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인간들이 주물러 만든 神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22년 08월 03일 (수) 04:13:00
최종편집 : 2022년 08월 03일 (수) 04:13:53 [조회수 : 1071]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정말이지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들을 간과하거나 묵과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근한 예의 하나로 성경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그렇습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길잡이입니다. 캄캄한 망망대해의 등대와도 같습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은 있어도 없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식상해하실 줄 알지만 제가 말하고 또 말하며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 안에서 형제 되고 자매 된 여러분,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감히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되어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성경 말고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성경과 다르다면 누구의 말도 믿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성경을 뛰어넘어 성경과 다른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그에 속하고, 이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유의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런 사람의 하나로 우리에게도 소설 <침묵>에 의해 널리 알려진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1923-1996)의 하나님에 관해서 그의 대표작 <침묵>을 중심으로 말씀드려 보려 합니다.

저는 작가로서의 엔도를 좋아합니다. 그의 문학성에 감탄하며 사랑합니다. 이는 물론 저뿐이 아닙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몇 번인가 오른 바 있는데,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이 상을 받게 되었을 때 일본의 많은 문학 연구자들과 독자들은 오에보다 엔도가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며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신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배척합니다. 그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주물러 만든 신을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졸저 <엔도 슈사쿠가 빛어만든 神>(08.7.22. 충남대학교출판부)에 상술했고, 이 글에도 이에서 차용해 쓴 부분이 많음을 밝혀 드립니다.]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예수회(Society of Jesus) 설립자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규수(九州) 지방의 가고시마(鹿児島)에 첫발을 디딤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불모의 땅이니 포교가 쉬울 리 없었지만, 우리 조선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영주들이 그에게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들이 그런 것은 종교적 이해가 있어서가 아니라 포르투갈 선(船)을 통한 무역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권력의 비호아래 신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따라서 기독교는 계속적으로 성장하여 한 때 30만의 신도를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의 총인구가 2천만에 불과하던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총인구 대비 기독교인 수는 1.5%로 현재의 일본 기독교인 비율을 2배 이상이나 상회하는 정도였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바쿠후(幕府; 1192-1868년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한 세습적 군사 독재자인 쇼군<将軍>의 정부)는 극심한 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자기들에게는 권력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던 일본인 신도들이 외국인 지도자 신부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절대적으로 복종(순종)하는 것을 보고 불안을 느꼈던 것이지요.

바쿠후는 처음 기독교도의 처형 방법으로 화형(火刑)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신도들은 육체가 불타 죽기 전에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주를 찬양하라!’ 외치기도 하는 등 신앙심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신도들이 영광스러운 순교를 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쿠후가 생각해낸 것이 신도들을 배교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고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문이라는 것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구덩이 매달기(穴吊り)였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은 십자가형(十字架刑)·불태워 죽이기(火あぶり)·수책(水磔)·물 고문(水責め) 등의 방법으로 고문도 하고 처형까지 해 보았으나 배교하는 선교사를 한 명도 얻지 못 했습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방법이 구덩이 매달기였습니다.

구덩이 매달기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 고문 방법이요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깊이 판 구덩이에 오물을 넣은 다음, 그 위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데, 그대로 두면 머리에 피가 고여 죽는 시간을 단축시키므로 이마나 귀 뒤 같은 데에 칼로 작은 상처를 내어 피가 조금씩 흐르게 해서 고통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입니다. 대개는 하루 이틀로 숨을 거두나, 강인한 사람은 1주일 이상이나 견디기도 했다고 합니다.

<침묵>은 이 같은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주인공은 로드리고라고 하는 이름의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고문에 의한 육체적 고통도, 신도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보는 정신적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도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당신을 믿는 신도들이 극심한 고문으로 죽어가는 데도 매미는 여전히 울어대고, 하늘은 파랗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그런 침묵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드리고는 점차로 그 같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과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서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생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에서 작가 엔도는 자의적으로 자기의 하나님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엄격한 부성으로서의 하나님(父なる神)이 아니라 자애로운 모성으로서의 하나님(母なる神)입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그 같은 자기의(자기가 만든) 하나님이 동양의 일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그러며 그는 부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서양 사람들이 입는 양복으로 비유하고, 모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일본 사람들의 몸에 맞는 일본 옷(和服)으로 비유하며, 일본 사람들의 몸에 맞지 않고 헐렁헐렁한 양복을 몸에 맞도록 일본 옷으로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의 기독교 토착화인 것이지요.

그런 엔도는 <사해의 주변>이라는 소설에서, 쥐새끼라는 별명의 사내가 아우슈비츠 형무소에서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들어가게 되었을 때 극도의 공포심으로 오줌을 질질 싸게 되는데, 그 옆에서 예수도 같이 오줌을 싼다고 하는 동반자로서의 예수를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사랑만 있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침묵>의 세계를 주도하는 로드리고의 예수는 어떨까요. 로드리고는 체포되어 숱한 고초를 다 당하며 갖가지 회유에도 잘 견디나 결국 배교의 길을 걷고 맙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침묵>의 클라이맥스로,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를 그대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제 나름으로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후미에’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침묵>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후미에(踏絵)’라는 말은 문자대로 하면 ‘밟는 그림’이라는 뜻이 되는데,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7·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바쿠후)에 기독교 신도라고 의심이 가는 사람에게 밟게 하여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신앙을 버린다는 것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해 만든 도구입니다. 밟는다 해도 얼굴표정을 살펴 신도를 가려내기도 했습니다.

 

   
▲ 후미에

여명의 희미한 빛에 로드리고의 닭의 그것과도 같은 목과 쇄골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양손으로 후미에를 들어 자기의 볼에 대었다. 후미에 속의 예수가 슬픈 눈빛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본다.

로드리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 나의 마음속에 살아온 그것을 나는 이 발로 밟으려는 것이다. ‘아, 아프다!’ 로드리고는 떨었다. 발을 들었다. 발에 둔하고 무거운 아픔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정결하다고 생각해온 것, 인간의 이상과 꿈으로 가득 채워진 것을 밟는 것이다.

이 발의 아픔. 그 때였다. ‘밟아라!’ 라고 동판(후미에)의 그 사람은 로드리고를 향하여 말했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알기에 십자가를 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로드리고가 후미에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에서 울었다.

감동적이기까지 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의 예수(=하나님)는 다름 아닌 엔도가 조소(彫塑)하여 만든 하나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의 하나님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드리고가 처한 입장에 대하여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후미에를 밟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엔도가 <침묵>의 세계를 통하여 강조하려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습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公義)를 조화롭게 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과 벌을 공평하게 쓰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엔도의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그의 하나님은 사랑만 있고 공의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엔도가 하나님을 모성으로서의 하나님(母なる神)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인데, 하나님의 속성 중 사랑만을 강조한 결과입니다. 그것도 성경을 자의로 해석하여, 라기 보다 무시하고 자기의 감각에 의지한 결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면 ‘사랑 덩어리(愛の塊)’라 한 엔도의 말을 빌려 쓰기도 하는데, 외형적으로 보면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라고 한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시니 달리 말하면 ‘사랑 덩어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엔도가 말하는 사랑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엄연히 다릅니다. 여기에서 다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엔도가 말한 하나님의 사랑은 로드리고에게 후미에를 밟으라는 사랑이고, 성경의 하나님은 그럴 경우 밟지 말고 순교하라는 사랑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나약하여, 어리석어 잘못을 범했을 때 눈감아 주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당신을 짓밟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앞에서도 봤듯이 로드리고가 아무런 아픔도 없이 후미에를 밟은 건 물론 아니었습니다. 번뇌로 인한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때 후미에 속의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밟아라. 네 발이 지금 얼마나 아프겠느냐. 지금까지 나의 얼굴을 밟아온 사람들처럼 밟는 거야. 그 발의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너희와 그 아픔을 같이 하겠다. 그래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니까.

저는 실제의 예수, 하나님이라면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고, 밟지 말고 죽으라 했을 거라 전술했습니다. 아니면 힘들지만 참고 견디라고 힘을 북돋아 주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같은 뜻이지만,

이제까지 말씀드린 <침묵>의 하나님은 엔도가 자기의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이 맞지만, 어떻든 상상력의 산물인 소설 속의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과 다른 어떤 하나님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참고로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조금씩은 다 다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다른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칫 자기류로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것을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영감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되고, 그러니 기도하며 읽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리며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자매 여러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께 자신을 모두 의탁하여, 맡겨, 그분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하늘나라,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7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한산 (182.216.13.90)
2022-08-03 08:21:37
주물럭의 원조는 바울입니다. 처음의 주물럭 공장은 니케아종교회의입니다. 삼위일체도 주물럭거려서 제품화했지요...
리플달기
6 0
일봉성도 (122.101.20.19)
2022-08-05 13:41:24
정치적인 사설 말고 이런 칼럼을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성경적인 칼럼을 쓰시니 참 내용이 좋습니다.
앞으로 정치적인 내용 말고 이런 좋은 내용을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극좌의 대명사이신 임종석 목사님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좌 편향적인 정치적 칼럼은 다시 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립적인 시각이 아닌 편향적인 글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할뿐더러 본인의
정치적 사상을 의심을 받고 오해받기가 쉽습니다.
그래도 쓰시겠다면 말릴 수야 없겠지만 말입니다.
리플달기
2 2
한산 (182.216.13.90)
2022-08-04 22:56:25
고등학교때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에서 충격적인 내용은 러시아정교회 신부가 예수에게 하는 말이다. " 에수님,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체계를 다 잡아놨기 때문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말에서 인간이 신에게 이렇게 도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인간의 오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오만이라고 느꼈으나 지금은 오만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본다. 신은 결국 인간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교리를 인간들이 만들어도 신은 옳다 그르다 답변이 없다.삼위일체가 맞는지? 여호와와 예수가 동격인지? 인간들이 짖고 까불어 교리를 만들고 허물고 바꿔도 침묵한다. 왜 침묵할까?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없는 신, 존재하지 않는 신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없는 신을 대신해 인간들이 교리 만들고 자기 교리가 옳다고 서로들 싸워왔다.
리플달기
3 1
김경환 (211.54.116.232)
2022-08-03 12:27:32
임 칼럼니스트의 주장이 맞는다고 한다면...
역사상 진정한 기독교인은 단 ‘하나’만 있었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리플달기
3 0
김경환 (211.54.116.232)
2022-08-03 12:42:08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깨달은 직후에는 유대교와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함마드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유대교 율법학자들과 舊約을 놓고 벌인 논쟁에서 무함마드가 무참하게 깨어졌다. 이때부터 무함마드는 예루살렘이 아닌 메카 쪽으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무함마드와 유대교 율법학자 간의 종교논쟁에서 이슬람교의 교주가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논리전쟁에서 지고도 살아남은 게 이슬람교다. “배째라!”면서 믿는 데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리플달기
2 0
한산 (182.216.13.90)
2022-08-03 07:45:49
기독교의 역사자체가 인간이 여호와를 주물럭거리면서 만들어온 역사입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신학자들이 주물럭거리고 목사들이 그 해설을 따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여호와는 수없이 주물럭거려진 결과물이고 지금도 주물럭거리고 있습니다. 잘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리플달기
5 0
한산 (182.216.13.90)
2022-08-03 07:27:37
성경만 믿으라고요? 성경을 읽고 이해를 하는 것이 저마다 다르고 교파마다 다르고 신학자마다 다른 데 도대체 어느 이해가 옳은 이해입니까? 그 중에 정통으로 인정한 내용만을 믿으면 되나요? 그런데 정통으로 인정한 내용도 시대상황에 따라 또 바뀌는데요?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말이 공허한 이유를 아시잖습니까? 돌아가야할 그 성경을 이해하는 방향애 많이 다르니까 도대체 어느 해석을 따라야 하는지 혼란은 계속 될 뿐입니다. 내가 복음, 네가 복음이 되는 것이지요.내 성령, 네 성령이 다르지요. 공허한 하나마나한 소리는 그만하시지요...
리플달기
4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