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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김영봉  |  와싱톤 사귐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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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8월 29일 (월) 20:53:10
최종편집 : 2022년 09월 03일 (토) 23:30:46 [조회수 : 2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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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시리즈 “길을 찾다”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기 위해 감리회목회자 모임 <새물결>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이 작업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 잡히고 건강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아홉 번째 연재를 이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김영봉 목사(와싱톤 사귐의교회, 미국 버지니아)

<질문>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때로 이분들은 다른 이의 삶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손쉽게 규정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자칫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합리화하는데 쓰일 수 있는 위험이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음성과 이기적인 인간의 음성)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1.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자라가기를 힘쓴다

 

   
▲ 김영봉 목사(와싱톤 사귐의교회, 미국 버지니아)

이야기 하나 : 성경 공부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참석한 이들은 각자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가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던 한 자매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문제이신가요? 저는요, 하나님의 뜻은 너무 잘 알겠는데, 그 뜻을 행할 수가 없어서 문제거든요?”이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잠시 숙연 해졌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나오면 많은 이들이 ‘알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마음에 차오를 때 그리고 그 부정적인 감정이 돌처럼 굳어져 갈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마음을 풀고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지만 증오 하는 것을 통해 즐기는 은밀한 쾌감을 놓기가 싫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거부할 핑계를 지어냅니다. 부정한 욕망이 마음을 점령해 가는 것을 느낄 때, 그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벗어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변명하면서 그 욕망을 즐깁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은 점점 욕망에 사로잡히고 손과 발을 끌어들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행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떠나버렸고,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의 정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셨기”(롬 1:24) 때문이다. 인간의 죄성은 행할 의지를 병들게 했을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향한 지향까지도 꺾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마음의 지향이 되살아 나도록, 그 지향이 강해지도록 가꾸는 일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마음은 죄의 맛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행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맛에 물든 마음이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기쁨을 “맛보아 알아야”(시 34:8) 합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더 복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뜻을 향한 지향이 강해지게 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아야 한다”(<하나님의 음성>, 49쪽)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사귐을 통해 우리의 내면이 그분에게 온전히 조율되게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뜻이죠. 지속적이고도 깊은 영적 사귐만이 우리 내면에 퍼진 죄의 독소들을 치유할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향한 지향과 의지가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조율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빌 2:13)

 

2.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의 길에 있다

 

이야기 둘 : 딸 아이가 수시 모집 기간에 안정권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냈다. 정시 모집에서 더 좋은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서 일단 보험을 들어 놓기 위함이었다. 얼마 후 지원한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가 왔다. 일단 안심하고 정시 모집을 준비했다. 정시 모집에서는 실력에 약간 부치는 대학에 지원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합격한 대학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정시 지원을 포기하자니 아깝고, 포기하고 가자니 불안하다.

그 딸의 엄마는 새벽 기도회에 나가 기도한다. 매일의 기도 제목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은 오지 않았다. 결심해야 할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아서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불안해지는 만큼 기도도 간절해졌다. 간절히 기도함에도 응답이 없자 엄마는 내 마음을 이렇게도 몰라 주시느냐면서 하나님께 투정한다.

그 때 마음을 때려 치는 깨달음이 왔다.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이고, 하나님은 아무 데든 가라고 하시지 않을까?” 그 깨달음 앞에서 엄마는 하나님께 너무도 송구스러워 눈물을 쏟았다. 엄마는 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엄마도, 딸도 이미 입학 허가 받은 대학에 가기로 마음 정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지향의 문제이고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하려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결정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일수록 고민은 깊어지게 되죠. 학업이나 사업 상의 진로를 결정할 때도 그렇고,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그렇고, 중요한 수술을 결정할 때도 그렇습니다.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게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찾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안전한 길, 성공하는 길, 번영하는 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과 결정 자체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 선택과 과정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더 관심을 두시죠. 또한 선택과 결정 후에 어떻게 행하시느냐에 더 관심을 두십니다.

우리는 어느 대학에 입학하느냐에 관심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대학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입학하는 대학에서 어떻게 공부하느냐에 관심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해야 성공하느냐를 알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사업을 하든 그 사업을 예배처럼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어느 길로 갈까요?”라고 기도할 때, “네가 좋을 대로 해라”고 답하십니다. “좋을 대로 하라”는 말씀은 타락한 욕망을 따라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분별한 후에 마음의 방향을 따라 가라는 말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과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안전하고 평탄하고 성공하는 길만을 가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원하는 일들을 아무 장애 없이 이루어 가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역경과 환난을 각오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잊고 그분께 등 지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할 때, 유대에서 내려 온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바울의 허리띠를 자신의 허리에 두르고 예루살렘으로 가면 바울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예언을 듣고 신도들이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바울이 자신을 말리지 말라고, 모든 것을 각오하고 가는 길이라고 답을 합니다. 신도들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행 21:14)라고 말하고 말리기를 그칩니다. 신도들은 안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았지만, 바울 사도는 위험을 각오하고라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았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조율되면 우리 자신의 안전과 평안과 번영과 성공을 목적 삼지 않습니다. 현세적인 이익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 선택과 결정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를 생각합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근로 조건과 연봉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 땅에 얼마나 실현할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따지게 됩니다. 더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해지는 쪽에 등돌리고 더 낮아지고 약해지고 가난해지는 길을 택하게 되죠. 그렇게 하여 자신의 욕망은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의 뜻이 점점 커집니다.

 

3.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점된다

 

이야기 셋 : 한 교회에서 목회자 청빙 과정 중에 한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하게 했다. 예배가 끝난 후, 초청된 목사와 교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교인들은 그 목사의 신앙과 철학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 목사는 주어지는 질문들에 대해 변변히 답하지 못했다.

시간이 되어 임원회장은 목사에게 잠시 바깥에 나가 회의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했다. 교인들은 그를 청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임원회장이 그 목사를 불러 회의 결과를 알렸다. 그랬더니 그 목사가 일어나서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기도 응답을 받고 여기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 교회에 보내겠다고 제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그 말에 적지 않은 교인들이 당황하고 동요했다. 그때 한 원로가 일어나서 말했다.

“목사님의 말씀을 잘 알았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저희 교인들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목사님을 이곳에 가라고 하신 하나님이 저희가 믿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면, 저희에게도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그 목사는 얼굴이 붉어져서 자리를 떴다.

한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지체들의 ‘집단 영성’을 통해 분별 되어야 합니다. 권위주의가 강할수록 한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목사 혹은 중직 몇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혹은 환상이나 음성을 자주 듣는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는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에 대해 자신에게 특별한 권세가 주어졌다고 믿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때로 교인 모두가 반대하는 일을 목사의 기도 응답에 근거하여 추진하여 나중에 곤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지도자를 세운 까닭은 그를 유일한 계시 수단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체들을 한 마음 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행하도록 세워 주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빈 자리를 백이십 명의 신도들이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운 것(행 1:15-26)처럼, 혹은 안디옥 교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이방 선교의 부름을 분별하고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기로 정한 것(행 13:1-3)처럼, 한 공동체의 지도자는 계시의 독점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체들과 함께 분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유욕, 독점욕 그리고 지배욕에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마음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왜곡하고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 20:7)는 계명을 어기는 행동이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신성모독이요 하나님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망령된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를 삼가해야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4. 눈 딱 감고 하나님께 맡긴다

 

이야기 넷 :한 교회가 오랫동안의 공백기를 거쳐 목사를 초빙했다. 그 목사는 침체된 교회를 되살려 내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좋은 목사님을 보내 주셨다”고 반겼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서 숨겨진 문제가 드러났다. 목사는 버티려 했고, 임원들은 그 목사를 보내는 것이 모두에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임원회장은 교인들에게 “목사님이 떠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물었다.

“하나님께서 이 목사님을 보내 주셨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보낸다는 겁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뜻은 자기중심적이고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한계 안에 있는 인간은 현재만을 보고, 영원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십니다. 현재의 재앙은 미래의 눈으로 보면 축복일 수 있고, 오늘의 축복은 내일의 눈으로 보면 재앙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면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 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마음 뜨거워지게 하는 가사이기는 하지만, 이런 태도로 살려 하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사건건 계시로 응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제대로 보입니다. 길을 가기 전에 그분의 뜻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예언자라 불리우죠. 보통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 그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지는 바를 따라 조심스럽게 나아갈 뿐입니다.

폴 투르니에가 <모험으로 사는 인생>에서 한 말은 믿음의 여정을 어느 정도 걸은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공감이 됩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단계마다 길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눈 딱 감고 자신을 내어 드려야만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88쪽)

몇 년 전 새로운 임지에 부임할 때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지금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부디 그렇기를 바라지만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이 교회를 떠날 때, 저도, 여러분도 저의 부임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100%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다면 오히려 긴장하고 의심할 일입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잠잠히 기도하고 정직하게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면 되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안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죄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인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내 모든 길을 지키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을 아는 것에 목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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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39.7.55.223)
2022-09-07 11:25:51
10ㅡ1.요셉은 꿈꿀 때에 자기 후손이 노예가 되는 꿈도 ㅇ되는 꿈도 예언차원에서 꿨어야하는데 안 꾼 것은 신이 침침묵했기
때문이다.출애굽이 앞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아직은 몰라야 했나?물론 장차 즉 출애급후에는 가나안을 주겠다고 미리 ㅇ예언하기는 한다마는...요셉후손이 애굽에서 창성한다 했는데 그들이 노예가 된다는 예언은 없고...도대체
필요한 면만 설교하고 불리한 것은 빼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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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땡2 (27.100.163.45)
2022-08-30 04:12:47
목사 청빙법을 제정하시라
위에 글을 동감하며 부끄러운 일이고 전부이렇다고 하는 것은 아님을 전제로 드리는 글입니다. 교회 인사구역회나 후임목회자 청빙위원들은 후임 목회자 청빙과정에서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를 볼줄아시는지
건강한 교회되려면 목회자 청빙법을 제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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