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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기소개’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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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1월 12일 (목) 22:57:25
최종편집 : 2023년 03월 28일 (화) 00:19:53 [조회수 : 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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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과 논-크리스천,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만세 전, 영원 전,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었으니 계심에 미친 영향도 없었다. 그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 하늘에 일월성신을 만드시고 땅에 동식물을 위시한 모든 생명체를 만드신 후 마지막을 사람을 만드심으로 창조역사를 마치셨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같은 사실을 알아 믿는 이들이 있고, 몰라서… 모르니 당연히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믿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알지도 못한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이들 각자는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에 의해 모태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나, 그것도 무엇인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것이려니… 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사회라는,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니 그에 따른 규범(法)은 지키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외에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존재)로서 삶을 영위한다. 규범을 어겨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도 많다.

물론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다대수이다. 아담과 하와 부부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와 만연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그 선한 심상(형상)이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다. 범죄 전의 그 완전한 상태의 선한 심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도 없지만 완전히 파괴되어 그 형태의 편린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람도 없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면으로만 이라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차이가 그리 큰 것도 아니다. 비신자 가운데 신자보다 더 선한 사람이 많고, 신자 가운데 비신자보다 더 못한 사람 또한 많다. 전면적으로 보면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은 게 사실이지만 개개인을 본다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더 악한 것처럼 떠들며 입방아를 찧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한 많은 믿는 사람들도 그에 가세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에 거는 기대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으셨는가 하는 그 목적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지으셨다. 그리고 그 지으신 목적은 당신만을 죽도록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당신의 통치 아래 온전히 들어오기를 바라신다. 통치라 하면 어딘지 강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도 다르지 않지만 비민주적 그것이 강압적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다.

 

 

‘주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기도할 것인가

 

어떻든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에 의한 지배와는 다르다. 사랑이신 그분의 통치는 모두가 사랑으로 이뤄진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을 채찍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고, 채찍까지도 훈련이 목적이라는 것을 느껴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어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이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인데, 그것은 그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안에서 자기 안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기는 철저하게 종이 되어 죽도록 사랑함으로 섬기는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 또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거나 ‘거하라’는 의미의 말씀이 몇 번인가 나오는데(요14:20 15:4, 15:7. 요일2:28, 3,24, 4:13 등), 그것,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성삼위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우리는 통상 하나님과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한다. (졸고 “종교행사로서의 예배와 최고 최상의 예배” 참조)

특히 요한복음은 15장 전장에 걸쳐 이와 관련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하셨고, 이어 5절에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포도가 열리는 가지가 그 줄기에 붙어 있어 하나의 포도나무인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포도나무가 포도나무인 것은, 그리고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은 포도라는 열매를 맺기 때문인데, 그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도 하신다. 이것이 요한복음 15장의 중점이기도 하다.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저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시고, 16절에서는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기도를 자기의 선함, 사랑을 앞세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내 이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 그분과 내가 연합하여 하나 되고서야 할 수 있다. 입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다고 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의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를 구세주, 나의 구주로 믿고 부르는 사람으로, 그로 인한 ‘사랑’의 ‘열매가 항상’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모든 것들은 나의 힘, 나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신앙상의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바른 기도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기도도 성령님의 도움을 저변으로 해서 드려야 한다.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며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지 않으면 자칫 주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왜 풀기 다 떨어진 팔십 노인 모세를 부르신 것일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나이 팔십으로 늙어 풀기가 거의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도 젊었을 때에는 의기 왕성하고 패기도 넘쳤으나, 그때가 아닌 늙어 무능하고 의욕도 사라진 때 부르신 것이다.

그는 종살이의 땅 애굽에서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애굽 왕 바로의 공주 아들이 되어 40세까지 왕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애굽 사람이 자기의 동족 히브리 사람을 때려 학대하는 것을 보고 의분으로 그를 쳐 죽였고, 그래서 살인자가 된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 그리고 거기에서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기거하며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장인의 양을 치는 가운데 40년을 살았다. 능력도 의욕도 소진되어 이제는 그저 어제에 밀려 오늘을 사는 팔십 노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하루는 그가 양떼를 몰고 호렙 산까지 갔고, 거기에서 참으로 기이한 현상을 보았다. 저만치에 바짝 말라 불쏘시개로도 쓸 수 있을 정도의 떨기나무 가시덤불에서 불길이 맹렬히 일고 있는데, 나무가 타지 않은 것이다. 팔십 노인의 호기심을 일으키기에도 충분한 광경이었다.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그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부르신 것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정확한 자기인식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그는 그럴만한 의지도 능력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임마누엘”의 약속이셨다.

그럼에도 모세는 선뜻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할 터인데, 그럼 내가 무엇이라 할까요? 물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었다.

스스로 있는 자, 모두에 언급한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기소개’인 셈이다. 모세는 이름을 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스스로 있는 존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절대자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말로 절대자는 하나님 말고는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하나님 말고 스스로 있는 자가 또 어디에 있는가.

절대자는 자기가 마음대로 하는 데에 어떠한 제약도 있을 수 없다. 하고 싶은 것은 하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 완전히 자유롭다. 절대 자유이다. 어떠한 경우, 때, 장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다 절대로 자유인 것이 절대자이다.

그러니 인간은 절대로 절대자가 될 수가 없다. 될 수 없는데, 그 흉내를 내려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절대왕권, 그런 건 없다. 과욕의 산물일 뿐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비참한 종말을 부른다. 오늘날은 그것을 독재라 하는데, 그게 그것이다. 강력한 지도력과 독재적인 것의 분별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저와는 우물 밖을 모른다

 

절대 자유는 절대 독립의 산물이다. 그리고 절대 독립은 스스로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세상에서의 독립은 절대가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어떻든 인간은 독립을 희망하며 갈구한다. 그러나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의 딱 한 경우는 예외이다. 크리스천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인간통치에 관해 전술했고,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는 말씀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라는 내용도 언급했다. 독립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그 반대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만으로 라면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표현의 내용물은 자유, 진정한 자유로 채워져 있다. 거기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교회 또는 하나님한테 얽매어 산다고 생각한다. 구속(救贖) 아닌 ‘구속(拘束)’ 받으며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는 일은 구속(拘束)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은혜이다. 행복이다.

돈에도 지위나 명예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그러하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얽매이는 것과 다르다. 크리스천들도 노력은 한다. 더욱 힘써 노력한다. 그것들을 타를 위해서도 쓰면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되니 기도하며 노력한다.

돈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없으면 죽는다. 어떻게 벌고 쓰느냐 가 중요하다. 부정하게 버는 것은 죄악이고, 저와 제 가족들만을 위해 쓰는 것도 죄이다. 나눔은 사랑이고, 사랑의 즐거움을 아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크리스천은 그런 사람들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듯, 하나님 안에 있으며 자신의 안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만 얻는 즐거움의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크리스천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모르니 크리스천을 보고 얽매여 산다 하는 것이다.

소설 <눈 고장(雪國)>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중에 <고도(古都)>라는 게 있는데, 우리나라의 오백년 도읍지 경주(慶州)와 같은 일본의 천년 도읍지 교토(京都)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작품세계에는 ‘단지 속의 방울벌레’ 이야기가 나온다. 한 아가씨가 방울벌레를 단지 속에 넣어 기른다는 내용으로, 방울벌레들이 좁고 어두운 단지 속에서 태어나 울고, 알을 낳고, 죽어가는, 그리고 종(種)의 보존까지 한다는 줄거리이다. 그 방울벌레들에게 있어서는 좁고 어두운 단지 속이 온 세상, 온 천지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인 셈이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세계가 얼마나 광대하고 밝은지를 알지 못한다. 방울벌레들에게 있어서의 단지 밖 세상, 우물 안 개구리의 우물 밖 세상의 밝고 넓음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 방울벌레나 개구리에게 자기들이 사는 세상 밖의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아무리 설명을 잘한다 해도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입으로만 하는 설명으로 이해가 된다면 세상에는 크리스천 아닌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온 마음과 온몸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가 얼마나 밝고 넓은지, 그리고 그 세계가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워 행복한지 종횡무진 활보하며 만끽함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 그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마치려 한다. 사람은 그게 누가 됐건 스스로 있는 자일 수 없다는 증명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속히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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