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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의 희망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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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2월 11일 (토) 01:26:59 [조회수 : 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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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의 희망

1. 지금 우리의 현실
유사 이래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정말 난감하다. 20세기 초중반에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무너졌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를 물었다. ‘시’의 자리에 ‘신학’을 대입해도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동구권의 해체로 냉전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인류는 더 음험하고 막강한 적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는 모든 사람을 경쟁의 벌판으로 내몰았고, 돈은 모든 가치의 수렴점이 되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어느 탈옥수의 외침은 주술이 되어 우리를 확고하게 포박하고 있다.

20세기 말부터 기후위기라는 불편한 진실이 서서히 담론의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이제 기후 위기 문제가 세계를 집어삼키는 태풍이 되었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이 더 이상 과민한 학자들의 비명이 아니라 현실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전율한다. 온실효과로 인해 축적된 에너지가 특정한 지역에 나타나 재해를 만들고 있고, 재해의 규모는 해마다 커져만 간다. 홍수와 가뭄, 혹한과 혹서, 대규모 허리케인과 폭풍, 대형 산불 등은 지구가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산업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지구의 온도가 섭씨 1.5도 올라가면 지구는 티핑 포인트를 맺게 된다는 과학자들의 외침이 다급하기만 하다. 벌써 1.2도가 올라갔다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외침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아담 맥케이 감독이 2021년에 만든 영화 ‘Don’t Look up’은 그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커다란 혜성 하나가 지구와 충돌하는 궤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천문학자가 책임 있는 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만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실익 계산에 여념이 없고 일반인들 역시 자기들의 일상을 뒤흔들 소식에 귀를 닫는다.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탄 인류는 카산드라의 시간을 살고 있다. 소비주의라는 종교가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욕망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희소성의 기호를 만들어내 사람들을 유혹한다. 욕망과 만족의 시차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한다. 안간힘을 다해 얻은 행복의 기호를 손에 쥐는 순간 또 다른 결핍이 눈에 띈다. 행복은 유보되고 피곤한 일상만 남는다. 피로사회는 그렇게 도래한다.

작고한 경제학자 김기원은 한겨레신문 컬럼에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사로잡고 있는 세 가지 기본 정서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 그것이다. 고단함은 생산과정과 관련된 정서이다. 교육을 통한 탈빈곤을 경험한 부모세대는 자녀들에게 과잉 투자를 하기 위한 재화 마련을 위해 일하느라 늘 피곤하고, 어릴 때부터 수월성 교육에 내몰린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하느라 놀지 못한다. 중고등학생들도 대학의 관문을 뚫기 위해 진력하고, 대학생들은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느라 삶의 의미 물음 앞에 서지 못한다. 타자들에 대해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 삶은 개별화되고 연대의 능력은 쇠퇴한다.

억울함은 제1차 분배과정에서 경험하는 정서이다. 부모 세대의 물질적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이들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그 결과 좋은 학점 받지 못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 결과 대학을 나오는 순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리기 일쑤이다. 둘 사이의 임금 격차는 크다. 억울하다는 느낌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은 원망과 선망 사이에서 서성이기 쉽다.

불안함은 제2차 분배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서이다. 외환 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젊은 세대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부모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노출된 채 살고 있다. 실업, 질병, 노령 빈곤에 대한 불안함은 거의 모든 세대들이 두루 경험하는 현실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좀비들은 현대인들의 거울상이다. 영혼은 없고 육신만 남은 존재들인 이들은 어쩌면 막스 베버가 말하는 말인(末人)은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베버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야말로 인간이 도달하게 될 마지막 지점이라 말했다. 그들은 더 이상 의미에 대해 묻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공허한 인간이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을 잡아먹는 것이 허용되는 세상이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은 환대의 공간이 아니라 적대의 공간으로 변한지 이미 오래다.

2. 종교의 퇴락
‘마루 宗’과 ‘가르침 敎’ 자가 결합된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으뜸’은 기본 혹은 근본을 가리키니 종교는 삶의 근본을 가르치는 것을 본령으로 한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다시 연결하다’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한 것이다. 종교는 영원과 시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연결하여 삶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고, 사람들의 삶이 철저히 개별화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종교가 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필요와 충족, 욕망과 쾌락의 순환 논리에 빠져 사는 이들에게 삶의 다차원성과 깊이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보다 더 큰 술어로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누가 사람이냐>)이라고 말했다. 더 큰 세계와의 접속을 일어버릴 때 삶은 욕망의 투기장이 된다. 욕망에 포박된 이들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상실한다. 그것은 경탄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능력이다. 장엄함과 숭고함의 세계를 잃어버릴 때 삶은 납작해진다.

종교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애굽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인들은 야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해체된 세상,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세상을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로 이미지화했다. 종교는 기존 질서가 만들어놓은 ‘당연의 세계’에 의문 부호를 붙인다. 그런 의미에서 전복적이다. 관습적 사고에 젖어 사는 이들의 일상을 뒤흔들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참된 종교가 하는 일이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범람하는 지역에서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왕만이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제국의 한 복판에서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말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을 선언했다. 인간은 신들의 노역을 덜어주기 위해 종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신의 일에 창조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받은 존재라는 것이었다.

전쟁이 빈발하던 시기에 예언자들은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이사야 2:4, 미가 4:3). 어처구니없는 꿈처럼 보이지만 그런 꿈조차 없다면 사람들은 폭력의 현실 앞에서 질식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는 삶으로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민낯을 드러냈다. 로마의 평화는 피지배자들의 희생과 눈물, 강요된 침묵 속에서 얻어진 강자들만의 평화였다. 압도적인 무력으로만 지킬 수 있는 평화였던 것이다. 예수는 그 질서를 전복했다. “뭇 민족들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누가 22:25-26). 백향목처럼 우뚝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 어깨를 겯고 함께 비바람을 견디면서 누군가의 품이 되어주는 세상의 꿈이야말로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공정’이라는 화두가 젊은이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무임승차를 죄악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배려와 기다림의 미덕이 사라졌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놓아둔 채 길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 이야기는 비효율적인 낭비처럼 보이고, 포도원에 고용되어 아침부터 일을 한 사람과 늦은 오후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다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불공정하다는 인상을 준다. 불안이 영속화되면서 공감의 능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기존 질서가 만들어놓은 삶의 문법에 순응하는 이들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지 못한다. 그 문법이 만들어놓은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영원한 루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다. 위계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 속에서 숨 막혀 하면서도 위계의 사다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본의 지배는 이렇게 확고해진다.

3. 진정한 영성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야 할 때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진술이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서구적 주체의 자부심은 이미 해체되고 있다. AI가 산업혁명 이후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가장 부합한 존재로 등장하고 있고 Chatbots은 명령에 따라 각 분야의 학술 논문은 물론이고 소설과 시 등 문학 장르, 연애편지나 추도문까지 쓰는 세상이다.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소설에서 사람의 충동과 욕구에도 포괄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AI의 세계를 그리면서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으로 만드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지를 묻고 있다. 포스트 휴먼 시대에 인간답다는 건 과연 어떤 걸까?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회복력 시대>에서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이 공감과 애착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심지어 기쁜 감정조차) 마치 내 것인 듯 경험할 때 신경 회로의 깊은 내면에서 발산되는 공감 충동은 타인의 취약성과 유일무이한 삶을 잘살아 보려는 나름의 고군분투에 대한 감정적, 인지적 인식이다. 우리의 감정적 연대는 존재하는 모든 순간에 필멸이라는 이 궁극적 부담이자 축복을 함께 짊어지고 있는 동지로서 서로에게 보내는 지지의 심오한 표현이다. 연민의 감정은 타인에게 접근해 우리는 모두 동료 여행자라고 말하는 우리만의 방식이다”(p.321)

필멸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증거라는 것이다. 낙원이나 유토피아에는 연민의 여지가 없다. 그곳은 모든 것이 완벽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포스트 휴먼 시대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들에 대한 공감적 포용을 의미하는 생명애 의식은 단순히 권장 사항이나 희망 사항이 아니다”(p.330). 세상의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현종 선생은 “한 숟가락 흙 속에/미생물이 1억5천만 마리래!/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이라고 노래했다. 시인은 우리가 흙길을 걸을 때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그 탄력은 수십 억 마리 미생물들이 밀어올리는 힘임을 알아차리고 경탄한다. 유행어처럼 통용되는 영성이란 특별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렇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성이 아닐까.

4. 반딧불이의 희망
그러나 이러한 속삭임은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소리에 묻혀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어쩌다 들린다 해도 삶의 방향을 바꿀 생각을 품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눈 뜬 이들의 연대이다. 터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 인내심을 가지고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새로운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루쉰의 말처럼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걸음으로 생기는 것이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는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라는 책에서 예수가 들려준 하나님 나라 비유를 새롭게 풀어 설명한다. 그는 이 책의 부제를 ‘세상 다시 상상하기’라고 붙였다. 예수는 ‘거룩의 정치학’을 통해 사람들을 갈라놓던 유대교의 사회적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한편 사람들이 서로를 연민의 마음으로 포용하는 ‘자비의 정치학’을 제시했다. 거룩의 정치학은 세상을 거룩함과 속됨, 정결과 부정,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나눈다. 나눔을 통해 배제와 혐오의 대상을 지정한다. 하지만 자비의 정치학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 의해 배제된 이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되찾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자비야말로 욕망에 의해 조각난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미국의 과학 전문기자 룰루 밀러가 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진화론에서 비롯된 우생학에 열광하는 이들은 빈민들과 술꾼, 백치들과 장애인 등을 사회의 ‘부적합자’로 여겨 제거하려 했다. 여성들의 경우 1970년대까지도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불임화 수술을 당한 이들이 많았다. 애나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의 부모는 가난했고 애나의 지능을 낮았다. 그런 이들을 가뒀던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애나는 어린 아이들을 잘 돌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다 하여 불임화 수술을 당했다. 그런데도 애나는 수용소에 들어온 어린 메리를 잘 돌보아 주었고, 둘은 노년에 이를 때까지도 서로 의지하며 의좋게 살았다. 룰루 밀러는 애나로부터 학대에 시달리고 강간 당하고 지적장애자 취급을 받고 턱뼈가 부러질 정도의 폭력을 경험하고 마침내 불임화 수술까지 당한 이야기를 듣고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애나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메리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나 때문이지!”

농담처럼 던져진 말이었지만 룰루 메이는 그 말 속에서 두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선을 볼 수 있었다. 서로를 돌보고, 슬픔을 가볍게 쫓아버리고, 농담을 받아주고,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서로를 띄워주는 사람들의 그물망(p.223-226)이야말로 이 위험한 시대를 견디도록 해주는 힘이 아닐까? 관계 속에 상호작용을 하고, 서로에 대해 책임적인 삶을 살고, 그 과정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좋은 삶의 비결이 아닐까? 사소해 보이는 이런 이야기가 소중한 것은 희망이란 이렇게 작은 실천으로부터 역사 속에 유입되기 때문이다. 반딧불이 하나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반딧불이들이 모여 함께 깜빡이면 돌연 어두운 세상은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로 변한다. 일순간에 세상을 환히 비추는 빛이 아니라 해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을 밝힐 때 세상이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지금은 전환의 시대이다. 전환의 시대는 기존의 중심을 해체하고 새로운 중심을 구성해야 한다. 에고(ego) 중심의 세상에서 에코(ecology) 중심의 세상으로, 탐진치 삼독이 제도화된 탐욕(greed)의 세상을 넘어 생명이 중심이 되는 녹색 세상(green)으로, 적대(hostility)의 세상에서 환대(hospitality)의 세상으로, 고립(solitary)의 세상에서 연대(solidarity)의 세상으로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큰 과제이다.

(* 2023/01/28일에 있었던 Mind-lab 창립 총회 기조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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