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경
5년 남은 “기후 지옥”의 문턱과 존 캅 교수의 “구원” 이해
김준우  |  honestjesus@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3년 07월 17일 (월) 23:48:27
최종편집 : 2023년 07월 21일 (금) 23:29:21 [조회수 : 90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5년 남은 “기후 지옥”의 문턱과 존 캅 교수의 “구원” 이해

 

김준우(생태문명연구소)

 

   
 

세계 도처에서 미증유의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 사막화와 태풍, 빙하의 축소와 해수면 상승, 지진과 난민들의 비극이 더욱 심해지는 이유는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기온이 1.2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점차 온난화가 계속될수록, 식수난과 식량난을 포함해서 모든 기후 재난이 더욱 악화될 것임이 분명하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2022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제27차 기후 당사국총회 개회 연설에서 “인류가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on a highway to climate hell)를 달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기후 연대 협약을 체결하거나, 집단 자살(a collective suicide)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살 수 있는 지구를 만들기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는 2030년까지 결정될 것”임을 강조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이렇듯 “기후 지옥”과 “집단 자살”이라는 매우 섬뜩한 언어를 사용한 것은 놀랍지만, 현재의 기후 위기 상황이 그만큼 위태롭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방출된 열의 90%를 흡수하는 바다는 지난 50년 동안 히로시마 원폭 250억 개 이상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지난 120년 동안의 평균 수온보다 섭씨 5도 이상 높아진 해역도 생겨났다. 현재도 해마다 온실가스를 500억톤 이상씩(이산화탄소만 360억톤씩) 배출하는 일, 즉 “1초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네 개의 폭발 에너지, 즉 하루에 약 35만 개의 원폭 에너지”(“기후폭탄”)를 방출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2023년 6월 말, 남극 주변의 해빙(sea ice)은 평균 넓이(1981-2010년)에 비해 250만 제곱킬로미터(한반도 전체 면적의 11배 크기)나 줄었다(도표 1). 남반구의 여름철인 11월 이후, 심각한 엘니뇨 현상까지 영향을 끼치면 얼마나 더 줄어들지 예상하기조차 두렵다.

 

   
 

도표 1. 남반구의 겨울철인 6월 말의 기록적인 해빙sea ice 축소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남은 탄소예산은 2023년 현재 250기가톤이다. 매년 54기가톤씩 사용하기 때문에, 앞으로 5년 내에 모두 소진되어, “기후 지옥”의 문턱(1.5도 상승)을 넘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2022년 현재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는 523ppm CO2e인데, 매년 3〜4ppm CO2e씩 증가하고 있다(https://gml.noaa.gov/aggi/aggi.html.). 따라서 현재 추세로는 2030년에 550ppm CO2e에 도달할 것이다. 그 수준에서는 점차 “3도 이상 4도 미만 상승할 확률은 66%가 넘는다”는 것이 보수적인 IPCC(2014)의 예측이다. “기후 지옥”의 문턱을 훨씬 넘어선다는 말이다. IPCC 6차 보고서(2023)는 2100년까지 2.8〜3.2도(최고 4.4〜5.2도) 상승을 예상한다. 생명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역이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다. 6도 상승하게 되면 “인류 멸종의 문턱”을 넘게 되는 것이다.

 

1971년에 󰡔너무 늦었는가? 생태신학󰡕(Is It Too Late? A Theology of Ecology)을 발표하여 생태신학의 대표적 개척자가 된 존 캅 교수는 50년 뒤 95세에 발표한 책 󰡔구원: 예수의 사명과 우리의 사명󰡕(2020)에서 오늘날 구원은 무엇이며,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를 묻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구원이 예수가 생각했던 “하느님 나라의 도래 속의 정치적 구원”(p. 28)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구원을 흔히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예수를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중보자”(p. 13)로 이해하거나, 우주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요한묵시록에서처럼 재림하여 신실한 자들만을 구원할 초자연적 구세주로 믿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 이유는 “파국을 막기에는 너무 늦은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생존자들의 퍼센티지를 늘릴 것인지, 그리고 덜 호의적인 환경 속에서 살게 될 그들에게 어떻게 문명을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 안내하는 일”(p. 81)이기 때문이다. 캅 교수는 오늘날 “하느님 나라는 생태 문명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생태 문명의 일차적 건설자”이며 “가장 위대한 치유자인 하느님”이 “우리들 안에서, 또한 우리들을 통해 일하시도록 하느님을 돕는 일”(p. 155)이라고 고백한다.

캅 교수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바울과 예수 사이에서 바울을 따랐다”(p. 64)고 지적한 후, 오늘날 우리의 전 지구적인 자멸적 상황이 바울의 상황보다는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자멸적 상황과 비슷하다고 판단해서(pp. 64, 68), 우선 예수에게 문제가 된 이스라엘의 자멸적 상황을 밝힌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억압과 착취뿐 아니라 로마에 대한 무장투쟁을 선호하는 폭력적 운동 때문에 자멸적 상황이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도모한 방법은 세 가지였다. 성전 당국의 방법은 이스라엘의 생존전략으로서 로마에 협조하고 복종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추구한 집단은 무장투쟁 전략을 택했다.

캅 교수는 주기도문과 산상설교에 근거해서, 예수는 반문화적인(counter-cultural) 제3의 길을 통한 “생명의 보전”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즉 예수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고, 하느님 나라는 ‘아바’(Abba)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는 것으로서, 일용할 양식과 용서, 부채 탕감(희년)을 통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는 “경제질서의 급진적 변화”였다(pp. 16-17). 예수에게 구원은 세리 삭개오의 경우처럼,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폭력을 통해 억압하고 착취하는 로마인들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입각한 원수 사랑을 통해, “주종관계”를 “동무관계”로, 적대감을 동지의식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 했던 것이다. 예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며, 구원은 “하느님의 목적에 순응하는 공동체의 삶”(p. 21)이었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목적에 순응하면, “메시아적 소망이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다. 예수의 이런 정치경제적 구원 이해를 형성한 것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p. 30), 그 “역사적 변화”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처럼 “거대한 역사적 변화를 위해 일하고 기도해야” 했지만, 이미 식탁교제를 통해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존”(p. 19)을 경험했다. 예수는 이런 제3의 길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성전 당국의 회개를 기대했지만, 실패했다(p. 26). 그 결과 성전에서 황제숭배를 요구한 로마에 대해 무장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결국에는 예수가 막으려고 했던 대량학살을 자초했다.

예수가 처형당하고 부활한 후, 제자들은 “예수의 사명을 확장”하여 이방인들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교회에서는 성령 체험 후에 사도 바울을 통해 구원의 초점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 바뀌었고, “역사적 변화에 대한 예수의 기대”가 개인들이 “죽은 후 낙원에 대한 기대가 뒷받침하는, 사랑과 서로 지원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경험으로 대체되었다”(p. 29). 이처럼 상황과 관심이 바뀌면서, “하느님 나라의 지상 실현”이라는 예수의 기획과는 다른 종교가 된 것이다. 즉 예수에게 “잘못된 것은 현실 상황”이었고, 회개해야 할 죄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받아들이는 것”(p. 33)이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잘못된 것이 개인적 죄”였고, 구원은 “사후심판(영벌)에서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서, “예수의 수난을 통해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되었다(p. 32). 예수는 메시아가 되었다. 이처럼 구원의 초점이 예수의 수난에 맞춰진 개인 구원 중심의 속죄론 때문에, 정치경제적이며 반문화적인 예수의 구원과는 “다른 종교”가 된 것이다(p. 32). 특히 제국의 종교가 된 후 “교회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살해하기 위한 모병 센터가 되었다”(p. 31). 또한 교회에서 재앙적인 것은 “바울이 극복한 유대교 율법주의보다 더 심한 그리스도교 율법주의”가 등장한 것이다(p. 34).

캅 교수는 교회 역사에 대한 이런 비판을 통해, 예수는 예언자들의 전통 속에서 민족 전체의 구원을 위한 역사적 변혁을 추구했고,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육체적 할례” 대신 “영적인 할례”를 요구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인 교회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상황이 바뀌면 제자직의 사명도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한다(p. 64). 특히 오늘날처럼 파국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고난을 줄이는 일”과 “생존의 기회를 지닌 반문화적 공동체들을 창조하는 일”(p. 65)을 위해 시급히 되찾아야 할 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직이라고 강조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변혁을 위해 다른 종교들과 비교하여 “최상의 자원들”을 갖고 있는데(p. 54)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신앙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제자직에 대한 이해에서 역사의식이 결여된 것을 지적하는 캅 교수는 교회가 쇠퇴할 뿐 아니라 성서의 영향이 쇠퇴하는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 신앙의 역사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p. 56). 특히 안락한 중산층의 입맛에 맞도록 산상수훈을 해석하여, 제자직을 “예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철저한 죄성을 고백하도록” 만드는 것(p. 51), 그리고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양의 비역사적 영성”을 찾는 것(p. 52)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성을 상실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심지어 오늘날 과학조차 상당 부분 17세기 기계론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처럼 역사에 뒤떨어진 세계관이 대학을 장악한 형이상학이 되었기 때문에, “인류가 직면한 철저한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철저한 사고와 철저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다(p. 62).

존 캅 교수는 젊은 시절에 사회복음(Social Gospel) 운동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운동에 큰 영감을 받았다. 사회복음과 민권운동은 평화와 정의 운동, 종교간 대화, 페미니즘, 성소수자 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캅 교수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회복음의 “인간중심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p. 68). 즉 생태계의 총체적인 붕괴 앞에서 “인간 사회의 특정한 불의를 줄이기”보다는 생태계 전체를 다시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희망을 제공할 통전적 견해가 필요했고, 그것은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통전적 생태학”과 같은 의미의 “생태 문명”이 우리 시대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사명이라는 주장이다.

이어서 캅 교수는 “생태 문명이란 무엇인가?”(6장)에서, 중국의 헌법에 “생태 문명 건설”이 포함된 것을 지적하면서, GDP 중심에서 지속가능성 중심으로, 산업적 농업 대신 생태적 농업으로 경제 구조를 바꾸는 일, 유기농법의 생태마을 운동, 육식 중심에서 채식 중심의 생태적 식단, 생태적 도시, 경쟁과 부담이 아니라 협동과 향유 중심의 생태적 교육, 동물 돌보기, 치유 중심의 형사처벌제도 등을 제시한다. 캅 교수는 생태 문명의 중심 원리가 (1) 관계성과 공동체, (2)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삼라만상의 본래적 가치를 인정하며, 동시에 인간의 특별한 책임을 인정하는 문명이라고 설명한다(pp. 77-79). 생태 문명의 이런 중심 원리에 기초하여, 정치경제적인 구현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현재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역 중심의 생산과 소비를 요청한다. 쿠바가 설탕을 소련의 석유와 교환하던 방식이 갑자기 중단되었을 때 소규모 가내 농업을 통해 식량자급을 이루어낸 것을 예로 들면서, 식량자급과 지역 단위의 태양광 발전을 통한 에너지 자립, 그리고 이웃 간의 상호책임성을 강조한다. 또 전쟁을 위해 폭탄을 많이 생산할수록 GDP가 올라가는 회계방식을 예로 들면서(p. 93), 중앙정부는 권력집중과 재화집중의 체제이기 때문에,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들이 상부 공직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통해 기업국가 체제를 투표자의 이익 중심의 정부로 만들 것을 제시한다(p. 85).

캅 교수는 “미국에서의 생태 문명에 대한 전망”(9장)에서, 트럼프뿐 아니라 클린턴-오바마 역시 국민의 이익보다는 월스트리트의 이익에 복무했을 만큼, 미국 정부와 의회는 연준(FR)과 사설 은행들의 지배 아래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어서 대도시 시장들(mayors)이 주도한 도시와 주 차원의 공공은행 설립 운동(pp. 99-101), 그리고 주택 냉난방에 많은 화석연료가 사용된다는 점 때문에 태양광 패널을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개선 사업에 싸게 공급하여 지역공동체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 데본 하트만(Devon Hartman)의 헌신에서 생태 문명을 위한 제자직의 소명과 모범을 제시한다(p. 104).

캅 교수는 오늘날 생태 문명을 위해 극복해야 할 것은 돈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1) 교회나 성서를 절대화하고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며, 타종교들에 대해 배타적이라서, 그리스도교를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가장 큰 방해물”(p. 107)로 만들어버린 그리스도교주의(Christianism), (2) 자연과 물질을 기계처럼 간주하고 인간 영혼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대신에 “유기체적 형이상학”으로 바꿀 필요성, (3) 자연(주체들의 공동체)과의 지속 가능한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 유물론적 자연 이해(객체들의 집합)와 ‘사실’만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가치’에 대한 논의조차 거부하는 근대적 과학주의, (4) 부족주의, 노예제도, 식민주의에 대한 종교의 뒷받침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 국가주의와 인종차별주의, (5) 유럽경제공동체 결성과 무역협정들이 보여주듯이, 금융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시민들의 이익과 생태계를 보호해야 할 정부의 권한까지 제한시키는 경제주의 등이다. 많은 학자들과 시민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걸림돌들을 제거해야만 생태 문명이 시작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캅 교수는 미국의 예외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예외주의와 비슷하다고 비판하면서, 미국의 역사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노예노동, 제3세계, 특히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세계 곳곳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은 자국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한다(p. 127). 따라서 생태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 반대뿐 아니라, (1) 세계 각국이 평화를 위해 자신들의 삶의 질서를 새롭게 편성하고, (2) 각국의 자원을 미래를 위해 사용하고, (3) 생태 문명을 위해 농업, 교육, 법체제, 종교를 구체화하고, (4) 낭비가 아니라 절약, 경쟁이 아니라 협동으로 사회가 조직되어야만 생태 문명도 지속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캅 교수는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의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서, 이런 “원수 사랑”은 다른 종교 전통에서 분명하지 않았던 것임을 강조한다(p. 138). 이어서 캅 교수는 “이 원칙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한 비폭력을 직접 이끌어낼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에게 폭력을 사용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폭력의 희생자와 폭력의 가해자 모두를 사랑한다면, 그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한 폭력적 개입은 모두를 위한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나는 예수가 비폭력을 보편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가르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p. 138).

마지막 장(“하느님은 도우실 수 있는가?”)에서, 오늘날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세상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목적과 통제 아래 일어난다고 단순하게 믿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물질이 전능하며 우주에 목적이나 계획은 없다”고 단순하게 믿는 무신론자들이 대학마저 장악한 현실에서, 캅 교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우리의 경험에 근거하여, 하느님을 “우리들 너머의 실재”로서, 과거와 단절된 철저한 새로움, 가치와 목적이라는 잠재성의 실현, 인간의 책임성, 자기결정권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결국, 이처럼 기후 파국을 최대한 늦춰서 최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상황 인식과 연대투쟁을 위한 정신적/영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세계종교들은 빠르게 쇠퇴하며, 폭력적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개체교회 목회자들은 온갖 삶의 무게에 지친 고단한 교인들을 위로해야 하며, 하느님 앞에 올바로 살도록 도전해야 하는 과제 때문에, “하느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니까,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통해 심리적 안전장치와 우주적 보호막을 제공하고 있다. 매우 절실한 과업이다.

그러나 본회퍼가 나치의 감옥에 갇혀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의 필요성을 말한 것은 “값비싼 제자직 없는 값싼 은총” 때문이다. 그것은 사제들과 신학자들 중심의 중보종교체제가 예수를 학살하는 데 앞장섰을 만큼, 은총의 도구들(성전, 경전, 안식일, 사제계급)을 절대화해야 종교 귀족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들 역시 “무대 위의 기계 같은 신”(deus ex machina)을 요구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위급한 곤경을 해결해 줄 도깨비방망이가 있어야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터 롤린스의 해석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의 마지막 외침은 예수 자신이 “무대 위의 기계 같은 신”을 버렸다는 증거이며,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서,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더 테레사처럼 “하느님의 임재 경험 없이도 생명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Peter Rollins, Insurrection, New York, NY: Howard Books, 2011, p. 150)이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을 살리기 위한 투쟁에 영적 에너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김준우,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IPCC 6차 보고서(2023)와 그리스도인의 과제>(2023), pp. 61-70에서 주로 인용한 것이다.

 

 

김준우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5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3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환경변화에 대해서 (121.166.28.204)
2023-07-20 00:00:33
1. 기후위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기후에 적응해야 합니다.
2. 만약 급격한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는 방법을 고안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 분야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일 것입니다. 즉 인류의 구원자는 예수가 아니라 물질주의자들인 과학자입니다.
3. 인간세상이 돌아가는 기본 원리는 확장입니다. 잠시의 후행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으로 관찰하면 인간은 그 세력을 끊임없이 확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소모하는 연료도 식량도 인구수도 역사이래로 증가했습니다.(그 증거는 교수님이 번역하신 탄소증가 자료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망할 때는 망하더라도 인간은 확장을 멈추지 않습니다.
4. 우리나라는 제조업과 수출으로 먹고사는 고에너지 소비국가입니다. 그런데 고에너지 소비를 줄여 제조업을 하지 않고 수출하지 않으면 많은 국민이 고통에 빠지고, 국민은 그것을 참아내지 못 할 겁니다. 즉 화석연료의 사용중단은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듭니다.(마치 저개발국가들이 더 많이 고통받는 것처럼)
5. 저는 원자력 찬성론자입니다.(물론 원자력의 안전성을 개선하는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발전 기여도는 원자력이 25%, 신재생이 5%, 기타 70% 정도입니다. 그런데 태양광 발전과 풍력발전에 있어 우리나라는 유리한 조건을 가진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신재생 발전효율 및 비용이 매우 낮아, 신재생으로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원자력을 대폭 늘려서 50% 이상으로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산업경쟁력과 기후변화에도 좋습니다.
6. 현재로서는 일단 원자력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종교인들이 경멸하는 물질주의자들이 빨리 핵융합을 빨리 상용화해야 합니다.
7. 환경주의자들 또는 찬성론자들은 일반대중에게 화석연료을 줄여 기후위기를 탈출하자고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언자의 말이 아니라 선동입니다. 개인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주요한 방법은 자동차, 냉장고, 에어컨의 사용과 육류섭취로 생각되는데, 이것들의 사용을 반만 줄이면 당신들의 말을 믿겠습니다.
리플달기
3 6
onnuree (121.187.120.162)
2023-07-22 09:58:00
원자력의 안전성 문제는 꾸준히 나올 겁니다
그래서 원자력이 효율적인 걸 알면서도 쓰지 말자고 하는 겁니다. 핵무기가 아주 효과적인 걸 알면서도 억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석연료와는 비교가 아 안될 정도로 위험합니다. 원자력 사용하자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의 선동입니다.
리플달기
3 0
환경변화에 대해서 (121.168.160.205)
2023-07-22 21:25:31
환경변화에 대해서 (121.168.160.205)
2023-07-22 21:21:26

어리석은 자는 님이고, 선동은 님이 하시는 거예요.
1. 님은 원자력 발전을 핵무기와 비교하는 우를 범하고 있어요. 예를 들햐냥 똑바로 드세요. 원자력발전과 비교하시려면, 다른 발전수단과 비교하세요.
2. 화석연료로 죽는 사람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 제 동네에서 일년에 1-2명은 연탄가스로 죽었어요. 그 사망자의 따지자면, 원자력의 수십-수백배 될걸요. 석탄발전은 수 많은 미세먼지와 오염물질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지요. 대표적인게 런던의 스모그로 엄청난 인명이 사망했어요.
3. 원자력이 대형사고를 일으키면, 광범위한 환경 파괴와 복구가 최소 수십년 걸린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영토는 좁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지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에너지 소비를 만족시키는 충분한 에너지 생산, 탄소발생을 최소화하는 에너지 생산, 낮은 발전단가로 인한 국가 산업경쟁력 확보 등등 여러가지 면에서 원자력을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4. 물질주의자들인 과학자들이 원자력 안전성을 더욱 높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교회에서 일년에 일으키는 범죄율보다 훨씬 안전한 원자력발전을 만들테니까요.
리플달기
1 4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