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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그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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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년 01월 08일 (일) 17:01:23 [조회수 : 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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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그 진리
요한2서 1:1-7
(2023/01/08, 주현 후 제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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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믿음의 자매와 그 자녀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속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그 진리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진리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자매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새 계명을 써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을 써 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 택함 받은 사람들
주현 후 첫 번째 주일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현절은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경배한 사건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현절은 성탄절로부터 12일째 되는 날인 1월 6일입니다. 주현절기는 주현절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바로 전날까지입니다. 24절기로는 대개 소한 대한 입춘 우수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주현절기라는 말입니다.

저는 산의 사계 가운데 겨울 산을 제일 좋아합니다. 흰 눈을 이고 있는 높은 봉우리도 장엄하지만, 잎을 다 떨군 채 찬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도 아름답습니다. 일체의 허장성세를 버린 수도승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무는 춥다고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투덜거리지도 않습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킵니다. 겨울바람이 차갑게 볼을 스칠 때면 가끔 읊조리는 동요가 있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겨울은 밖으로 확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안으로 침잠하는 계절입니다. 주현절기는 우리 삶을 꼼꼼하게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택하심을 받은 믿음의 자매’라고 말하고 성도들은 ‘그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택하심’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있습니다. 택하심은 일종의 호명입니다. 월드컵이 끝났습니다만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브라질 대표팀에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선수들의 모습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이 호명되면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가족들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거나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머리를 감싸 쥐며 감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기대하던 일에 택함을 받는다는 것처럼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 10:10)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나 고백보다 앞선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택하심과 부르심이 없다면 믿음도 불가능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지만 모두가 다 그 분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만 죄로부터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진리’
택하심은 특권이 아닙니다. 택하심을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멸시하고 천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택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와 더불어 하시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택하심은 그러므로 소명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징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립된 단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모든 지체들이 사랑과 우애를 나누는 곳입니다. 바울 사도가 서신에서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allēlōn)가 그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서로’에 걸리는 단어는 실로 다양합니다. ‘사랑, 격려, 협력, 지체, 존경, 한 마음, 덕을 세움, 받아들임, 권면, 섬김, 짐을 져 줌, 용납’. 택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그러한 아름다운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갈라놓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는 전장에서 우리 삶은 개별화되고 있습니다. 친밀한 우정을 누리지 못합니다.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그렇게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감정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사도는 아주 간명하게 답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속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그 진리(ho alētheia) 때문”(요한2서 1:2)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이 사랑의 뿌리로 제시하는 것은 ‘그 진리’입니다. 일반명사인 진리에 굳이 정관사를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도가 전하는 진리가 세상의 이치나 이법 혹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특정한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리’이신 주님은 십자가 처형과 더불어 세상에서 제거된 분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지금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진리’는 또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분입니다. 사도는 ‘그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진리(alētheia)와 사랑(agapē) 안에서 작동하는 은혜(charis)와 자비(eleos)와 평화(eirēnē)를 누리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비와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마련입니다.

•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
장로 요한은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 우리 시대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낡아빠진 느낌이 듭니다. 그 숭고한 단어가 너무 남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낡게 만듭니다. 연인들의 뜨거운 사랑의 고백이 무관심이나 증오로 바뀌기도 합니다. 감정적인 사랑은 지속될 수 없고 강제될 수도 없습니다. 감정은 부침을 겪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동일한 대상도 우리 감정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지 않던가요? 어떤 때는 사랑스럽게 보이던 이들이 밉살스럽게 보일 때도 있는 법입니다. 감정에 바탕을 둔 사랑은 불안정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롬 5:5b)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그 사랑의 샘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우리는 사랑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집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사랑은 감정을 넘어서는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당장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호감을 가지기는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상처를 치유합니다. 삶의 잔인함 때문에 상심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사랑은 삶의 무의미에 지쳤던 이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해줍니다. 사랑은 불화했던 이들을 화해로 이끕니다. 사랑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을 일으켜 세워 불의에 저항하게 합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고향을 선물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형제자매가 자신의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변화되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요일 4:12)

• 속이는 자들
사도는 사랑은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곧 이어 계명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셈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복잡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을 따라 사는 이들입니다. 욕정을 따라 살면서도 진리 안에 있는 척 자기를 꾸밉니다. 그들은 확신에 찬 것처럼 보입니다. 오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압도하려 합니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무지하기에 용감합니다. 그들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I may be wrong)라는 겸허한 자기 인식이 없습니다. 에머슨은 “어리석은 일관성은 편협한 정신의 헛된 망상”이라고 했습니다(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p82에서 재인용). 그런 이들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교적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진리’ 가운데 있는지를 보려면 그의 주위에 감도는 분위기를 보면 됩니다. 그의 주변으로 자비와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따뜻하게 퍼져가고 있다면 그는 ‘그 진리’ 안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 냉소와 혐오와 악다구니가 넘친다면 아무리 심오한 말을 하더라도 그는 의심스러운 사람입니다.

요한은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은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육체를 천하게 여겼던 영지주의적 이단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말이지만, 지금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빌 2:13). 신앙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긍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세상에는 입으로는 주님을 시인하지만 삶으로는 부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오만에 빠진 이들에게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4:19-20). 지금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따뜻한 우애와 사랑, 명랑함과 유쾌함, 정직함과 용감함, 화해와 용서,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까? 사랑이 식어버린 시대입니다. 다시금 사랑의 모닥불을 피워야 할 때입니다. 따뜻한 불이 지펴진 곳마다 마음 시린 사람들이 모이는 법입니다. 주현절기 내내 ‘그 진리’ 안에서 걷는 우리 몸과 마음에 주님의 빛이 스며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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