 교회를 社會團體化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기생충처럼 번식하고 있는, 각종 완장차고서 민중의 피와 국가의 세금을 빨아먹고 있는 각종사회단체를 볼 때면 본회퍼 사상이 가진 위험성을 목도하게 된다. 反히틀러운동에 <목숨 바친 고귀한 행동>과는 별개로 본회퍼의 <위험한 사상>은 경계해야만 한다.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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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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