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기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당장 여기에서 빠져나가자. 머뭇거리다가는 압살롬의 손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가 달려들면 우리만 참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남은 백성들까지 해를 입을 터이니, 어서 서둘러라." "임금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며 신하들은 따라 나섰다. 왕은 왕궁을 지킬 후궁 열만 남겨놓고는 온 왕실을 거느리고 걸어서 피난길에 올랐다.   -사무엘하 15:13-16. 

  이스라엘은 말할 것 없고 세계에서도 으뜸갈 왕들 가운데 하나인 다윗의 위대함을, 걸어서 피난길에 오르는 초라한 행색에서 본다.

  상황을 제대로 읽고, 가능한 만큼 피해를 덜고자, 아들에 쫓겨 도망치는 못난 아비의 모습을 세상에 감추지 않고 스스로 연출하는 바로 거기에, 그의 위대함이 숨어 있다.

  옛글에 이르기를, 영화를 알면서 욕됨을 간직하면 천하의 골짜기가 되고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변함없는 덕(德)이 가득 차서 마침내 바탕으로 돌아간다[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고 했거니와,  낮고 낮은 골짜기에서 비롯하여 그리로 돌아가지 않는 높고 높은 봉우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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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 어떨 때는요, 주님. 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한심하게 못난 짓을 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그럴 땐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도록 비참하고 부끄럽습니다만, 지나고 나면 오히려 홀가분해지고 안심이 되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요? 아무래도 밑바닥에 처박혀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자의 안도감 같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앞으로는 저의 못난 모습을, 일부러 자랑할 것까지야 없겠습니다만, 저 옛날 다윗이 그랬듯이, 있는 그대로 껴안고서, "그래 넌 이런 놈이다. 그러니 하느님이 일으켜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바로 너임을 잊지 말라구." 하고 말하며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게 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