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김명섭 목사의 말씀학교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 계시록 22장 1절~4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3년 07월 11일 (화) 22:30:42 [조회수 : 3004]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 계시록 22장 1절~4절

 

 

1. 생명수의 강

 

① (1절~2절)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요한계시록의 최종적인 비전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성도이듯,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모형이나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성도들의 영광이다. 그들은 말씀대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의의 최후승리를 거둔 십자가와 부활에 참예한 산증인들이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비전을 바라본다. 사도 요한이 바라본 생명수의 강을 선지자 에스겔도 보았다. 에스겔은 생명수의 강에 관해 더 자세히 증거 한다. 에스겔 47장은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생명의 강을 이루고 바다를 살리고, 토지와 만물에 생명을 공급하는 장엄한 비전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② (겔 47:1~2)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 사도 요한은 그 물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서 흐르는 것을 보았다. 에스겔은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생명수의 강이 ‘성소 문지방 밑에서’ 솟아났다고 증거 한다. 또 ‘물이 제단 남편으로 흘러서’라고 더 세밀하게 묘사한다. 제단은 재물의 피를 뿌리고 태우는 의식을 행하던 성소 중앙에 위치한 번제단이다. 성소 문지방에서 나온 물이 번제단에 뿌려진 피와 함께 흘러서 보혈의 강을 이루는 광경이다. 에스겔이 본 번제단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표 한다. 마치 영화 벤허에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강물처럼 흘러서 나병에 걸린 어머니와 딸이 치유되는 장면과도 같다. 생명수의 강은 보혈의 강이요 은혜의 강이다. 이 광경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복음 중에 하나인 어린 양의 흘리신 보혈로 세상의 모든 죄를 씻기신 대속의 복음을 증거 한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우리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주의 은혜가 우리의 죄악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단 하나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회개치 않는 죄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되는 까닭이다.

 

③ (겔 47:5)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 그 물을 일 천척씩 척량한 후에 발목, 무릎, 허리에 차고 마침내 그 물이 창일하여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으로 변하는 장엄한 광경을 전한다.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본질, 다시 말해 진정한 경배는 하나님 앞에서 내 힘과 경험, 내 생각과 판단 즉 교만을 내려놓은 자기를 부인하는 행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안 믿는다거나 내 방식대로 믿겠다는 건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내 힘과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내 키를 넘는 물에서 수영실력이 필요하듯,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문제와 위기의 순간에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는 순간이 진정한 종교가 시작되는 자리다. 존 웨슬리의 회심과 로버트 하디의 회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진정한 회개 없는, 기념 성회가 한낱 쇼에 불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만물을 소성하기 위하여

 

➀ (겔 47:6~8)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바다의 물까지 새롭게 한다. 아라바로 내려가서 이르는 바다는 일명 죽음의 바다로 부르는 ‘사해(死海, Dead Sea)’다. 성소에서 흐르는 물이 죽음을 살리는 생명의 강이 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이라(요 7: 37~39)” 인가의 탐욕을 상징하는 배는 육체의 소욕을 뜻하고,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성령의 소욕을 뜻한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반비례한다. 만물이 물로 소성하듯 사람은 말씀 곧 성령으로 소성케 된다.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 4:14)” 우물가의 여인에게 남편은 그녀가 지금까지 섬겨왔던 그릇된 예배의 대상을 가리키는 은유다.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밝히는데 있다. 생명 곧 삶은 어디서 오나?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에서 삶이 나온다. 진정한 예배에서 삶이 나온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 1:2)”

 

② (겔 47:9~12)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 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선지자 에스겔과 사도 요한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성소로부터 나온 물이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며 생명을 공급하는 장엄한 비전을 통해 생명(Life, 삶)이 성소로부터 흘러나옴을 증거 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Our Planet)’는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가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발하면서 해양, 밀림, 극지방 같이 인간이 손이 닿지 않는 오지를 가리켜서 성소(Sanctuary, 성소)라고 호칭한다. 나아가서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인 성소를 비워두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소의 보존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까닭이다. 생명은 성소에서 나온다.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고 최종결재권을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다. 이는 성경이 전하는 시종여일한 메시지와 일치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말씀대로 준행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시고 마침내 축복하신다.

 

 

3. 이가봇 vs 임마누엘

 

① (3절~4절)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과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다시 저주가 사라진 이유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삼대칠중재앙의 저주가 온 세상에 임한 이유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옛 성전과 옛 도성의 파괴와 멸망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심, 이가봇(אִיכָבוֹד, Ichabod, 겔 8:6, 삼상 4:21)이다. 이와 반대로 새 성전과 새 도성의 회복과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준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심, 여호와 삼마(겔 43:4)다. 출애굽기와 에스겔의 대망이 경외와 준행, 동행과 축복이듯 요한계시록의 대망도 경외와 준행, 동행과 축복이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경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עִמָּנוּאֵל, Immanuel)’의 영광이다.

 

②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 본문은 사도 요한의 동일 저작인 요한복음의 서두와 일맥상통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1~4)”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도 어둠을 밝히는 빛,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는 사실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을 통과시키는 반사체라는 것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빛나는 영광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 8:18~21)”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탐욕의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의 거듭남이다.

▶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본문이 전하는 뜻은 이미 계시록 20장에서 살펴본 대로 세상의 왕들이 누리는 세속적인 부와 권력, 힘과 명예가 아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보화(막 10:17)’가 금은보화가 아니듯,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것은 세속적인 부요와 권세를 누리는 보상이 아니다. 이는 앞서 살펴 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성곽과 기초석인 벽옥 같은 믿음과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빛나는 보석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의 변화를 뜻한다. 이는 거듭남과 ‘성화(聖化, Sanctification)’를 통해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영화(榮化, Gloryfication)’를 가리킨다. 천국 백성이 지상에서 천상에 속한 자로 사는 사람이듯,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본문이 전하는 본래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주님이 다스리는 삶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을 증거 한다.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라는 난해한 구절은,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가의 노랫말과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다.

김명섭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92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