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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천년, 그런 왕국은 없다!” 요한계시록 20장1절~6절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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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4월 21일 (금) 17:44:16 [조회수 : 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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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천년, 그런 왕국은 없다!” 요한계시록 20장1절~6절

 

 

1. 균형 잡힌 종말신앙을 위하여

 

▶ 계시록 20장은 이천년 교회사 속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말씀이다. 수많은 이단사설을 배태한 논쟁적인 본문이기에 신중한 해석이 요구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 때에 벌어질 사건들의 구체적인 순서와 정황에 대해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성경이 전하는 것만 제한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 날이 언제인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논란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사실이 있다. 때와 기한, 구체적인 순서는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만은 재론의 여지없이 분명하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 날에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주의 재림’을 멋대로 단정하는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하나님의 권한에 맡기고 열린 결말로 남겨 두는 겸비한 자세가 요구된다. 모든 종말론들이 성경에 근거하는 까닭에 어떤 종말론이 더 성경적인지보다 어떤 종말론이 더 유익한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 속에 등장한 임박한 종말론(전천년왕국설, 비관주의)과 지연된 종말론(후천년왕국설, 낙관주의)의 극단적 오류를 경계하며 균형 잡힌 종말론(무천년왕국설, 현실주의)을 선택하는 이유다. 삶의 유익을 주는 균형 잡힌 종말신앙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내일 주님이 오셔도 부끄럽지 않게 오늘을 사는 깨어있는 삶이다. 마지막을 생각하며 오늘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지혜다.

▶ 이천년 교회사 속에서 출현한 종말론은 천년왕국설과 무천년왕국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천년왕국설은 ‘역사적 전천년왕국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왕국설’로 구분된다. 천년왕국설의 핵심 주장은 주의 재림이 먼저 있고, 이후에 ‘지상에서’ 천년왕국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출현한 역사적 전천년왕국설과 달리 세대주의 전천년왕국설은 18세기에 등장했고 휴거와 이스라엘 민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와 달리 후천년왕국설은 주의 재림을 천년왕국 이후로 주장한다는 대척점에 서 있지만 지상에서 천년왕국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모든 천년왕국설의 공통점은 이 땅에서 천년왕국, 곧 지상천국과 지상낙원을 꿈꾼다는 점이다. 천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주의 재림의 시점을 연대순으로 단정하는 까닭이다.

▶ 무천년왕국설은 말 그대로 ‘천년왕국이 없다’는 주장이다. ‘천년’을 상징적이고 완전한 기간으로 해석한다. 주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왕국’이 시작되었고 주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왕국이 마침내 완성된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은 특정한 때와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고 주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칠년 대환란은 특정한 시점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거듭 반복되고 계속되는 사건들로 해석한다. 무천년왕국설의 대표주자인 어거스틴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도성(De civitas dei)과 세상의 도성(civitas terrena), 예수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와 적그리스도의 통치(regnum diaboli)로 양분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20장도 구속사의 관점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대립 구도를 나타내는 한 장면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으로 크게 양분하는 구속사적 관점은, 초대교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해서 개신교를 태동시킨 루터의 ‘두 왕국설(Two Kingdoms Theory)’과 칼빈, 쯔빙글리 등으로 이어지고, 현대신학의 바르트와 몰트만까지 계승되는 정통신학의 본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설과 무천년왕국설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적그리스도와 예수그리스도

 

① (1절~3절)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 요한계시록은 연속되는 비전을 ‘이 일후에’로 시작하고, 독립된 비전을 ‘또 내가 보매’로 시작한다. 따라서 ‘또 내가 보매’로 시작하는, 20장은 19장에서 연속되는 사건이 아니라 4장에서 19장까지의 모든 계시를 총망라해서 함축시킨 또 하나의 독립된 비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사도요한이 본 심판과 구원의 모든 비전을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는 독립된 삽경(episode)이다. 20장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빛과 어둠의 싸움, 예수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간에 벌어진 영적전쟁의 한 단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에서 왕 노릇하던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마침내 승리하시는 광경을 단 한 장으로 요약한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

▶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본장에 총 6번 언급되는 ‘천년’은 문자적인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기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다른 숫자들도 모두 상징적인 수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 예로 ‘일곱 별, 일곱 금 촛대(계 1:20)’, ‘12지파 일만 이천, 십사만 사천(계 7:4)’, ‘일천이백육십일(계 12:6)’, ‘한때와 두 때와 반 때(계 12:14)’, ‘마흔 두 달(계 13:5)’, ‘육백육십육(계 13:18)’, ‘일천 육백 스다디온(계 14:20)’, ‘일만 이천 스다디온(계 21:16)’ 등이다. 요한계시록이 이처럼 구약의 묵시적 예언의 전통에 따라 은유적인 숫자로 기록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에 이미 벌어졌고 또 장차 미래에 벌어질 모든 사건들을 총망라하기 위함이다. 또한 제한되고 정해진 기간을 특정한 숫자로 적시함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확실하게 증언하기 위해서다.

▶ ‘천년’을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해석 하는 또 다른 근거는, 사도 베드로의 증언에 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사랑하는 자여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지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니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8~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사도 베드로는 임박한 종말론으로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지연된 종말신앙을 경계하면서, ‘곧 오시리라’ 약속하신 주의 재림을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다.

 

 

3. 천년왕국설 VS 무천년왕국설의 역사적 기원

 

① (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 천년왕국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는 본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기인한다. 천년왕국이 임하기 전에 주의 재림이 먼저 있다는 전천년왕국설의 기원은 160년경 몬타누스(Montanu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 활동하던 밀교 사제출신인데 개종해서 기독교신자가 된 뒤 강력한 신비체험과 엄격한 경건과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임박한 종말론을 설파했다. 그는 직통계시로 인근 도시에 새 예루살렘이 세워질 것을 예언하며 수많은 추종자를 모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종말은 오지 않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여호와의 증인, 다미선교회, 신천지 등이 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년)은 천년왕국설을 배척하며 무천년왕국설을 주창했다. 교회사에 따르면 몬타누스의 천년왕국설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금지되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주후 이 천년 동안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약 250년간 이어진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으로 끝났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392년에 이르러 로마제국의 전 지역에서 기독교 외의 모든 다른 이방 종교는 금지되었다. 마침내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삼위일체를 정립되므로 예수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왕으로 인정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사실상 실현되었다. 한마디로 순교자들의 피 값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중세 크리스텐덤을 거치며 서구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를 주전(Before Christ)과 주후(Anno Doimin)로 구분할 만큼 이 땅에 그리스도의 세계가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그렇다면 보좌들에 앉은 자들은 누구이기에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인가? 본문은 끝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순교자들 앞에서 우상숭배를 하며 짐승의 표를 받은 배교자들이 받을 심판을 가리킨다. 앞서 언급한대로 순교자들의 피 값으로 로마제국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로마제국의 황제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순교자들의 신앙이 옳았다고 판가름 난 것으로 간주한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1~42).”

 

 

4.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② (5절~6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 천년왕국설의 또 다른 핵심 쟁점은 부활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다. 부활에 관해서는 그 내용이 심오하고 방대한 까닭에 다음 시간에 따로 깊이 묵상하고 먼저 6절의 마지막 단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이 본문은 전천년왕국설의 아류인 이단사이비 신천지의 핵심교리 가운데 하나로 오용된다. 신천지는 천년왕국이 오면 지상에서 물질적인 보상과 세속적인 영광을 보장 받을 것이라고 미혹한다. 지상에서 천하를 호령하며 호의호식과 만수무강을 누린다는 그들의 주장은, 십사만 사천과 같이 문자주의 해석의 연장선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보상 따위가 아니다. 천년이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듯 제사장이 되어 왕 노릇하는 것은 세속적인 부와 권력, 명예와 영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께서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신 ‘하늘의 보화(막10:17)’가 세상적인 금은보화가 아니듯 천년왕국도 지상낙원처럼 세속적인 부와 권세를 받는 보상이 아니다. 천국 백성이 지상에서 천상에 속한 자로 사는 사람이듯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주님이 다스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본문이 전하는 본래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영원토록 주님이 다스리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을 증거 한다. 매우 난해하고 논쟁적인 본문을 한 줄로 요약하면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의 한 소절과 같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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