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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된 神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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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3월 13일 (월) 14:37:52
최종편집 : 2023년 06월 18일 (일) 06:12:34 [조회수 :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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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 즉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을 사랑하며 살면서 그 사랑으로 그 사람들에게 복음, 새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셨다. 그러다가 때가 이르자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다 지시고 그 죄의 삯,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스스로는 먼지 한 알만큼의 죄도 없어 순백이시지만 세상 사람 모두의 모든 죄를 다 맡아 지심으로 가장 큰 죄인, 대죄인, 중죄인이 되어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형벌로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아들 그러니까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그 육체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어떤 것도 없는 분이셨다. 대단히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그야말로 볼품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셨다.

그런 분이 발가벗겨져 겨우 하체만이 가려진 채 살인범, 강도, 역적 같은 흉악범들의 처형 도구인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고,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에 옆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더하여 머리를 흔들어 대며 남은 구원한다면서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느냐,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지금 당장 그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봐라 라며 조롱했다. 손과 발에 커다란 대못이 박힘으로 살이 뚫리어 찢기고 뼈가 부스러지는 그런 아픔 가운데의 치욕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와 같은 치욕과 육체의 고통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그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와는 함께 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세상 죄를 도맡아 지어 대죄인, 중죄인이 되자 버릴 수밖에 없으셨다.

인간 중에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의 고통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인간들로서는 이해도 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이었다. 그는 이래도 저래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동산에 도착한 예수께서는 데리고 온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기도하라’ 하셨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제자들에게까지 이 같은 말씀을 하셨겠는가.

말씀하시고 조금 더 나아가셔서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지게 되는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받지 않고 지나가게 해 주시라는 기도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면 못 할 일이 없으시다. 예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하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왜 그가 지은 피조물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보내셨는가. 하늘 보좌에서 그것도 낮고 낮은 사람으로까지 만들어 고해와도 같은 이 세상에 보내셨는가. 인간 중 누구 한 사람인들 지체 높은 사람이 노숙자를 위하여 금쪽같은 자기 아들을 노숙자로 만든 일이 있는가. 인간은 아무리 지체가 높다 해도 노숙자와 같은 사람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 같은 엄청난 일을 벌이셨는가. 인류 구원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다. 당사자 아들 예수도 이 같은 사실을 모르지 않으셨다. 그러니 그 큰 고통의 잔을 지나가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너무 잘 알고 계셨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 또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와 육체를 지닌 사람으로 살았기에 그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하는데,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이 겪게 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의 크기로 인한 무게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게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날, 그 처형의 당일, 못 박힌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소리로 외치고는 숨을 거두어 죽으신 것이 아니겠는가. 버림받았기에 ‘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고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그의 아픔은 어땠겠는가.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단절, 그에게 있어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살면서, 그걸 의식도 못한 채 세상과 짝하여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죽음보다도 큰 고통

 

그날, 예수는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전 9시 십자가에 못 박혀 오후 3시에 죽으셨다.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살아 계신 것이다. 그런데 그 6시간의 한 중간 12부터 3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움으로 덮였다. 태양 빛이 가장 강렬하게 내려 쪼여야 하는 시간대에 온 땅이 어두움으로 덮인 것이다. (온 땅이라 하지만 온 세상이 아니라 유대 전역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출이었다고들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랑하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치욕과 고통, 살이 찢기고 뼈가 부스러지는 고통, 그리고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당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 당신에게로 그대로 전해져 그렇게 나타난 것이었을 것이다.

인간도 종아리를 맞는 아들보다 회초리를 든 어버이의 아픔이 덜하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사랑에 감성까지 풍부하신 하나님 아니신가. 그 사랑과 감성으로 아들 예수의 아픔은 아버지 하나님께 그대로 고스란히 전해져 그 아픔으로 인한 몸부림이 그렇게 온 땅이 어두움으로 덮이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일 게다.

그런데 이로 끝이라면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의 그처럼 큰 고통이 너와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 온 인류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유익을 그리 크게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통스러운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어 죽는 그 순간, 성전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손(手) 두께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의 가장 깊숙하고 거룩한 곳으로 1년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 대제사장만이 백성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들어가는 속죄일에만 열렸던 것인데, 휘장이 찢어짐으로 영구히 열리게 된 것이다.

인간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는 견고한 장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맡아지고 대신 죽음으로써 너와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죄가 사함 받아, 용서 받아 원하는 사람 모두가 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무너진 것이다. 커다란 못이 박히어 손과 발이 찢기고, 창에 찔리어 옆구리가 찢김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무너진 것인데, 그것이 성전의 휘장이 찢기는 가시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20) 그 휘장은 곧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몸이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절묘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 섭리인가.

그뿐 아니라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어 죽은 지 사흘 만에, 묻히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무덤에서 나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본(고)향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 인간들에게 부활의 문을 열어 주셨고, 하늘나라로 오르심으로써 지옥으로 향하는 지옥행 길에서 하늘나라로 향하는 천국행 길로 옮기도록 그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통치라 하면 어딘지 좀 강압적인 것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니다. 지켜 보살피며 관리하는 가운데 이끌어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인간 통치자들이 잘못하여 그리 느껴지게 한 것이다.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들, 양자로 삼아 그 전지전능하심으로, 그리고 사랑이신 그 사랑으로 진정한 의미의 통치를 하신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어떠한 형편, 어떠한 역경 가운데에서도 지켜 보호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어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는 날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이 그분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교회 출석 잘하고 봉사 잘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과 윤리적으로 착한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믿어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이 가라시는 대로 가고 하라시는 대로 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세상의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까지도 믿지 않고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만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물론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서 책무를 다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도 믿음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살라는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음의 소산으로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잘한다 해도 믿음은 별로인 사람이 있지만, 그런 것을 소홀히 하는 믿음 좋은 사람은 없다.

 

 

하나마나한 말을 하는 이유

 

지금까지 교회를 좀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 말을 했다.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말도 된다. 그러니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느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난번 글 <무신론자들이여, 신이 없다는 증거를 대 보세요>와, 그에 이은 이 글을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성경 66권을 요약한 것으로 하여 썼다. 요약했다고는 하지만 일부러 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이리 된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상당 기간 기도해 오면서 신앙고백적인 내용이 그 기도의 주가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이같이 된 것이다.

나는 기도를 통하여 이 같은 내용을 신앙고백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이라고는 하지만 반쪽만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다는 아니다. 100%라 할 순 없다. 가슴으로 확인하는 것과 그리되게 해 주시라는 간구적 성격도 강하다.

기독교가 성경에 근거하는 종교임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 있으나 없는 것과 같다. 성경 밖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기독교 밖의 하느님일 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고백은 자연히 성경 내용 요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일이다. 아니 은혜이다. .

나는 기도한다. 나에게서 성경이 성경이 되게, 말씀이 말씀이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말씀이 말씀이 되려면 말씀을 모르고선 안 된다. 알되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알되 머리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온 심령, 온 마음, 온몸으로 알아야 한다.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렇게 체험적으로 아는 ‘안다’는 말로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야다’, 신약에서는 헬아어 ‘기노스코’를 쓰고 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창4:1)의 ‘동침’이 ‘야다’의 역어이고, 요셉이 그의 아내 마리아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의 ‘동침’은 ‘기노스코’의 역어이다. ‘동침=야다·기노스코’인 것이다.

흔히 성적 경험이 있는 남녀를 가리켜 ‘재는 남자를 안다’거나 ‘여자를 안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 짓는 가장 중심적인 것은 ‘성(性)’인데, 그 성은 동침으로서만 확실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야다’ ‘기노스코’처럼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건 성경, 말씀을 그렇게 안 후의 일이다. 말씀부터 체험적으로 알아야 하나님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씀을 그렇게, ‘야다’ ‘기노스코’의 체험적으로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그에 대해 듣고, 공부하고, 연구한다. 그럴 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이므로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그렇게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남녀가 동침함으로 서로의 성을 알듯이 알게 된다. 말씀이 자신의 안에 들어와 속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말씀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좀 오랫동안 성경을 읽어 온 사람이라면 읽는 중에 그 말씀의 빛이 자신의 내면에 환하게 비치고 있음을 몇 번인가는 체험했을 것이다. 성령께서 도우신 결과이다.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신 은혜 때문이다.

그러나 이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그러니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기도의 본령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이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 됐건 구하는 것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라”라 하셨다.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찾아내게 되고 열릴 것이라고도 하셨다.(마7:7-8 참조) 그러나 기도한다고 만사OK는 아니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만을 놓고 본다면 구하는 것만으로 받는 것을 보장받는 것이 되지만, 이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해야 한다는 말인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마6:33) 이 얼마나 명쾌한 해법인가. 방금 필요한 것은 무엇이 됐건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했는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까진 아니라는 건 물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성경이다. 성경에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 그분의 의가 모두 들어 있다. 그런데 성경 66권을 (내가) 요약한 것이 전술한 대로 이 글과 전번 글의 내용이고, 또 그것을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라는 말씀이 된다.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기독교인의 삶, 신앙생활이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복음 신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도 하나님 사랑에 다 들어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알아야 하고, 알되 바로 알아야 한다. 바로 알되 머리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온 심령, 온 마음, 온몸으로 알아야 한다.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알기로 말하면 신학대학 교수들보다, 목사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 아닌 ‘야다’ ‘기노스코’의 그 ‘알다’와 같은 체험적으로도 그러할까. 아닐 것이다.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아닐 것이다. 신학대학의 분쟁과 목사들의 반성경적 삶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방법은 달리 없다. 죽으면 죽는다는 각오와 결단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것이 나의 속사람이 되도록 성장해 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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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218.148.25.108)
2023-03-15 23:15:13
야훼가 인간이 만든 신이라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1. 경전에서 나타나는 오류
1) 하나님은 영 VS 예수는 사람의 아들
2) 야훼의 완전성 VS 후회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야훼(아마도 출애굽기)

야훼에 대한 경전의 설명들이 서로 모순되며, 경전내에 그런 장면은 흘러 넘친다.

2. 과학적으로 볼 때, 경전에 나타나는 오류
1) 기독교 경전에서 나타나는 지구는 동전과 같은 원판(circle)이다. 그러나 지구는 2차원인 원판이 아니고, 3차원인 구체(sphere)이다.
이외에 경전이 지시하는 세상은 현대과학적 세상과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

3. 경전에 나타나는 역사적 오류
1) 기원전 18세기 경 갈데아 땅에서 출발한 아브라함 vs 갈데아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타난 시점은 기원전 9~10세기
2) 가나안 땅 입성 시기(기원전 12세기 경)에 나타나는 브올의 아들 발람 vs 기원전 8~9세기에 나타나는 브올의 아들 발람.

4. 역사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경전자체에서도, 기독교 경전과 기독교 신이 참이 아니라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5. 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믿을 사람은 믿어라. 왜냐고? 아주 보수적이고 신실한 유대교인들이 무신론으로 전향하는 순간 자살율이 높아진다. 그것은 종교가 도구로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또는 심리적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건강보조식품을 먹듯이, 종교가 건강보조식품의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6. 하지만 부작용도 생각해야 한다. 건강보조식품인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신자들에게서 엄청난 양의 자산(헌금, 노력동원)을 노획하며, 종교지도자들 대부분이 그 노획물을 차지한다. 따라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곧 노획 당하는 것을 말한다.

7. 물론 존경받아야 하는 종교 지도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명 중에 1명이 있을까? 그 1명 조차 정명석과 같이 실제로 사악하지만 입소문에 따른 지도자가 아닐까? 믿을 지언정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에 대한 환상을 거두어라.

8. 가장 추천하고 싶은 길은 건강한 무신론자이다. 당신들 중에 몇몇은 <손 안에 있는 천국>을 말한다. 이것이 건강한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천국이다. 지금 살아있는 시간, 장소가 최고의 가치이며, 최선을 다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대상이고, 그 시간 장소에서 최선의 행복을 맛보아야 한다. 쓸데 없이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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