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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Undine, 2020)
이진경  |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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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8월 02일 (화) 01:31:38
최종편집 : 2022년 08월 02일 (화) 01:34:33 [조회수 : 2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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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네》 (Undine, 2020)

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한 영화의 소재가 되는 문화나 문학, 혹은 신화나 전설 등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로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영화 《운디네》에 대한 개인적 감상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쩐지 지금은 다소 세계 영화의 주변부가 된 듯한 인상을 주는 독일 영화계에서 그래도 그 이름으로 주목할 만한 감독인 크리스티안 페촐트(Christian Petzold)의 최근 영화라기에 기억해두었다가 우연히 한 플랫폼에서 무료로 풀린 것을 보고 느긋하게 보기 시작한 영화가 바로 《운디네》였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여자의 직장 근처 카페에서 이별을 고하는 남자에게 주인공 운디네는 쉬는 시간에 다시 온다며 남자에게 30분 동안 자신을 기다렸다가 자신이 돌아오면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라고 한다. 이와 함께 여자는 자신을 떠난다면 당신을 죽일 거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무정한 남자는 헛소리 말라며 결국 다른 여자에게로 떠나버리고, 다시 카페로 돌아와 남자의 부재를 발견한 여자는 절망과 분노 가운데 맞은 작은 사고 속에서 또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다시 찾은 새로운 사랑이라는 소재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인가 싶던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갑자기 어느 순간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당혹감의 큰 부분이 앞서 말했던 선지식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독일 사람이었다면 ‘운디네’(Undine)라는 이름을 통해 이미 어떤 상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운디네는 유럽의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14세기부터 독일문학에 등장하여 발전된 물의 정령에 대한 관념은 마침내 1811년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é)의 소설 『운디네』를 통해 그 이름과 성격이 확정되었다. 푸케의 작품 속에서 물의 정령 운디네는 젊은 기사와 사랑에 빠진 후 그와 결혼하여 인간의 영혼을 얻게 된다. 하지만 금기를 어긴 남자로 인해 운디네는 영혼을 잃고 다시 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운디네는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그 남자를 죽이고 슬픔에 잠긴다. 푸케의 신화적 모티프는 많은 동시대와 후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였다.

이런 운디네의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영화는 처음부터 다르게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는 바로 이 신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운디네는 베를린의 도시개발 전문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관광 가이드이고, 그녀의 새 연인 크리스토프는 물밑에서 용접 작업을 하는 산업 잠수사다. 감독은 물의 정령 운디네의 신화 이야기와 냉전시대에 둘로 나뉘어 있었던 도시 베를린의 역사를 직조하여 사랑의 이야기에 새로운 색체를 더한다. 그리하여 《운디네》는 신화와 역사, 물과 사랑과 배신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신비하게 어우러진 영화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영화 내내 유일하게 흐르는 배경 음악은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을 편곡한 바흐의 솔로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3번 D단조(BWV 974)의 2악장 아다지오다. 때때로 화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고요하고 깊게 흐르는 피아노의 선율은 앞으로 이 영화와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 것만 같다.

간단히 말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아 8:6) 인간의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랑은 매우 자주 죽음과 연결되어 등장하곤 했다. 죽음은 사랑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이자 때로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각오한다. 그러니 그 배신의 대가 역시 죽음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영화, 《운디네》는 그런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역시 죽음으로밖에는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이었다. 죽음으로밖에는 증명할 길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 역시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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