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시재라

<그라시재라>, 조정 지음, 이소노미아, 2022년 6월

어릴 적 할머니의 곁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있었다. 잠을 청하려 누우면 바뀐 잠자리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묻느라 밤을 보내곤 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부산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던 곳은 전남 고흥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녹동이었다.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가 분명했고, 사실 태반은 이해도 못하며 들었지만 졸린 목소리로 그래도 손자의 말에 대꾸하며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저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책의 첫 장을 펼쳐들고 읽는 순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사실 명절에도 몇 시간을 가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평소엔 통화로 안부를 묻는 것 외엔 함께 보낸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며칠에 넘치는 정감을 나누느라 애썼던, 그래서 더 애틋했던 할머니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굳이 그 대화를 떠올린 까닭은 아마도 이 책을 받아들고 첫 장을 펼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서남 전라도 서사시’, 이것을 형식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아마도 싯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라도 방언과 억양을 살려 쓰여진 최초의 책이 아닐까 싶다. 그 언어를 글자로 옮겨놓은 것이라 사실 처음 대할 땐 낯설고 생경한 단어들의 잔치에 가깝다. 그래서 어쩌면 당황하고 책을 덮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라도 억양에 실어 이 줄글을 읊조리며 읽는 순간 이 글이 살아서 친숙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에겐 그 사람이 할머니였다. 아마도 특히나 전라도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 쉽게 이 문장들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시는 시인데 등장인물은 한 사람이 아니다. 본디 말은 혼자서 중얼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라시재라>의 싯구들은 가족, 지역공동체의 누군가와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시의 형태로 만들어놓았다. 모여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정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시라는 형태로 풀어놓은 것이다. 흡사 시골집 마당에서 흙장난을 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가 찾아와 마루에서 감을 깎고 있는 할머니에게 “성님 그거 아시요?”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소문은 발이 달려 옆집으로 달려가고 소문엔 어느덧 평단의 평론이 주렁주렁 달리는 일은 현대인들에겐 불쾌한 경험일 수 있으나 어쩌면 서로의 살뜰히 챙기는 공동체의 일면이기도 하다.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역사가 만들어낸 부조리의 경험이든, 어떤 폭력과 포학마저도 ‘말’을 통해 풀어내는 경험은 놀라운 일이다. 전엔 모두들 그렇게 살았으나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런 언어들을 많이도 잃어버렸다. 서로를 위로하거나 돌보고, 같이 울고 웃으면서 서로가 함께 혹은 우리가 되는 경험들을 좀체 하기 힘든 것이 지금의 우리네 삶이다. 특히 도시 같이 공동체성이 메말라버린 공간에선 특히나 더 그렇다. 이웃사람의 얼굴을 일 년에 한 두 번 볼까 말까하는 삶이라면 특히나 더 말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수다 떨기를 즐기고, 별스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입을 닫고 있으면 쿡쿡거리며 비집고 나오는 말을 참느라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의 기쁨은 그들을 통해 증폭되고, 슬픔은 보편의 경험을 통해 승화되고, 고통은 잊게 되는 경험을 우리는 하곤 한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관련된 책을 읽어도, 영화를 보고, 한껏 혼자 울고, 한껏 웃어도, 혼자만 볼 수 있게 글을 써보아도 할 수 없던 경험들이다. 우린 혼자 살게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아담에게 굳이 그의 천생배필을 찾아주려 온갖 애를 썼던 하나님은 결국 아담의 말벗 하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얼마나 공동체를 통해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작가인 조정 시인은 고향을 떠나 지금은 고양시에서 고양환경운동연합의 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간혹 대화 중에 비치는 인생의 여정은 세월호의 이야기와 강정마을을 담고 있었고, 지금은 고양시의 ‘산황산’이라고 하는 마을 산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쏟고 있다. 무학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가 골프장이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바람에 고사를 면치 못하고, 마을의 주민들도 날아드는 골프공에 피해를 입고, 제초제를 비롯한 비산농약이 염려되는데 골프장을 증설하겠다는 업자들과 이를 용인한 지자체가 있었다. 시인은 시 의회에 시민불복종을 상징하는 텐트를 쳤고, 몇 번의 철거시도에 저항하다 뜻밖의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많은 시간을 집이나 사무실이 아닌 허름한 텐트를 지키며 홀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출간 말미엔 개인적인 일들로 고통스러웠을텐데 이토록 아름다운 시집을 순산한 시인에게 이젠 하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하시길!

임준형(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