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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30년] 죽어야 사는 기독교, 타자 부정에서 자기 부정에로
이정배  |  현장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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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11월 02일 (수) 02:32:09
최종편집 : 2022년 11월 02일 (수) 02:52:43 [조회수 :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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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배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 1부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발표2 죽어야 사는 기독교, 타자 부정에서 자기 부정에로
― 30년 전 가을, 종교재판 자리에 섰던 변선환 선생님을 회억하며

 

이정배(현장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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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 학장으로 재직(1988~1992)했던 선생님은 그 임기 중에 교수들 모인 자리에서 “학교가 크게 요동칠 것 같다”는 우려를 누차 발설하셨다. 신학대학의 권위가 종교권력과 돈의 힘에 굴복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셨던 것이다. 당시는 부흥 목사들의 위세가 대단하던 때였다. 대학 예산보다 10배 이상 커진 대형 교회들이 여럿 되었고, 그곳 목회자들 몇몇이 대학 이사로 파견되었다. 교회 성장을 절대 가치로 여긴 탓에 이들은 신학, 더욱이 토착화 전통을 잇고자 했던 변선환의 신학을 백해무익한 것, 성장의 방해물로 여겼다. 평소 자신들 신학적 열등감을 교세의 힘으로 벗고자 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대학 미래를 위해 10만 평의 토지를 매입할 만큼 행정가로서의 역할도 컸으나 이들은 오로지 ‘종교다원주의’ 올무만으로 선생님의 목줄을 죄었다. 사퇴를 요구하며 감신대 학장직을 흔들어 댔던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신학대학을 자신들 수중에 넣 을 생각이었다. 물론 여기에 해묵은 감리교 지역 정치도 작동했다. 당시 이북 출신 기독교인들 세력은 점차 줄었고, 부흥사들이 양산한 남쪽 교인들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교수직을 수행했던 이북 출신 마지막 학자였다. 좀 더 여유롭게 자연스레 세력 교체를 이룰 수 있었으나 부흥 목사들은 자신들 힘의 과시, 정당성 확보 등을 이유로 성급했고, 신학 문제를 이단 시비로 확대시켰다. 교세를 키운 부흥 목사들이 교단 권력자가 되었고, 신학교 이사로 학문에 간섭하면서 마침내 종교재판이 열렸으며, 만장일치로 선생님을 출교시켰다. 이렇듯 교권의 학문 침탈을 예감한 선생님은 이런 교단 분위기를 교수회에 전달했고 대응을 호소했으나 이사회와 연줄 닿은 교수들 몇몇이 오히려 안에서 선생님을 흔들기 시작했다. 교권의 힘, 종교권력에 편승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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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생님도 살길이 없지 않았다. 많은 목회자와 제자들이 선생님을 옹호했고, 존 캅을 비롯한 서구 유명 신학자들이 그를 지지하는 서신을 보냈었다. 일간신문에 두어 차례 실린 여해 강원용 목사의 글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종교 문제가 이처럼 사회 여론을 주도한 경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필자 알기로 그를 아끼던 교단 정치가들 중 어느 누가 선생님께 타협을 제시했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신뢰를 공개적으로 철회하면 출교는 면해줄 것이라 했다. 교수(학장) 은퇴를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살길이 아니라 ‘죽는 길’로 여겼다. 신학 담론을 정치적 타협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신학이 교단의 잣대로 평가되는 것을 걱정했고 신학자들 스스로 자기 검열하는 현실을 깊이 우려했던 까닭이다. 그가 염려한 대로 선생님 사후 우리들 신학 풍토가 그리되었으니 슬픈 일이다. 당시 선생님은 자신을 덴마크 교회에 의해 내팽겨쳐진 키에르케고어와 동일시했다. 자신이 사랑하던 감리교회로부터 버려졌지만 후일 순 교자의 희생을 가슴 아파할 날이 올 것을 믿으며 버려진 것이다. 자기 동족으로부터 내쳐졌던 십자가상의 예수 역시 그의 심중에 떠올랐을 듯싶다. 자신 속의 분(?)을 삭이기 위해 얼마나 고 통했을까를 상상해봤다. 이런 와중에도 선생님은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의 앞길을 걱정했다. 당시 선생님은 가장 많은 제자를 키운 학자이자 선생으로 추앙되었다. 그럴수록 제자들이 한국 신학계를 위한 ‘노다지’가 될 것이니 ‘노터치’(No Touch)할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제자로 사는 길 또한 쉽지 않았다. 선생님이 우리들의 삶에 ‘명예’이자 동시에 ‘멍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다수는 기꺼이 멍에를 졌고, 선생님의 명예를 지키고자 이 자리를 만들어 여기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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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권을 지닌 부흥 목사들은 ‘교리수호대책위’를 꾸려 선생님 출교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맥락 단절된 가짜뉴스를 만들었고, 말뜻을 왜곡시켜 평신도들을 선동, 여론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특정 보수 신학자의 이론을 금과옥조 삼아 토끼몰이하듯 선생님을 종교재판의 길로 내몰았다. 당시 선생님의 생각은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동 ‧ 서양 신학자들 사유를 공감하며 전해준 것이었다. 서구적 사유에 경도된 기독교, 민중을 외면한 부르주아 종교 대신 아시아적 종교해방 신학을 주창하였다. 이는 탄생 백 주년을 맞은 심원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토착화신학의 대응 차원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 유동식, 윤성범의 토착화를 넘어선 이런 ‘전회’를 선생님은 자신에게 세례 베푼 신석구 목사의 유산이라 여겼다. 3.1선언 서명을 요청받 은 신석구는 당대 선교사들의 지시―정치적 일에 관여 말 것, 타종교인들과 협력 말것―를 생각하며 망설였지만 결국 반칙했다. 민족 ‘독립’을 위해 기꺼이 ‘선’을 과감히 넘은 것이다. 33인 중 끝까지 변절 않았던 신석구 목사를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종교재판 최후 변론 역시 그는 신석구를 언급하며 시작했던 것 같다. 감리교는 부흥 목사들이 좌지우지할 교단이 결코 아니었다. 종교재판 이후 그들이 접수한 감리교회, 감리교신학대학교, 과연 성공했는가? 종교재판 바로 그 사건 이후부터 감리교가 쇄락해 갔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자 세인들의 감각이다. 대학도 교단도 그리고 교회도 예전 명성을 잃었고, 인물도 키우지 못해 맛 잃어 짓밟힌 소금이 되었다. 시대 탓도 있겠지만 결국 사람의 문제이고 정신이 실종된 결과였다. 돈이 복음을 굴복시켰고, 자본에 교회를 팔았으며, 교리(교단법)로 자신들 타락을 무마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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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감리교 신학 역사는 교회권력 및 자본의 힘에 굴복당할 만큼 가볍지 않다. 얼마나 출중 한 사상이 감리교로부터 비롯했는가를 교단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선교 초기 서구 기독교를 다 같이 수용했음에도 감리교 선배들은 달랐다. 서세동점 시기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우리 민족 주체성을 버리지 않았고, 기독교사회주의를 수용, 발전시켰으며 이를 달리 수용했으며, 교파적 기독교를 넘어 자생적 환원운동을 일으킨 선각자들 모두 감리교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동‧서 하늘을 연결 지어 사유했고, 민족을 넘어 가난(계급)을 생각했으며, 교파 대신 기독교의 근원을 질문했다. 필자는 이를 주체성(토착성), 민중성, 전위성(근원성)으로 달리 일컫는바, 당시 이런 사유 체제를 감리교 밖에서 찾기 어려웠다. 이렇듯 민족, 이념 그리고 교리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창조적으로 사유했기에 선교의 주제가 개화, 독립이었을 당시 여타 교단에 비해 앞설 수 있었다. 이후 ‘사상’이 아니라 ‘제도’로서 교회가 중심되면서 친일 유혹에 굴복했고, 권력에 기생한 반공 기독교가 되었으며, 급기야 부흥사들은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만들고 말았다. 교회는 성장했으나 사람을 키우지 못했고, 건물은 커졌으나 영혼을 축소시킨 결과였다. 교회 성장이 틀린 것도, 불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단지 그를 위해 신학을 거부하고 신학자를 내친 것이 문제였다. 초기 역사를 회억할 때 해석 손정도의 기독교사회주의, 해천 윤성범의 성의 신학, 일 아 변선환의 종교(해방) 신학, 원초 박순경의 통일신학, 조화순의 산업선교는 거부할 것이 아니라 더욱 부각시켜야 할 자산이다. 자본에 영혼을 빼앗긴 성장주의, 교리주의, 교권주의를 교정, 치유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비롯하는 까닭이다. 본디 목회와 신학은 쉽게 일치되기 어렵다. 목회적으로 정당해도 신학적으로 틀릴 수 있고, 신학적으로 옳아도 목회적으로 수용키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하여 긴 시간 서로 존중하며 수렴되는 과정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이거늘 30년 전 우리 역사는 이들 차이를 종교재판으로 없이하려 했다. 이는 종교적 폭력인바, 사상적 퇴보를 낳았고, 교회를 타락시켰으며, 신앙을 교리로 축소시켰다. 신학교에 신학은 없고 목회 기술만 가르쳐지는 현실도 여기서 비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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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망우리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종교재판 현장 모습이 지금껏 생생하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지키려 금란교회로 향했으나 교회 출입문마다 건장한 사람들 몇십 명이 지켜 서서 학생들을 막아섰다.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학생들 상당수가 맞아 다쳤고, 그럴수록 재판 반대 구호를 교회 쪽으로 내뱉었다. 교회 안에서는 이미 교인들 수천 명이 방청객으로 앉아 ‘출교’를 소리치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으며, 강단에는 상당수의 종교 재판관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자리했다. 선생님을 심문하는 그들은 대개 후배였거나 심지어 배운 제자도 있었다. 그날 최후변론 자리에도 선생님은 한가득 책을 싸 들고 가셨다. 본인이 썼던 글과 말 내용이 이런/저런 책 몇 페이지에 있다고 밝히며 세상의 소리, 학문의 가르침을 외면치 말 것을 재판관들에게 단호히 일갈했다. 자신을 죽이라 외친 동족들에 대한 예수의 연민을 선생님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선생님은 종교재판 법정에서 홀로 고독하게 자신을 변증했다. 그때마다 방청석에선 교인들의 조롱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결국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출교’ 처분을 받으셨다. 이후부터 선생님을 교회 강단에 세우는 목회자는 처벌을 받았다. 진급중에 있는 이의 진급을 취소했고, 종교다원론자라는 낙인을 찍어 목회 길도 막았다. 이런 잔인한 현실을 목도한 선생님의 삶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정 또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선생님은 글을 쓰셨다. 원불교 대종사인 소태산 탄생 100주년 기념 논문을 오래전에 부탁받으셨던 것 같다. 더운 여름 한강변 산책하다 돌아와서 글을 쓰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가중된 고통이 선생님 삶을 일찍 마감토록 한 것이리라. 나는 선생님의 유고를 들고 가 원광대학교에서 글을 대독했다. 원불교 측에서 행사 전 선생님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준비해 두었다. 행사 후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생님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자 목사였음”을 증언해 주었다. 예수의 죽음을 보고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고백한 최초의 사람이 이방인 백부장이었듯이 말이다. 지금도 선생님의 죽음은 교회 밖에서, 아니 감리교 밖에서는 이렇듯 아프지만 귀하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30년,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어떤 성찰과 반성 없는 신학교를 비롯한 감리교단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적 영성가 이용도 목사를 내쳤던 감리교였기에 사실 큰 기대를 접은 상태이다. 물론 그를 다시 수용했지만 당시 태도가 불경스러웠다. 죄책 고백도 없이 사건 설명과 함께 고작 박수쳐 사건을 종료했던 것에 대해 분노가 생길 정도였다. 살인자(?) 안중근을 내쳤다가 다시 받아들인 가톨릭의 태도와 견줄 때 하늘과 땅 차이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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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리수호대책위를 이끌었던 고 김홍도 목사로부터 선생님 사후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수업 중인지라 경황이 없었으나 그분은 “나 김홍도야”라는 말로 통화를 시작했다. 전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대략 3개월 전쯤 정희수 UMC 감독이 재미 동문들과 함께 미국 드루(Drew)대학에서 <변선환 심포지엄>을 크게 열었다. 저명한 미 대학교수들이 참여했고, 한국에서도 제자 교수들 여럿이 함께했다. 이 사건을 「한겨레신문」 조현 기자가 “변선환 다시 부활하다”란 제목으로 종교란 전면에 기사화해주었다. 바로 이 기사를 접한 후 전화를 했던 것 같다. “나 아직 안 죽었어. 까불지들 마”로 말이 이어졌다. 엉겁결에 “저희도 아직 안 죽었습니다”로 응답했고, 수업중이라 전화를 끊었다. 이제 그분도 고인이 되었고, 교리 수호대책위도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선생님의 첫 제자들 다수도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역사는 바로 잡혀야만 한다. 이것이 “저희도 아직 안 죽었다”고 답한 이유일 것이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 며 선생님 소속했던 서울연회가 종교재판 20년에 즈음하여 「 보고서 」 를 묶어 낸 것을 알았다. 살펴봤으나 앞서 말했듯 한 사람 보수 신학자의 반박에 잇댄 평가를 결론 삼았다. 하여 우리는 새로운 󰡔 백서 󰡕 를 만들기로 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출중한 감리교 역사 신학자들의 도움 받아 출판되어 있을 것이다. 왜 종교재판이 벌어졌는지, 당시 법정에 섰던 심문관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여론몰이로 진행된 재판 과정이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왜 그들이 신학(사상)에 사형선고를 내렸는지 그리고 종교재판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제대로 짚어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아울러 그의 탄생 백 주년이 되는 해를 기려―대략 2025년 경― 선생님의 󰡔평전󰡕 도 몇몇 제자들의 수고로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풀어내면 과거 자신들 행위를 부끄럽게 여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때문에 학교를 떠나지 않고 목회자로 은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 제자들의 고백, 그의 신학을 사실 적합하게 느끼며 힘겹지만 씨름하며 살았던 교단 안팎의 목회자들이 증언도 수록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펼쳐낸 다차원적인 삶의 여정들 즉 학자는 물론 교회 감독, 위대한 설교자, 영성가, 문학가, 연극인, 평화 기획자, 환경실천가, 도시빈민 활동가, 대안학교 선생으로 살았던 흔적들도 모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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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도 감리교단에 종교재판의 망령이 떠다닌다. 선생님 손주뻘 되는 40대 현직 목사가 이런 올무에 걸려 고통 중이다. 기독교만의 그들 세상(중세)에서 일어났던 일로서 끝나야 마땅할 과거사임에도 말이다. 자진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 수가 부지기수인 정황에서 종교재판, 출교란 말은 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정작 자신들 시시비비를 정작 세상 법정에서 가리는 현실에서 종교재판의 권위가 얼마나 있겠는가? 예수를 희생양 삼았던 유대 성직자들처럼 그렇게 기독교 역시 그런 구조로 자신을 유지, 존속시켜왔다. 뭇 유대인을 죽였고, 유색인종을 희생시켰으며, 이웃 종교인들을 부정했으며, 급기야 성소수자들을 환자로 취급하고 있다. 자기 부정의 길을 가야 할 기독교가 타자 부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 결과였다. 우리 역사 속의 사건들, 4.3을 비롯하여 여순사건, 보도연맹 희생자들 모두가 동일선상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반공 이념으로 북을 적대하던 기독교가 이슬람과 반목했고, 이제는 우리 시대의 뭇 낯선 이들에게 정신적 폭력을 가했다. 정작 자신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종교권력의 허상에 갇혀있으면서 말이다. 선생님은 이런 기독교가 되는 것을 누구보다 앞서 걱정했다. 그럴수록 전통과 세상을 향한 열린 시각을 갖고 대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을 ‘변 실존’, 즉 거듭 변하는 것을 자신의 실존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향후 다른 30년을 달리 살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기독교를 추방하고 말 것이다. 종교재판 30년을 맞아 한국교회, 감리교단이 온몸으로 깨쳐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란 본래 ‘죽어야 사는 종교’라는 사실이다. 그런 종교여야만 우리 민족이 너그럽게 받아 줄 것이다.

끝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소환하여 종교재판 30년 이후를 걱정한다. 1901년 러시아정교회는 성직(교권) 제도와 사유재산 철폐를 주장하는 톨스토이를 종교 재판하여 출교시켰다. 하지만 많은 민중은 톨스토이를 지지했고 그의 정신을 따랐다. 그럴수록 러시아정교회는 그의 흔적을 지우고자 기를 썼다. 민중들 의식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톨스토이를 역사에서 지운 것 같아 그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컸다. 그의 신념과 주장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더 큰 시민적 저항을 마주하기 전에 한국교회가 유념할 역사적 교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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