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이야기 - 광민이

황대성

저녁을 먹고 서재에 막 나왔는데, 광민이가 전화했다. 느리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목사님 저 화분 하나 교회로 가져가도 돼요?”라고 물었다. “당연하지. 화분을 가져온다니, 광민이가 최고다!” 말하고 나서도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8시쯤 도착한다는 화분이 너무 궁금했다. 교통대학교에 입학하고 교회를 찾아온 키가 멀쑥하게 크고 말수가 적어 또래들 속에서 잘 눈에 띄지 않던 학생이다. 주일 오후, 모두 돌아간 텅 빈 마당의 느티나무 아래, 나무 의자에서 늦도록 공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졸업하고 청주 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 옆에 방을 얻어 음성으로 출퇴근하는 지도 벌써 2년째다. 그러고 보니 처음 한 전화였다. 나도 딱히 전화하거나 마주 앉아 길게 얘기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한 시간여가 얼마나 긴지 몇 번이나 창으로 내다보고, 문을 열고 나와 서성이다가 다른 사람이 전화하고 찾아와서 잊어 버렸다. 11시쯤 되어 자러 들어가다가 문득 화분 생각이 나서 30여 개의 화분을 모아 놓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흰색 사각의 대형화분에 뭉툭한 기둥만 서 있고, 시들어서 간신히 매달린 잎이 하나 보였다. 침대에 누웠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를 받은 느낌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 처음 모습

이튿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2층에서 내려와서 다시 그 화분 앞에 섰다. 볼품없이 매달린 잎을 따 버렸다. 가게를 지나다가 보면 흔하게 마주치는, 없애기는 미련이 남아 문밖에 내놓는 죽은 나무 화분! 바로 그 모습이다. 다음 날 새벽에도 그다음 날 새벽기도회가 끝난 다음에도 죽은 화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광민이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우선 나무를 살려야 하는데, 물을 매일 흠뻑 줘야 할지, 덜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화원에서 처음 가져올 때 아름답던 화분의 나무는 물을 너무 안 줘서 말라 죽는 경우보다 너무 많이 줘서 뿌리가 썩어서 죽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일단은 햇볕에 내놓았으니, 충분히 물을 주는 쪽을 택했다. 며칠이 지나서 주일에 만난 광민이는 “그날 제가 늦게 퇴근하게 돼서 목사님께 다시 전화하기도 어렵고, 서재에도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여기다 놓고 갔어요.”라며 싱글렸다. “그래. 고맙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밀린 숙제를 독촉받는 기분이었다. 한 주가 더 지나서 여전히 멋없이 서 있는 나무 기둥을 살펴보고 어루만지다가 돌기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에 가슴에 불이 반짝 켜졌다.

▲ 움이 틀 때

20여 년 전 청주에서 목회할 때, 집사님이 원장으로 있는 어린이집으로 심방을 갔다. 출입문 옆에 죽은 벤쟈민 화분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인 어린이들이 가득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아서 예배드리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나오면서 원장에게 저 화분을 나 달라고 했더니, 새것을 사다 놓겠다고 한다. “저 화분을 가지고 싶어서 그래”라고 했더니, 다음날 예배당 문 옆에 두고 갔다. 열심히 물을 주며 매일 들여다보았지만, 한동안 아무 변화가 없어서 정말 죽은 줄 알고 포기하려는데, 가지 끝에 움이 트려는 듯 불거져 나온 것이 하나 보였다. 두어 주가 지나서야 몇 개가 더 보였다. 한 달여를 기다리니까 파릇한 싹이 나왔다. 이제는 쑥쑥 자랐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더 정성을 들였다. 날씨도 더워졌지만 그대로인 것 같아 답답했다. 그러다가 일에 쫓겨 한동안 잊고 지냈다.

어느 날 들여다보니 가지마다 유록의 눈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혼자 환호성을 질렀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것 보라고, 이 나무가 살았다고 자랑하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더 유심히 본다. 그래도 신이 나서 아침저녁으로 매만지며 돌보았다. 그때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잎이 크고, 줄기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담스러운 모양을 갖추기를 바라는 내 염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엉성한 나무 모양만 내고는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슬이 내린다 생각하고 물 한번 뿌려주고, 한낮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샤워라 생각하고 물을 주었다. 부엽토를 얹어 주기도 하고, 과일 껍질을 흙에 묻어 주며 빨리 썩어 거름이 되라고 기도했다. 그런 나의 노력도 보람 없이 누렁 잎이 몇 개씩 떨어졌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서재로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또 한동안 잊고 있었다. 노염이 기승을 부릴 때쯤 새삼스럽게 살펴보니, 줄기가 축축 늘어지고 잎이 무성해 원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온실에서 자란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짙푸른 녹색의 생명을 뿜어낸다. 드나드는 교인들도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보면서 얼굴이 환해졌다.

▲ 싹이 자란 모습

근육질 남자의 팔뚝만 한 기둥에서 뻗은 두 줄기의 끝에 하나둘씩 나오던 움이 하루가 다르게 수를 늘려가다가, 어느 날 허리춤에서도 불쑥 고개를 내민다. 한 달 가까이 되니까 줄기 한쪽마다 7-8 개와 기둥에서 서너 개가 나와서 아름다운 수형을 만들어 낼 준비를 서둔다.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내려오면서 화분 앞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호스로 물을 뿌려주는 것이 더없이 즐겁고 깊은 대화로 바뀌었다.

광민이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으며 웃음기 머금은 얼굴을 적당한 거리에서 보여 준다. 나도 여전히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광민이를 보면 내 마음이 환해진다. 생명에의 관심과 사랑을 투박하게 내미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줄기에서 난 싹

▲ 원줄기에서 난 싹

필자약력> 
대소원교회 담임목사.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봉숭아꽃잔치 20회 개최
저서> 깊은 밤에 깨어 있다는 것은.      
가곡> 봉숭아 마음, 비가 온 아침
주소/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대소원1길 8    
전화> 043-852 3950, 010 5491 5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