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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
이현석목사  |  trm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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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7월 11일 (화) 09:21:12 [조회수 : 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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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앙으로 동성애 이슈 보기」(국민일보 2023/06/07)와 「동성애와 성경, 그리고 “중보 종교”와 나치 이데올로기」( 당당뉴스 2023/07/06)을 읽고, 작성하였다.

 

1. 전이해

 

1) “신앙의 진리”와 “과학의 결론”은 일치해야 하는가? 13세기, “신앙의 진리”와 “과학의 결론”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카톨릭의 입장이었다. 14세기의 영국의 오컴(윌리엄스)은, 두가지가 충돌할 경우, ‘둘 모두 참’이라고 하는, 이중진리론을 주장했다. 오컴은 교황 재판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4년간 아비뇽에 유폐되었고, 바이에른 황제의 도움을 얻어, 독일로 도망하였다. 15세기의 루터는, 오컴을 “나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이후, 종교개혁가들이 강조한 “이성”의 의미는, “신앙”과 “과학”을 분리한 것이다.

 

2) 무더운 여름날, 울타리를 넘어 나비와 나방이 내 집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나에게 소리쳤다. “나방을 잡아요!” 나는 파리채를 세게 휘둘렀다. 아내는 다시 나에게 소리쳤다. “나방을 잡으라고 했지, 누가 나비를 잡으라고 했어요?” (K의 나비와 나방)

K가 만약, 프랑스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무더운 날의 소동은 없었다. 프랑스어는 나비와 나방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3) 소쉬르의 이론을 빗대어 말하면, 기의와 기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동성애”라는 단어가, 누구에게는 나방이고, 누구에게는 나비이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방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통용되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 방식을 몇가지만 정리해 보자.

첫째, 철학적 언어로 이해한다. 동성애와 이성애를 각자 개인의 자유 문제로 본다.

둘째, 심리적 언어로 이해한다. 흔히 말하는 “마음”의 문제이다.

셋째, 윤리적 언어로 이해한다. 개인의 선택은 존중되거나, 방종이나 타락으로 받아들여진다.

 

4) 동성애를 대하는 한국교회의 태도는, 다음의 기준으로 환기할 필요가 있다.

①동성애자인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②동성애는 다른 사람과 행위로 옮길 때에, 죄로 간주된다. ③무디신학교의 크리스토퍼 유안(Christopher Yuan)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한 삶은 유혹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을 이성애자로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는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있다.”

 

5) 위에 언급한 세가지 방식- 철학, 심리학, 윤리학은 하나의 예시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성”과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동성애를 철학, 심리학, 윤리학으로 다루게 되면, 찬성과 반대가 존재한다.

 

6) 동성애란 어휘는 1869년 독일어, 1892년 영어로 각각 처음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동성애는 19세기에 개념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동성애’ 혹은 ‘동성간의 성행위’는 19세기 이전의 인간사회에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동성간의 사랑은 인정되었지만, 결혼은 이성간의 결합이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동성애’가 존재하고, ‘동성커플’도 존재한다. 하지만 번식은 각자 따로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동성간의 ‘삽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모라고 알려진 흰둥가리는, 트랜스젠더 물고기이다. 암컷이 사라지면 힘센 수컷이 암컷이 된다.

따라서, ‘동성애’를 논함에 있어서, ‘창조질서’에 대한 예단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구의 생태환경에서 관찰되는) 암수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수학의 집합론’만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7) 동성애를 발생시키는 단일유전자가 없다는 말은, 동성애의 선천성을 부정하는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근거로 작용한다. 이런 문제는 목사들이 논쟁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해당 전공자에게 확인하면 된다.

 

2. 새로운 이해.

Ⓐ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

Ⓑ 박테리아(세균)는 뇌가 없지만,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스스로 선택한다. 박테리아는 지능이 있는가?

Ⓒ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달리 대사활동이 없지만, 우리 몸에 붙으면, 어떤 세포의 주인노릇을 한다. 내 신체의 커멘더는 내 생각과 의지가 아니다.

 

1) 박쥐는 음파로 세상을 인식하고, 뱀은 적외선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대상의 인식은 우리 주관 구성에 의해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칸트이고, 철학의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2) 말할 수 없는데 생각할 수 있을까?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이렇듯 지능은 언어를 기반한다. 그러면, 박테리아의 지능은 어떻게 작동될까? 언어 대신 신호를 사용한다. 그 신호의 기반은 신경회로이다.

 

3) 아날로그 반도체는 자연계의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전환했다.

 

4) 세포와 세포, 유전자와 유전자는, 단절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매커니즘이다. 인간은 동물의 언어와 박테이아의 언어를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동물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면, 모든 “육식”은 “개고기 논쟁”을 닮아갈 것이다.

또, 인간이 ‘인간의 몸안’에 ‘명령어 enter’가 가능하다면, 면역세포에게 ‘암세포를 공격하라’ 고 ‘명령어 enter’를 칠 것이다. 생명과학은 실제 이런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 ‘유전자가위’가 그 예이다.

 

5)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

① 기계가 고통을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의 육체는 그런 어떤 하나의 기계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어쨌든 그런 기계에 가장 가깝기는 하다.

② 그러나 좌우간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 ― 이는 경험 명제인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사람 및 그와 비슷한 것에 대해서만, 그것은 생각한다고 말한다.

③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들어 있는 어려움의 핵심은 […] ‘기계가 생각한다(지각한다, 원한다)’는 말이 어쩐지 불합리해 보인다는 것에 있다.

위의 ①②③은 [네이버 지식백과]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해제), 2004., 신상규)를 요약, 재인용하였다.

 

3. 제프린 힌턴은 인공지능에 매우 기념비적인 인물인데,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나는 그의 우려를 이렇게 해석한다.

①인간은, ‘짜증나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②기계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또는, 기계는 (인간에게) 짜증을 낼수 있을까?

③짜증에 대하여, 기계는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성적지향”은 “선택회로”보다는 “생존회로”에 더 가까워 보인다. 또, “짜증”과 “혐오”도 “선택회로”보다는 “생존회로”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기계가 인간과 같다면, 인공지능은 매우 위험하다. 기계가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데, 기계가 기계를 사랑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실상은 同性愛도 위험하고, 異性愛도 위험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은 성경으로 되돌아간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4. 과거 식민지배를 받은 영연방 원주민 지도자들이, 찰스 3세에 “식민지배 사과·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은 왜, 성소수자와 원주민에 대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할까?

美中패권전쟁의 이면은 ‘이념’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의 아버지 앨런 튜링, 챗GPT의 아버지 샘 알트먼, 애플 CEO 팀쿡, 이들의 공통점은 Gay이다.

2차세계대전中 영국에 귀국하려는 튜링에게 노이만은 미국에 머물 것을 권유했다. 영국에 가면 처벌받기 때문이다. 튜링은 애국심을 가지고, 영국에 되돌아갔다. 튜링은 그의 바램대로 영국민을 구했지만, 자기 목숨은 잃었다. 우리는 이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

 

20년뒤 한국교회가 어떻게 변할지는 대략 정해졌다. 목사님, 장로님 자녀들이 英美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한국교회로 컴백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이다. 한국교회처럼 처벌하면, 미국교회보다 ‘더 심하게’ 분열될 것이다. ‘분열의 다른 이름’은 다수에 의한 소수의 처벌이다. 처벌을 다르게 보면 ‘박해’이다.

적어도, 목회자를 “동성애 찬반문제”로 처벌하지 않는 전통을 세우는 것이, 교계 지도자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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