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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십자가의 수난
송병구  |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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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9월 17일 (토) 23:27:17
최종편집 : 2022년 09월 18일 (일) 01:09:10 [조회수 : 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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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캅카즈 지역의 대표 과일은 포도와 석류이다. 두 과일이 사랑받는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술과 음료 등 매력적인 쓸모 덕분이다. 성경에서 포도와 석류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많은 씨앗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보여주는 과일들로 유명하다. 포도주가 지닌 수난의 심벌처럼, 석류의 경우 단단한 껍질 속을 알알이 채운 붉은 씨앗들은 고통을 이겨낸 부활의 모습이다. 보티첼리 작품 ‘석류의 성모’에서 아기 예수는 손에 석류를 쥐었다.

 
  조지아에서 만난 포도와 석류, 자두와 수박 등 각종 과일은 얼마나 달고 풍성한지, 건조한 기후 속에도 여름의 풍요가 따로 없었다. 특히 포도는 가장 위엄있는 열매였다. 조지아의 포도주가 가히 세계적인 까닭은 이 지역은 세계 최초로 포도 농사를 시작한 땅이기 때문이다. 8,000년 전에 포도를 숙성시킨 흔적과 포도 씨앗이 든 항아리가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서로 포도주의 발원지라고 주장하며, 최고(最古) 경쟁을 해왔다. 그러나 구 소련 연방공화국 시절에 당국은 조지아를 와인(Wine) 주산지로 지정하였다. 지금도 조지아가 대표 와인으로 인정받는 배경이다. 아쉽게도 아르메니아는 꼬냑(Cognac) 생산에 만족해야 하였다. 물론 그 땅의 산물로 빚은 아르메니아사도교회의 성유(聖油)와 아라랏산 아래에서 자란 아르메니아 포도주는 여전한 자긍심이다. 

  포도를 처음 재배한 조지아답게 그곳에서 포도나무 십자가를 발견하였다. 트빌리시 시오니 교회에서였다. 시내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시오니교회는 마침 주일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뜨거운 햇볕 아래 지친 나그네가 되어 그늘을 찾던 중에 무심히 교회 정문 곁 가게에 들어갔다. 유리창 안으로 이콘과 성물이 비쳐 자연스레 발길이 끌렸다. 조지아에서 이틀째 살폈지만 아직 십자가다운 십자가를 찾지 못해 조바심이 들던 참이었다. 조지아정교회는 왜 자신의 십자가를 상품화하지 않을까, 푸념하던 중이다.

  그러다가 눈에 띈 짙은 고동색 나무 십자가는 바닥에 세워둔 까닭에 지나칠 뻔하였다. 손에 들고 자세히 보니 비로소 십자가 느낌이 났다. 아주 정갈한 나무는 그 소재가 포도나무라고 하였다. 십자가의 가로대와 세로대의 중심이 털실로 짠 조끼를 입은 모습이다. 게다가 십자가 가로대는 아래로 향해 활처럼 휜 채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제법 키가 커서 가슴에 품고 다녀야만 하였다. 눈부신 발견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진열대 위에는 손에 쥘만한 크기의 포도나무 십자가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조지아정교회가 달리 보였다. 예배당마다 걸려 있는 이콘 속 여주인공의 이름을 묻게 되었고, 가끔 시내 벽에 그려 놓은 십자가 표식의 의미도 들을 수 있었다. 조지아의 가장 큰 자랑인 포도나무의 명예는 바로 카파도키아 출신 성녀 니노(296~338/340)의 몫이었다. 주후 326년 조지아에 처음 그리스도교를 전한 인물인 니노에 이어 현재 조지아의 수호성인이며 국호 그 자체가 된 조지아(성 게오르기우스)가 그 뒤를 따른다. 흔히 성 게오르기라고 불리는데 이콘이나 문장에서 흰말을 탄 채 발아래 용을 향해 긴 창을 겨누는 용사의 모습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니노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십자가를 받았다고 한다. 조지아에 들어오려면 십자가의 가로대와 세로대를 분리하여 숨겨야 했다. 그리고 다시 잇기 위해 분리된 두 개의 나무를 머리카락을 잘라 묶었다. 이 때문에 십자가 가로대의 양 끝이 아래로 처지게 되었다. 마치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닦은 후 향유를 바른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연상하게 한다. 니노 십자가는 조지아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은 국민심벌이 되었다. 
  
  조지아에서 신앙의 중심 도시인 므츠헤타는 3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한복판에 있는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조지아 정교회의 대표교회로 니노의 신앙을 이어 왔다. 므츠헤타를 멀리 내려다보는 강 건너 언덕 위에 세운 쯔바리수도원은 조지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4세기 초 성녀 니노가 기도드린 후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세웠는데, 바로 그 자리에 쯔바리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쯔바리란 이름은 포도나무란 뜻이다.   

  돌아오는 길에 포도나무 십자가는 크게 곤욕을 치뤘다. 아제르바이잔 국경을 넘기가 버거웠다. 대형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손에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상태로는 비행기에 탈 수 없었다. 심지어 십자가를 잘라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들었다. 결국 아제르바이잔 공항직원의 친절한 도움으로 가까스로 화물로 보낼 수 있었다. 온몸을 비닐랩으로 둘둘 만 십자가는 영락없이 머리카락으로 꽁꽁 묶어야 했던 그 옛날 니노의 십자가였다.

송병구/색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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