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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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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7월 31일 (일) 12:52:07 [조회수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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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창 3:8-11
(2022/07/31, 성령강림 후 제8주)

음성으로 듣기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 숨바꼭질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서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입추 절기가 시작됩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절박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때를 한껏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 세계를 보노라면 이들이야말로 진짜 지혜자가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속상해 하지도 않고, 누가 알아준다 하여 우쭐거리지도 않는 그 담담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최근 며칠 사이 학교 선생님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다들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대개는 다른 이들이 꺼리는 험지에 자원해서 간 분들이었습니다. 아이들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호명하거나, 상처를 감싸려 애쓰는 모습이 참 거룩해 보였습니다.

삼척에서 초등학생들과 동고동락하는 권일한 선생님의 책 <선생님의 숨바꼭질>을 서가에서 찾아 읽었습니다. 숨바꼭질 놀이를 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술래도 숨는 아이도 즐겁기만 합니다. 술래가 숫자를 세는 동안 아이들은 어디에 숨을까 잠시 고민합니다. 그러면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공간이 새롭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술래의 눈길을 피해 한 장소에 몸을 숨긴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을 때 세상은 돌연 신비한 곳으로 바뀝니다. 그때 “술래는 보물을 찾는 사람으로 바뀌고 숨은 아이는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이 됩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익숙한 공간을 낯설지만 신비한 곳으로 바꿉니다. 권일한 선생님은 숨바꼭질에 빗대 교사의 사명을 설명합니다. 교사는 꼭꼭 숨은 아이들의 마음을 찾는 술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음 찾기 숨바꼭질이다. 슬픈 마음, 두려운 마음, 화난 마음, 외로운 마음을 감추고 누군가 찾아주기를 기다린다. 마음이 아파 숨었지만 혼자 남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아무도 아이 마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른들이 바빠서 아이 마음을 모른다면, 자기들 일에 빠져 아이 마음을 살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놔둔다면? 혼자 하는 숨바꼭질은 비극이다. 숨바꼭질은 찾아내는 기쁨, 누군가 가까이 다가올 때의 긴장감, 발견되는 순간의 아쉬움이 있기에 재미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숨바꼭질은 잔인하다. 그러면 아이들이 ‘저 여기 있어요. 이리로 오세요. 여기 있다고요!’ 하고 소리친다. 구석빼기에 숨어 자기를 봐달라고, 제발 찾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마음을 읽어달라고 외치는 아이, 아무도 듣지 않아 서서히 마음을 닫아버린 아이, 기다리다 지쳐 웅크린 아이, 누군가 다가와 손 내밀어주기를 기다리는 아이…….”(권일한, <선생님의 숨바꼭질>, 지식프레임, p.6)

너무 잘 숨어서 술래가 도저히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파하고 저마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숨죽인 채 숨어 있던 아이는 나중에야 놀이가 끝났음을 알고 속상해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숨바꼭질의 묘미는 잘 숨는 데도 있지만, 발견되는 데도 있습니다. 발견되었다고 하여 화를 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숨바꼭질은 잔인하다’. 정말 그렇습니다.

• 너 어디 있느냐?
따지고 보면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숨바꼭질을 하며 삽니다. 인간은 다면체입니다. 남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모습도 있지만, 한사코 숨기고 싶은 모습도 있고, 숨기고 있지만 발견되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른들 속에도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는 말은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누군가 그 마음을 알아보고 함께 공감해줄 때 우리 속의 얼음이 녹곤 합니다. 처음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대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속에 있던 얼음이 녹아내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930년대의 신비주의 시인 이용도 목사는 원망, 불평, 이기심 등은 전염병과 같아 자신을 죽이고 남의 가슴에 살촉을 박아 죽게 하는 악독한 병균이지만, 그 모든 균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눈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동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이 쏟아질 때 원망, 시기, 불평, 이기적인 행위 등 모든 불신의 병균이 다 죽고, 따스하고 온유하고 예쁜 새 마음이 돋아난다고 노래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으면 죽지도 않으려니와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신처럼 되고 싶은 욕망은 우리들 속에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강력한 특권이자 발언권입니다. 그것을 소유한 이들은 자기 의지를 다른 이들에게 부과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 수족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들큼한 쾌락입니다. 그 쾌락에 중독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깁니다. 그런 허위의식을 부추기는 이들이 곁에 있다면 더 심각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입니다만 지위와 사람됨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이들일수록 겸손하게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신처럼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직면한 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수치심은 숨기고 싶은 것이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 경탄하며 서로를 바라보던 이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 앞에 있는 자기를 의식했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자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렸습니다. 수치심에 이어 찾아온 것은 죄책감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남자를 부르시며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이 머무는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 속에 담긴 속뜻은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구나’입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라는 말속에 힌트가 있습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얼굴 앞입니다. 얼굴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일종의 은유로 여기는 게 좋겠습니다. 죄는 소외疏外시키는 힘 즉 멀어지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은 소외를 극복하고 가까워지게 하는 힘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무 뒤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첫 머리에서부터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몸을 웅크린 이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가 벌려놓은 거리를 사랑으로 좁히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 하나님을 찾아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주님께로 돌아가자고 권고합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살 길입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뜻하는 테수바(teshuvah)는 ‘돌아섬(return)’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답(answer)’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응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르심이 없다면 응답도 불가능합니다. 예언서에는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초대가 넘칩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애 3:40)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호 6:1)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백성에게 염증을 느끼셨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내 곳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지은 죄를 다 뉘우치고,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호 5:15a).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대개 환난과 고초를 경험할 때입니다. 생의 한 복판에서 주님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그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그것을 ‘복된 고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호6:3).

지금 곤고한 시간을 보내는 분이 계십니까?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속에서 걷는 것처럼 삶에 지친 분들이 계십니까? 무의미의 심연 속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잠시 숨을 고르고 여명처럼, 가을비처럼, 봄비처럼 오시는 주님을 떠올려보고 느껴보십시오. 오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사나 경배가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특정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지금 곤경에 처한 약자들을 돌보는 것, 냉랭한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렇게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J. 헤셸의 말이 참 적실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은 그분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찾음 없이 그분은 도우실 수 없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36)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하나님을 찾아내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등의 죄가 우리 눈을 가려 오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은 오직 주님의 빛 안에서만 그분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둠 속에 갇힌 존재임을 인정하고 빛을 갈망할 때 주님의 은총이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원하십니다.

• 희망의 뿌리
소년 시절의 예수의 모습이 성경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예수는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저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습니다. 문득 예수가 어디 있나 둘러보다가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습니다. ‘사흘’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사흘은 그들의 영혼이 까맣게 타들어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온갖 나쁜 상상을 다 하면서 애를 태웠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흘 동안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사흘은 그믐달이 지고 초승달이 떠오를 때까지의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집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 개념입니다.

애를 태우며 소년 예수를 찾아 나선 그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에서 우리는 얼핏 인간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 희망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의 숨바꼭질,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찾아 나선 인간의 절박함이 만나 구원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가 평화와 입을 맞추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이 자부심과 긍지를 품고,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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