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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들 그리고 나와의 경계 사이
윤혜주  |  만나 상담실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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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6월 02일 (금) 17:59:38
최종편집 : 2023년 06월 03일 (토) 20:12:50 [조회수 :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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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청탁의 무거운 짐

오랜만에 원고청탁을 받고 글을 쓰게 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처음 청탁을 받았을 땐 ‘치유’라는 단어에 사명감을 갖고 ‘그래, 내 이야기를 나눠보자 나 같은 사람들에게 내가 받았던 감동과 희망을 나누는 것이 치유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이야기가 과연 치유가 될까’라는 걱정과 염려가 엄습해왔다. 그러고 나선 내가 석사와 박사과정 동안 작성했던 수업 시간의 페이퍼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많은 글과 책을 읽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중 기억나는 몇 편의 글을 떠올리며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Part1 엄마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우울했던 학창 시절

학부 시절 시험 점수에 맞춰 들어갔던 대학교에서 나도 처음 들어보던 심리학을 전공하게 되었던 시절은 내가 기억도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늘 흑백으로 떠오른다. 나는 고3 때까지 엄마의 계획대로 피아노를 전공할 목적으로 열심히 실기 레슨을 받았었다. 그러던 중 레슨 선생님으로부터 계속 듣게 되었던 질타의 말은 나를 자존감이 없는 아이로 만들어가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도저히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용기가 나지 않아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피아노를 관두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엄마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그 선생님으로 받았던 모멸감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등에 대해 물어주시기보다는 본인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큰딸에 대한 속상함으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 버리셨다. 그 뒤로 나에겐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늘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과 돌봄으로 양육을 받았다고 기억했었는데(어쩌면 이 이 기억도 엄마가 나에게 주입해준 것일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 기억이 밝은 느낌이 아닌 무채색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기감이 충만했던 엄마

나에게는 이제 팔십 중반이 된 친정엄마가 계시다. 젊은 시절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와 명문대 성악과를 나왔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자기감이 충만했던 엄마는 이제 약간의 치매와 함께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다. 이런 요즘 엄마의 모습은 나에겐 참 낯설어 화가 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부모의 큰 기대와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나의 계획이 아닌 부모님의 계획으로 내 삶의 계획이 짜여졌다.

명문대 음대를 졸업하신 후 사립학교 음악 교사를 하시던 어머니는 그 학교 설립자의 아들인 교감 선생님과 결혼하시고 바로 첫째인 나를 낳으셨다. 60년대 신혼생활을 시작하신 우리 부모님은 비교적 부유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자기애성 성향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오셨다. 난 이런 엄마가 늘 무섭고 어려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그런 방법으로 본인을 지켜내려고 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마음에 드는 딸로 살다

그러다 보니 자녀 교육도 본인의 계획과 생각으로 하셨고 이런 부모 밑에서 나는 늘 부모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나’란 존재감은 일찌감치 없고 엄마의 ‘자랑스러운’ 또는 엄마의 ‘마음에 드는’ 딸로 헐떡이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엄마나 아빠에게 인정받는 딸로 살기 위해 ‘착한 딸’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생들도 잘 챙기고 학교에서도 아버지가 교육자인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모범생으로 살아가느라 늘 양보와 배려가 몸에 밴 아이였다.

하지만 늘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딸이라 생각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못마땅하게 평가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의 이런 자기애성 성격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의 올바른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긴 것 같다. 때가 되면 자녀와 부모의 분리가 이루어져 온전한 자아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경우 자신의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되고 아이의 실수가 엄마의 실수인 것처럼 이어져 지속적인 부모의 간섭이 이어지고 자녀 또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상태가 된다.

 

엄마는 더 이상 나의 CCTV가 아니다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성과 완벽한 대상 이미지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건강한 자존감을 세워나가는 것이 치료 방법이라는 것을 상담을 공부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공감을 통한 자존감 세우기 작업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인해 나의 어린 시절은 무채색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그랬던 나의 엄마는 더 이상 나를 감시하는 ‘CCTV의 엄마’도 아니고 ‘거미 엄마’처럼 나의 목을 조이는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 요샌 내 옆에서 나를 본인의 보호자로 여기며 내 눈치를 보고 계신 엄마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젠 내가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해놓고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며 모니터 속에 비쳐진 엄마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워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 이제 엄마는 더 이상 자기를 포장하거나 지켜내기 위한 방어기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일까?

 

Part2 아들

초등학교 때 등교 거부하던 아들

우리 집 막내아들은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첫날부터 등교 거부를 하더니 급기야는 자기 혀를 깨물어 곪아 터질 때까지 강박적 틱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도 집중력이 떨어져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늘 분주함을 보였다.

나는 일단 혀를 문드러질 정도로 깨물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소아과를 거쳐 소아정신과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ADHD의 경계선에 있는 아들에게 약을 먹여보라는 처방을 듣고 하염없이 울면서 병원을 빠져나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제 이 아들은 작년에 대학을 갔고 지금은 그 대학의 전공이 맞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다면서 휴학을 하고 알바와 작곡을 하며 지내고 있다.

 

나와 너가 만들어내는 다름의 공간

얼마 전 신검을 받고 돌아오는 아들과 오랜만에 대화를 했다. 학교의 복학을 바라는 엄마와 자기 전공보다는 음악이 좋아서 복학을 미뤄보겠다는 아이의 대화는 여전히 순탄치 않았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그렇게 시달리며 내가 없이 살아온 것이 힘들었던 나는 여전히 우리 아들에게 우리 엄마가 했듯이 또 그렇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나와 너’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다름의 공간이 생기는 것을 어떡하든 메꾸려고 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음을 본다. 그 공간을 메꿔서 없애는 것이 아닌 ‘너와 내’가 만들어 내는 창조의 공간이자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마음껏 ‘자기’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도 또 얼마의 훈습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

 

나와 아들의 어쩔 수 없는 갭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리고 공동의 풀(pool)이 있는 그곳에서 우리 아이가 생각하고 창조하고 놀아가면서 ‘자기’를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 그래서 비록 나의 아들이지만 나와 다른 그를 인정해줘야 하는데 아직도 이 엄마는 그곳이 창조의 공간이 아닌 나락으로 떨어지는 갭이라는 두려움에 그 구멍을 덮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진정한 대화를 이제 성인이 된 아들과 나누고 싶은데 오늘도 나는 아들과 대화를 빙자해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테러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끝없는 자기 성찰을 해본다.

 

치유는 자기와 타자의 거룩한 온전함 가운데 일어나는 것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나?’ ‘이게 그분의 음성인가?’ ‘내가 혹시 방어의 기제로 상황을 도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은 혼돈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치유가 육체적 치료가 아니고 자기와 타자의 거룩한 온전함 즉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그리고 소원과의 조화를 회복해가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라는 목회 상담학자 파멜라 쿠퍼 화이트의 말처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의 하나님을 통해 오늘도 나는 나눔의 지혜를 알아간다.

 

   
윤혜주

 

 

 

 

 

 

 

 

 

 

 

 

 

 

 

<이 기사는 계간 ‘치유’ 에 실렸습니다>

https://blog.naver.com/yunhichoi1/22308213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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