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2022)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사회문제를 소재로 다룬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특히나 영화의 제목은 그 자체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 소희라니, 처음 소희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일 것이고, ‘다음 소희’라고 이름붙일 만한 비극적 상황이 여전히 비슷하게 현실로 존재한다는 뜻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담스럽기 때문에 더욱 피해서는 안 되는 만남도 있는 법이다. 게다가 그 부담이 하나님 나라의 부재로 인해 벌어지는 냉혹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얻은 거짓 안일과 평온 때문이라면, 회피의 명분은 이미 사라진 셈이다.

영화의 주인공 소희는 졸업 후 대학진학보다 바로 취업으로 뛰어드는 아이들을 위한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소희는 현장실습이란 명목으로 학생신분인 채로 인터넷 콜센터에서 일하게 된다. 그것도 인터넷을 해지하겠다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설득하며 새 상품에 가입하게까지 만드는 해지방지팀에서. 게다가 이 콜센터는 하청이다. 충분히 예견되는 극심한 감정노동과 노동자로서 그녀가 받을 극악한 처우가 이미 전제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소희가 겪는 일들은 모든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 처음 장면에서 소희는 이유 없는 모멸을 견딜 수 없고 이에 바로 저항하는 제법 당당한 아이로 등장한다. 그녀는 춤 실력도 뛰어나다. 이렇게 누구와도 다른 강한 개성을 지닌 한 ‘인간’이 열악한 근무환경 탓에 끊임없이 대체가 이루어지는, 그러므로 누구와도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녀가 이어폰으로 들으며 춤을 추었던 음악이 헤드폰으로 들으며 고통 받았던 무참한 감정의 쓰레기로 변하는 과정, 한 영화평론가는 이를 두고 요즘 유행하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 마침내 꺾이게 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소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서 영화가 끝나나 싶은 순간, 영화는 다시 또 시작한다. 유진이라는 형사를 통해 소희가 겪었던 일들을 반추하며 과정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의 소희 이야기와 후반부의 유진 이야기.

배두나가 연기한 형사 유진은 이미 여러 차례 힘들다는 싸인을 보냈던 소희의 의견이 어떻게 묵살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소희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학교는 취업률 때문에 그저 견디라고만 했고, 교육부와 노동부는 그녀의 신분이 노동자가 아닌 현장실습 학생이라는 이유로 서로 책임을 미룬다. 유진은 책임의 사각지대 속에서 소희의 절규가 그 어느 곳에도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불의한 시스템의 변화라는 거시적인 목표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영화는 소희가 어른이 아니라 아이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녀는 어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그저 아이였던 것이다. 소희의 친구들을 찾아가며 조사하던 형사 유진은 소희의 친구들에게, 소희와 똑같은 고통을 현재진행으로 겪고 있을 다음 소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려준다. “너 때문이 아냐.” “때론 욱해도 괜찮아.” 그 말을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을 통해 영화는 다시 한 번 소희를 떠올리게 한다.소희도 아이였던 것이다. 소희 역시 그저 너 때문이 아니다, 욱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작은 위로만으로도 아이들은 숨 쉴 여지를 얻는다고 영화는 말한다.

최후의 결행을 앞두고 조용히 구멍가게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던 소희의 슬리퍼 위로 문틈 사이 햇빛이 비추고 소희는 홀린 듯 밖으로 나간다. 같은 자리에서 소희의 마지막 흔적을 함께하던 유진 역시 이 햇빛을 받는다. 온통 얼음장 같은 삶에 그저 한줌 햇빛이라도 있다면, 보호자의 작고 따스한 온기만 있어도 아이들은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사전 정보 없이 영화 속에서 2017년이란 연도를 발견하고 아마도 지금보다 더 열악한 콜센터의 감정노동을 표현하려는 배경 장치였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가 영화가 그해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들었으나 잊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그런 현실을 모르고 살아도 될 만큼, 잊고 살아도 될 만큼 나의 삶은 안일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제작사에서 홍보문구로 작성했을 영화 소개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두 그 애를 만난 적이 있다.” 만난 적이 있었을 뿐이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만나고 있는 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