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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땅은 어디인가?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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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5월 29일 (월) 01:14:43 [조회수 : 3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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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머무는 동안 틈 날 때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 기념관을 찾아가 머물렀다. 어디에나 그곳의 역사와 전시된 유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안내인들이 있었다. 전시된 유물 하나하나는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었다. 역사는 기억하려는 이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펜실바니아 주에 있는 게티스버그 미국 전쟁 박물관은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게티스버그 인근에서 벌어진 참혹했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 짧은 기간 동안 팔 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전투에서 승리한 북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박물관에는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초등학생들은 곳곳에 모여 자원봉사자들의 설명을 들으며 메모를 하고 있었고, 이미 관람을 끝낸 듯한 중고등학생들은 기념품을 사기 위해 바글거렸다. 노인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전시물을 둘러보며 두런두런 소감들을 나누기도 했다. 다양한 세대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전시물 가운데 노예를 경매한다는 광고문 앞에 한참 머물렀다. 부동산을 사고 파는 것처럼 팔리는 사람들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이름, 나이, 가격까지 매겨진 광고판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들의 존재와 운명에 대해 숙고했다. 나이 대에 따라 값이 달랐다. 1살짜리 아기의 이름을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외침이 우렁우렁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은 면화산업이 발달하여 노예 노동에 의존하던 남부와 경제구조가 다른 북부 가 노예 해방 문제를 두고 벌어졌다. 1852년에 발간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아프리카계 미국 노예들의 비참한 실상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포하자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전쟁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시실 벽면에 적힌 제퍼슨의 연설문 한 구절은 인간이 진리를 따르기보다 자기 이익을 진리로 둔갑시킨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대의가 정당하고 거룩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류 앞에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제발 우리를 내버려두어 달라는 것이다.”

그는 노예 소유를 ‘정당하고 거룩하다’고 말했다. ‘정당하다’는 말은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이겠지만 그것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세계관 혹은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뜻이 아닌가? 이것은 어쩌면 지금도 인종주의에 물든 이들 속에서 여전히 맥동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일쑤 자기들의 욕망을 신의 뜻이라는 포장지에 감싸곤 한다. 지배의 욕망, 소유의 욕망을 신의 뜻과 결합시킬 때 의로운 전쟁이라는 프레임이 생성된다. 자기들을 신의 군대로 인식하는 순간 마주 선 이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게티스버그 전투가 끝난 몇 달 후 링컨 대통령은 전몰자들을 추념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앞에서 게티스버그 연설로 알려진 그 유명한 연설을 한다. 불과 266단어에 불과한 연설이었지만 그 속에는 미국이 지향하려 했던 정신이 옹골차게 들어있다. 그는 미국이 자유 속에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선언했다. 자기들이 그곳에 모인 것은 그런 대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어간 이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를 봉헌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미 그 땅을 축성하고 신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은 자들의 과제는 죽어간 이들이 온전히 이루지 못한 과업을 이루기 위해 헌신함으로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거룩이란 신의 현존 앞에 서는 이들이 느끼는 경외심과 분리될 수 없다. 신의 현존 앞에서의 삶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사랑이다. 거룩함을 종교인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한 오용되기 쉽다. 거룩함은 속된 것과의 구별됨을 의미하지만 그 구별됨이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데 활용된다면 그것은 악마의 간계에 불과하다. 사람들을 가르는 분리의 담들이 무너진 자리, 적대감이 스러지고 환대의 정신이 배어드는 장소, 사람들이 함께 만나 축제의 함성을 외칠 수 있는 곳이야말로 신성한 땅이다. 그 땅이 넓어질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  


  92023/05/13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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