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리교평화선교회가 19일 오전 감신대 부설 한민족연구소 회의실에서 정태준 박사를 초청해 평화포럼을 개최했다.

지난 19일 서대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부설 한민족연구소 회의실에서 감리교평화선교회(Methodist Peace Mission)가 주최한 평화포럼이 진행됐다.

포럼을 주최한 감리교평화선교회(Methodist Peace Mission. 이사장 김문철 목사)는 1987년, 북한교회재건(서부연회)과 민족의 평화와 통일 실현을 목적으로 ‘북한선교회’라는 명칭으로 창립하여 1989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8회 총회 제 5차 총회실행부위원회에서 공식 선교기관으로 인준받은 통일운동 기관이다. 이후 <한민족통일선교회><한민족교류협력재단> <남북교류협력행동> 등으로 단체명을 개칭하다가 2023년 <감리교평화선교회>로 변경했다.

이사장 김문철 목사는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을 얻자마자 분단을 강제당한 지 70여 년을 훌쩍 넘긴 세월 동안 한반도, 한민족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난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설상가상 처처에 전쟁 소문이 그칠 날 없는 국제정세와 하루가 멀다하고 위기에 맞닥뜨리는 동북아의 지정학적 환경은 한반도 미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면서 “하여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심정으로 겨레의 공존과 공영을 정착시킴으로써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는 길을 마련했다”고 포럼을 개최한 이유를 밝혔다.

포럼에 초청된 강사는 통일운동가 정태준 목사이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Garrett신학대학교에서 평화-통일을 주제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평화-통일 운동에 투신하여 KNCC 평화통일위원, <’93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남북인간띠잇기대회> 조직동원국장, <’95세계감리교서울희년대회> 사무총장,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동경회의> 감리교 대표, <한민족통일선교회, 한민족교류협력재단>사무총장, 남북교류협력행동 대표로 일했다. 인도 지원 사업을 하는 한편 네 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방북대표단들의 이산가족 상봉과 고향방문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33년간 몸담은 통일운동 현장에서 물러난 후 ‘브런치’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강연 / 정태준 박사

정 박사는 ‘겨레여 평화여!’를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서 남과 북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을 주문했다. 같은 민족이니 통일이니 찾지 말고 “이제까지의 관계 방식을 그만 버리고 새로운 관계 방식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며 “휴전선을 국경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고 왕래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각각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것이다.

통일운동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정 박사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의 복잡한 세계정세, 특히 미국과 소련이 각자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 한반도에서 어떤 짓을 벌였는지, 그리고 이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비사를 꺼내거나 익히 알았더라도 어떤 배경과 노림수가 담겼는지 그 속살을 드러내 보이며 입담 좋게 풀어냈다.

6.25전쟁마저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정도로만 이해했던 참극의 배경에 미국은 왜 참전해야만 했으며 소련은 북에서 어떤 음모를 꾸몄는지 신탁 반탁을 거꾸로 보도한 **일보의 가짜뉴스 하나가 이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지 그 여파를 알고나니 당장에라도 광화문으로 달려가 그 신문사 대문을 걷어차고 싶어지고 패전국 일본이 아닌 한국이 분단된 이유를 알고 나니 열강들을 향한 분노보단 힘없는 나라의 설움에 목이 메인다.

결국 분단되었으나 이제 통일은 우리가 어쩐다고 될 일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는 대목 역시 그랬다. 왜 우리는 주체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는 장기판의 졸과 같은 현실일까. 무슨무슨 선언, 선포 성명을 남북이 공동으로 내고 햇볕정책이니 통일대박론이니 판문점 선언이니 하노이 회담이니 냉온탕을 뛰어다녔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왜 마치 희망을 꼭꼭 숨기는 판도라 항아리처럼 열릴만 하면 더 오므라지는지 누가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현실에는 마치 우리를 갖고 놀 듯 뒤에서 훼방놓는 ‘친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 친구는 왜 농간을 부리는 것일까?

아쉬움과 설움이 뒤섞인 한 시간여 짧은 강연임에도 정박사의 문학적인 구술로 드러나는 통찰력은 잘 짜여진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듯 딱 떨어지는 맛을 느끼게 했다. 드문드문 등에 칼 꽂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덤이다.

그가 자신의 저서 제목으로 삼기도 했던 ‘휴전선-국경선’이라는 슬픈 결론에 이르렀고 33년간의 통일운동 끝에 통일보단 평화를 택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제시했지만 그가 마지막에 언급한 ‘팍스 코리아나’가 그저 신파조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점은 흥미롭다. 정태준 박사가 강사로 서는 다음 평화포럼은 7월 13일 오전 10시 일산 굿모닝교회(이종범 목사)에서다.

당당뉴스는 70페이지 짜리 정태준 박사의 논고 <겨레여 평화여!>를 매주 1회씩 1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글을 시작하며



    138억 년 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모습을 드러낸 채 지금도 가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 어디쯤에 둘레가 4만 km에 이르는 거대한 불덩어리 암석이 출현했다. 그 불덩어리는 가스 폭발, 소행성 충돌, 빙하기 등 웬만한 천문학 지식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조차 없는 치열한 생존 과정을 겪고 생명의 터전으로 탄생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도 아닌 처지에 무량수에 이르는 별들로 수놓은 우주 공간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란 언감생심 하늘의 별따기였다. 눈을 부라린 채 크게 뜨고 찾아야 간신히 시선이 닿는 점 하나. 나이 45억 살의 지구이다. 그 위에 처음 출현한 인간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생존을 위해서 길을 떠났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늪에 빠지며 허우대던 발길은 어느새 전 지구를 돌아 80억 가까이나 바글거리며 아등바등 살아갈 만큼 가득 채웠다. 어디 80억 인간뿐이랴. 그보다 더 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아옹다옹 살아가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신비가 어디에 있을까. 

   1만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 홍익인간을 국시로 세워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과 한반도를 강역으로 삼고 배달의 나라를 세웠고 여러 나라를 거치는 동안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희로애락의 역사를 일구었다. 성군을 만난 백성들은 희와 락의 역사를 즐겼고 폭군을 피할 수 없던 백성들은 애끊는 삶을 꾸려가야 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랄 때에는 폭정을 바로잡으려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광활했던 강역은 한반도로 쪼그라들었고 무능하고 탐욕에 찌든 군주와 신하들이 나라를 빼앗긴 순간부터 한반도는 강자들의 탐욕의 도구로 이용당하기 시작했고 해방되는 순간 10만 평방킬로미터의 남과 12만 평방킬로미터의 북으로 나누어져 버렸다.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은 각각의 빅 브러더의 배려(?)에 힘입어 각자의 방식과 각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출현한 후 1991년 UN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각각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이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여 통일을 이루기까지 존속하는 ‘특수한 관계’라고 규정했으며 세월이 흘러 2000년에 개최된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마침내 한반도에 1국가 2체제의 나라가 존재해야 함을 합의하고 선언함으로써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룰 때까지는 좌. 우 날개로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고 세계만방에 널리 알렸다. 햇볕정책이 쏟아낸 따사로운 햇살은 분단선을 넘나들며 온 땅과 온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남과 북은 동포라고 얼싸안고 통일을 노래했다. 우리는 하나라고 부르짖으며 백두산과 한라산, 한강과 대동강은 서로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억지 맞춤을 했다.    

   허나 정권이 바뀌자 햇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고 가던 훈풍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전에 살을 에는 삭풍으로 변해버렸다. 해원 하지 못한 한恨은 하릴없이 철조망 사이로 드나들고 있으며 서로 껴안다가 할퀴기를 반복하는 혼돈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니 그 후유증은 오롯이 국민들이 감내해야 했다. 허리에 칭칭 감겨있는 철조망은 점점 더 옥죄이고 있고 목놓아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가고 있는 중에 남과 북은 어느 사이 샴쌍둥이가 되어 있었다. 설상가상 대륙세력 land power, 중국과 해양세력 sea power, 미국이 패권 경쟁을 하면서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현실은 두 개의 코리아가 윈윈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코리아로 되는 것을 가로막는 강고한 벽이 되어 있었다.    

   혹자는 한반도 문제는 결코 풀 수 없고 그저 관리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전 지구적으로는 한반도 문제 말고도 더한 관심이 요구되는 시급한 문제들이 널려 있단다. 염장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하는 말이지만 바로 그 땅 위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두 코리안들로서는 명치끝에 고구마 몇 개가 박혀있는 느낌이 아닐 수 없다. 그냥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남과 북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니 통일해야 한다는 등 허공을 맴도는 소리는 이제 그만 멈추고 솔직해져야 할 때다. 시쳇말로 등 따시고 배부른 일상을 누리기 위하여 남과 북은 이제까지의 관계 방식을 그만 버리고 새로운 관계 방식을 열어야 한다. 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 두 개의 코리아의 앞날을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이다. 국가 지도자도, 국민들도 주변 나라들에게 의존하거나 시달리는 대신 자주적인 태도와 힘을 길러야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천심은 모양을 갖추어 현실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남과 북 모두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에 빠져들지 모른다. 한반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 해대며 비아냥거리는 어리석음을 그만 멈추고 각자가 건강한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시도이다.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당찬 도전이다. 

   하여 남과 북은 샴쌍둥이처럼 건강하지 못한 채 비실거리는 대신 과감히 둘로 나누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장구한 세월 동안 치유하기 힘든 생채기를 낸 휴전선을 국경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고 왕래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각각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지금은 남과 북이 통일하자고 헛심 쓰는 대신 서로 갈라져 각자도생 하며 살아가는 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고 남과 북의 8천만 국민이 보다 평안한 삶을 기대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이다.       
   역사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변화의 연속이 이어질 뿐이니 대한민국이 세상의 중심축 Axis Mundi을 이루는 팍스 코리아나 Pax Koreana 시대를 살고 싶다.

Ⅰ부  분단 한반도 속살 들여다보기


    욱일기를 휘날리며 끝 모르게 승천하던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방으로 속절없이 무너지자 40년간의 식민통치는 막을 내렸다. 일본은 분할 점령당하고 한국은 해방되어 독립되는 일만 남았다. 여러 모양으로 끌려간 30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은 한 서린 일본 땅에서 겪은 서럽고 서러웠던 삶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기 위해 하나둘 귀국길에 올랐다. 피눈물을 흘리며 떠났던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이제는 글자 그대로 말 그대로 ‘스스로 서는 나라’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대동 단결해야 했다. 번듯한 나라를 세우려는 함성이 한반도 전역에서 울려나게 할 때였다. 그러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마땅한 역할을 해야 했던 국내 지도자들은 외눈박이 주장만 고집하면서 도를 넘는 권력 탐욕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강자들의 속셈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불길한 느낌은 현실로 드러났다. 무슨 영문인지 일본 분할 점령 계획은 틀어졌고 한반도는 두 동강 나버렸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트루먼은 1945년 7월 6일-8월 1일, 독일 포츠담에서 아틀리에, 스탈린과 자리를 함께하여 회담하던 중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원자폭탄 성공으로 미국의 시간이 오래갈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소련과의 경쟁적 협력 관계도 루스벨트가 주장한 탁치 정책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소련과 공동으로 일본을 점령하기로 한 약속을 즉시 폐기해버렸다. ‘내 밥그릇에 손대지 마!’ 말인즉 미국은 다른 승전국들을 물리치고 통째로 일본을 삼키겠다는 의미였다. 원자폭탄으로 일본 항복을 받아냈고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스스로 원탑이라 생각하니 파이를 다른 나라들과 나누어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미국에게는 대서양 못지않게 태평양도 중요한 전략지였다. 소련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은 곧 미국 대륙으로의 진출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환경에서 일본은 풍부한 군수물자 생산 인프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마당 태평양을 수호하는 완충지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은 따라서 태평양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4년 간이나 치고 박고 싸웠던 주적 일본을 이제는 동지로 삼아야 했으니 일본을 공동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한 포츠담 선언을 망설이지 않고 내팽개쳐버렸다. 일본 열도에 소련 군대가 들어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소련도 만만찮았다. 일본 본토 공동 점령 계획은 틀어졌지만 아직 한반도가 남아있었다. 극동 교두보를 한반도에서 확보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수모를 겪은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탄생한 후에도 단 한순간도 일본에 대한 보복을 기억 속에서 지우지 않았다. 사실 미국이 자국군의 손실이 너무 클 것을 염려해서 이미 소련에게 참전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물론 유럽에서 독일과 치열한 싸움을 치르느라 너덜너덜해져 버린 군사력으로 태평양전쟁에까지 참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핵폭탄으로 파멸 위기에 빠지자 소련은 마침내 치욕을 대갚음해 주고 강제로 넘겨주었던 재산도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8월 9일 새벽 2시, 소련은 일본의 항복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잽싸게 참전했다. 스탈린은 소. 일중립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군 150만 명이 전쟁에 뛰어들어 한반도 북쪽 지역의 일본군을 삽시간에 쓸어버리고 자리를 틀고 앉았다. 

   해방을 누리고 자유를 노래하기도 전에 더 센 놈들이 들이닥쳤다. 미군과 소련군은 어찌하여 해방된 나라, 자유를 얻은 국민을 향해 점령군 완장을 차고 행진했는가? 38도선은 본래는 미국과 소련이 패망한 일본군들로부터 총을 빼앗고 군복을 벗겨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키는 각각의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그어진 것이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이미 서로가 상대방의 속내를 알아차렸으니 상대의 속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방어벽이며 동시에 자신의 속내를 더 멀리 더 넓게 펼치려는 보호막이었다. 극동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소련이나 이들의 확장을 막고 자신들의 야망을 팽창하기 위한 전략 요충지가 필요한 미국에게 한반도는 충분한 가치가 있던 전초였다. 온전히 차지할 수 없다면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38도선은 신흥 강자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상징이자 공산주의 진영과 자유. 자본주의 진영이 서로 견제하는 엄혹한 국제정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시였다. 그다지 챙겨 먹을 것 없는 한반도였지만 전 지구적으로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려는 제국주의적 탐욕의 도구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해방된 한반도는 두 동강났는데 일본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범 국가 일본은 어찌하여 또 다른 전범 국가 독일처럼 조각내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일본 군대의 최정점에서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진 천황은 어찌하여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버젓한가? 허나 긴 세월 식민 생활로 응어리진 한을 뿌리 뽑는 것으로도 모자랄 판에 해방되자마자 독립 국민이 되기는커녕 두 동강 난 채 군사통치 아래 두려워서 떨고 분해서 몸부림치는 한국민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 때문에 해방의 환희로 벅찬 한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가?
   해방은 백일몽이었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로구나!   

제1장  팍스 아메리카나 대 팍스 소비에티카

1.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
 
     활활 타오르던 총구는 사그라들었고 마침내 싸움은 끝났다. 승자와 패자가 확정되었다. 누가 강자이고 약자는 누구인지도 드러났다. 패자는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야 했고 약자는 힘을 빼고 억지로라도 겸손한 척해야 했다. 미국과 소련이 신흥 강자로 무대에 등장했다. 살판나는 것은 바로 미국과 소련 뿐이었다. 기왕의 강자들은 쓸쓸한 석양처럼 뉘엿뉘엿 어둠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으니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나 그에 필적할만한 프랑스도 미국 앞에서는 명함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국제정치 무대는 미국과 소련 두 강자를 중심으로 새판 짜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같은 편이 되어 공공의 적들을 물리친 미국과 소련은 언제 동지였느냐는 듯 순식간에 갈라섰다. 국제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듯이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이제부터 미국의 주적은 독일이나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주적은 미국이다. 권력은 나누면 나눌수록 속앓이는 더 커지고 탐욕은 혼자 먹을수록 더 짜릿하다. 온 세상이 먹잇감이 되었으니 집어삼키는 일만 남았다. 해방된 한반도 역시 미국과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얄궂은 운명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제는 온 세계가 걱정이 가득한 채 두 ‘팍스’의 치열한 싸움을 관망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미국이 선수를 쳤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44년 7월 1일 미국은 44개 연합국 대표들과 그들의 식민지에서 온 730명의 대표단을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우즈 스키 휴양지에 있는 마운트 워싱턴 호텔로 불러 모았다. 세계전쟁 후의 국제정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2차 대전 이전까지 제국주의 나라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제안 내용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자유무역이라는 이름하에 세계의 모든 나라는 미국 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능력껏 재주껏 미국 시장에 와서 자유롭게 장사해서 이익을 챙겨도 좋다.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적으로 오직 미국만이 소비와 자본 운용이 유일한 시장이었다. 

   둘째 이에 따라 모든 해상 무역로를 미국이 보호해주겠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 체제에 동참하는 나라는 예외 없이 무조건 소련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하는 순간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소련 공산 세력의 확장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허허실실 전략이었다. 경제 방식을 내세운 패권 팽창 전략이었다. 당근과 채찍 전법이었다. 먼저 미국 시장 개방이라는 당근을 무상으로 내놓았고 그럼에도 먹지 않은 나라들은 미국의 보호 우산에서 추방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제안은 법적 제도와 규정들에 의해 보장되었다. 국제통화기금 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을 창설했고 영국의 파운드를 밀어내고 달러를 기축통화 key currency로 정했으며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고정환율 제도를 실시하되 회원국은 상하 1%의 범위에서 환율을 바꿀 수 있으며,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IMF의 승인하에 상하 10% 내외의 변동을 허용받을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이로써 명실공히 전후 국제 정치판에서 자유무역시대가 열렸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제우스의 벼락 지팡이, 원자폭탄을 손에 쥐었으니 패권 전략은 바야흐로 날개를 달았고 눈 코 뜰 새 없이 분주해졌다.    

   미국의 행보를 그냥 두고 볼 소련이 아니었다. 동토의 나라 소련의 제일의 국정과제는 부동항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강국의 힘을 유지하고 펼치기가 쉽지 않았으니 흑해 인근의 터키와 그리스를 차지하려 시도했고 공산세력을 확장하기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으며 동구권 나라들에게 경제원조를 행하면서 세력권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본주의.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공산주의 간 이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형식의 패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신흥 강자들은 전 지구적으로 냉전冷戰. cold war이라고 이름 붙인 싸움 같지 않은 싸움, 야비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싸움을 시작했고 그들의 패권 경쟁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 해방된 한반도는 한순간에 진검승부를 벌이는 냉전장冷戰場. cold war field으로 바뀌어버렸다. 

<2편에 계속>

▲ 사회 / 최효석 이사

▲ 기도 / 이경덕 목사

▲ 인사 / 김문철 이사장

▲ 강연 / 정태준 박사

▲ 강연 / 정태준 박사

▲ 강연 / 정태준 박사

▲ 마침기도 / 강승진 목사(전 서울연회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