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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연회 감리사협의회, 스페인 연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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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6월 26일 (일) 20:26:52
최종편집 : 2022년 07월 01일 (금) 14:24:10 [조회수 :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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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연회 감리사 연수중 몬세라토 수도원에서

충청연회(유명권 감독) 제12기 감리사협의회(회장:김화식 감리사 총무:여인달 감리사)가 지난 14일~24일까지 열흘간의 일정으로 스페인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유명권 감독님의 헌신과 섬김의 리더십으로 참석자 모두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연수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감리사들은 연수에 임해 더욱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고 남은 임기 동안 각자 섬기는 지방의 발전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며, 각자의 이해를 내려놓고 연회의 모든 일에 성실히 협력하기로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감리사협의회 임원들의 철저한 준비로 시간시간 은혜로운 연수가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연수가 허술하게 준비되면 얻는 것 없이 시간과 돈만 허비하게 되니까요.

익투스여행사 대표 서나영 장로(중앙연회 유럽지방 로마연합교회)의 탁월한 기획과 세심한 배려 그리고 헌신에 깊이 감동받았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하는 식사와 호텔, 스케쥴, 그리고 처음 경험하는 도시 밤마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또 현지 가이드(박홍구 신학생)는 박식한 지식과 경험으로 중세 스페인 역사, 문화예술에 대해 잔잔하게 설명하고 안내하여 개신교 이전의 카톨릭형성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리고 싶습니다.

참석한 대부분의 감리사님들이 형편만 된다면 다음에 다시 한번 연수의 기회를 갖자고 할 정도로 의미가 있고 감동이 되는 연수였습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건강하게 귀국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스페인을 좀 더 자세히 안내하기 위해 익투스에서 제공한 핸드북을 올려봅니다.

(핸드북 자료는 ‘ENJOY 유럽’, 백과사전, 그리고 몇몇 블로그를 참조해 편집했음)

 

 

스페인 Spain

   
 

위치 : 유럽남부 이베리아반도  
인구 : 47,431,256명(2020년)  
수도 : 마드리드  
면적 : 505,991㎢  
공식명칭 : 스페인 왕국 (Kingdom of Spain)  
기후 : 지중해성기후  
민족 구성 : 갈리시아족, 바스크족, 카스티야족  
언어 : 스페인어  
정부/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 양원제  
종교 : 로마가톨릭(76%) 이슬람(2.5%) 개신교(0.25%) 무교(19%) 
화폐 : 유로 (€)   
국화 : 오렌지꽃, 석류(준국화)  
대륙 : 유럽  
국가번호 : 34  
전압 : 230V / 50Hz  

  스페인 왕국(스페인어: Reino de España 레이노 데 에스파냐), 약칭 스페인(스페인어: España 에스파냐)은 유럽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스페인의 면적은 505,990 km2 (195,360 mi2)으로, 서유럽과 유럽 연합에서는 영토가 두 번째로 넓으며, 유럽 국가 전체에서는 4번째로 영토가 넓다. 인구는 유럽 전체에서 9번째로 많으며, 유럽 연합에서는 가장 많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다른 주요 도시에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세비야, 빌바오, 말라가 등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35,000년 전 이베리아 반도에 호모 사피엔스가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니키아, 고대 그리스, 켈트, 카르타고 문화와 이베리아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기원전 200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히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독일 부족이 중앙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서고트족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정복해 스파니아라는 관구를 설치했으나, 곧 서고트 왕국이 다시 이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8세기 초, 서고트 왕국은 우마이야 왕조의 무어인들의 공격으로 726년 멸망했고,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이 되었다. 이후 약 7세기 동안 레콩키스타가 일어나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르 왕국과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등장했으며, 1492년 이 국가들의 대부분은 가톨릭 군주라는 이름 하에 스페인으로 통합되었다.

  근대 시기에 스페인은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었고, 많은 문화적, 언어적 유산을 남겼다. 오늘날 스페인어 사용자는 약 5억 7,000만 명에 달하며, 스페인어는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되었다. 스페인 문화의 황금 시기에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등장했고, 이 시기에 돈키호테가 출판되었다. 오늘날 스페인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세계 문화 유산을 보유한 국가이다.

  스페인은 세속 국가이자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로, 펠리페 6세를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선진국에 속하며 고소득 국가이며 14번째로 경제 규모가 크다. 스페인은 유엔, 유럽 연합, 유럽 평의회, 이베로아메리카 국가 기구, 지중해 연합, 북대서양 조약 기구, 세계무역기구,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솅겐 지역을 비롯한 여러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다. 또한 G20의 공식적인 회원국은 아니지만, 스페인은 G20 회담에서 영구 초청국의 지위를 확보해 사실상 G20 회원국으로 보기도 한다.


국명

  스페인 헌법에서는 국명을 에스파냐(España)로 표기하고 있으며 외교 관계 등에서 사용하는 정식 국명은 에스파냐 왕국(스페인어: Reino de España)이다. 현재 대한민국 및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스페인(Spain)은 영어식 국명이다. 자국어 표기 및 원어 발음과 차이가 있어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에스파냐"로 표기하였으나 정착되지 못했고,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스페인 대사관"으로 호칭하고 있다. 과거에는 한자 음역인 ‘서반아(西班牙)’로 부른 적도 있었으나, 21세기 들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국명의 어원

  España라는 국호의 이름과 영어의 동의어 "Spain"이나 "Spanish"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Hispania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시대에 이베리아 반도를 지칭했던 Hespe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며, 이는 시적 용어였다. 고대 그리스인의 개념에서 이탈리아는 "서쪽의 땅"이거나 "해가 지는 곳"을 의미했으며, 이를 두고 그리스어로 Hesperia 혹은 Εσπερία로 썼다.

  카르타고인의 관념에서 스페인은 Ispanihad으로 불렸으며 "토끼의 땅", "가장자리"를 뜻했다. 이는 지중해의 끝에 해당함을 가리킨다. 본디 히스파니아에서 태어난 하드리아누스의 통치 기간 중 동전에 새겨진 로마제국의 영토에서 스페인 위에는 여성의 모습과 함께 발 쪽에 토끼가 새겨져 있다


역사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로마 시대 옛 이름인 히스파니아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는데, 곧 히스파니아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성장하였다. 중세 초반에는 게르만 족의 지배를 받았고, 그 시기 이후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오랜 투쟁과 전쟁 끝에 1492년 기독교도들의 왕국이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절대 왕정과 식민지 개척을 추진하여 스페인은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내분 끝에 이러한 전성기는 영원하지 못했으며, 스페인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선사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

   
▲ 알타이어 벽화

  약 3만 5천 년 전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로 크로마뇽인과 유사한 현대적 인류가 진출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 지방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이러한 선사 시대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약 기원전 1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아타푸에르카 지방에서 발견된 새로운 유적에서는 이미 백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의 두 민족은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이다 이들은 지중해 쪽과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모여 살았으며, 이후에는 대서양 방면에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코임브라 및 브라카와 세고비아에는 켈트족의 고대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이베리아 족은 그들의 언어를 이베리아 반도의 두 번째로 긴 강 이름인 에브로에 남겼다. 이베리아 족의 후예 중 한 갈래인 바스크족은 피레네 지방의 서부를 점령했다. 기원전 50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니키아인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리스인도 지중해 연안에 그들의 교역 중심지인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중 현대에도 남아 있는 도시가 엠푸리아 및 마라가, 아리칸테가 있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도시로는 카르테지가 있다. 페니키아인은 그 뒤 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로마와 대적하여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세운 카르타헤나가 현재까지 도시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바르키노에 남았는데, 이 이름에서 바르셀로나가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와 게르만 족의 침략

   
▲ 메리다의 로마식 극장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제국이 영토를 넓혀가면서 지중해를 따라 국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대략 이 시기는 기원전 210년에서 205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때부터 이베리아 반도는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때부터 스페인을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부르면서 자연스레 법률을 비롯하여 언어, 로마의 도로 등의 제도를 정착시켜 나갔다. 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분포도 달라지게 됐으며, 그 지배 계급은 로마 전체에서도 귀족 계급과 유사한 대우를 받게 된다.

  로마인은 타라고나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했다. 곡창 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스페인은 올리브기름이나 양모, 금, 포도주, 석탄을 수입하는 무역 지대로 각광받았다. 관개 시설도 발달되면서 농업 생산물은 로마 전역에 공급되었다.

  트라야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은 이곳 출신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에 도입됐으며, 2세기가 되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널리 수용됐다. 거의 대부분의 스페인어와 종교, 법률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비롯하였다. 

  최초의 게르만 족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듦에 따라 5세기쯤에 이르러서 들어왔다. 서고트족과 수에비 족, 반달 족 등의 다른 부족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415년경의 일이었다.

  서고트 족이 세운 왕국은 점차 세력을 뻗쳐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들은 유사한 시기에 이주한 수에비 족과 비잔티움 제국이 관리하던 남동부의 영토를 복속시켰다.

 

   
▲ 노을진 알함브라 궁전

이슬람 통치기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끄는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연합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피레네 이남의 안달루시아(포르투갈, 스페인)를 정복했다. 이때부터 781년 동안 스페인 지역에서 이슬람 왕국이 존재하였다. 751년 호라산 지방에서 봉기한 새로운 이슬람 왕조인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대체하자 우마이야 가문의 압둘 라흐만 1세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분열된 이슬람 왕국들을 통일하고 후 우마이야 시대를 열었고, 8대 원수 압둘 라흐만 3세 때 이르러 대외적으로 칼리프국임을 선언하였다.

  8세기 초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무어인(베르베르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711년~718년). 이 정복은 무슬림의 우마이야 제국의 확장 활동의 일환이었다. 아스투리아스와 나바라, 아라곤의 세 개의 작은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무슬림 지배 아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자유가 주어졌다. 차츰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커졌으며 귀족 계급부터 신분의 제한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10세기와 11세기에 많은 이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알안달루스(안달루시아) 주민의 다수가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남부 지방에 있는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는 무슬림 스페인의 수도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발달된 도시였다. 지중해 무역과 문화 간 교류가 꽃을 피웠다. 아랍과 북아프리카의 풍부한 지적 유산이 유럽으로 전해져 왔다.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은 서유럽의 고전 그리스 문화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로마화된 문화가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와 섞여 스페인의 독창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편 다른 유럽 지방은 중세의 암흑기로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과학적으로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압둘 라흐만 3세의 손자인 히샴 2세 시기에 이르러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된 안달루시아는 1031년부터 1085년까지 분쟁과 협력을 계속하다가, 북부 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슬림들은 북부 기독교 왕국에 파리아스(Parias)라고 불리는 보호비 명분의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085년, 북부 국경 지대의 톨레도 왕국이 기독교권에 넘어가자 여러 군소 이슬람 왕국들은 당시 모로코 지방의 강력한 이슬람 왕조였던 모라비드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모라비드 왕국은 이를 계기로 안달루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이슬람 왕국들을 통합하고 기독교 세력을 재차 몰아내었다. 그 후 모하드 왕국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6왕국 연합군이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1212)에서 모하드 왕조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고 이로 인해 무슬림들은 남쪽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안달루시아 남부 지방만을 지배하다가 1492년 최종적으로 후퇴하였다.


스페인 통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 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콘키스타(재정복; 국토 회복 운동)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이다.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현재의 스페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나중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을 비롯한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 나바라 왕국 등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 

   
▲ 고야 - 그라나다 정복(1492)

  한편 8세기부터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 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 회복 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 되는 모스크나 이슬람 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게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리니드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리니드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으로 공동 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 왕국 출범 이후, 스페인은 1479년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 간의 스페인 내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는 팔렌치아 대학과 살라만카 대학 등이 설립된다. 이들 학교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대학이다.

  1492년은 스페인에게 있어서 여러 의미를 지니는 한해였다. 이교도 세력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한다는 명분 하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다른 종교 신자들을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교 신자를 죽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에스파냐)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다.


스페인의 전성기

  왕국의 통합은 스페인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부를 누렸다. 그중에서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때에 이르러 최고의 영화를 쌓게 된다. 다만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영국과 스페인 간 전쟁(1588년~1604년)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스페인 제국의 변천

16세기에 카를로스 1세에 의해 시작된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는 남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의 남서부 지방,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제국은 이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 돼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바다와 육지를 넘어 바닷길이 열리면서 유럽의 제국주의가 첫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금은이나 향신료, 진귀한 농산물을 약탈하면서 스페인 항해자들은 유럽인에게 신세계를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대는 분명 스페인의 개화기로서 지금은 스페인의 황금기로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제하였으며 식민지 자원 수탈과 흑인 노예무역에 앞장서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황금기를 누리면서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다. 오스만 제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오스만과 손을 잡은 해적들이 지중해 연안 지방에는 약탈을 일삼아 노예 매매와 침략 행위가 끊이지 않게 된다. 이슬람 세력에 의한 약탈도 빈번했으며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여러 번 전쟁을 치구기도 했다.(이탈리아 대 전쟁) 후에는 로마 가톨릭 내 교회 개혁 문제로 스페인 전체가 분열에 휩싸여 스페인은 한동안 종교 문제에 지속적으로 군사 대응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과 기근 속에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문제에 개입하며 사태를 악화시켜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땅에 떨어진 합스부르크가의 위신을 세우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도 함께 연합하여 개신교 세력이 일으킨 변혁을 뒤엎으려 시도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포르투갈이 독립을 쟁취하는 한편 네덜란드도 1648년 완전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유럽 전역에 30년 전쟁이 불어 닥치자 신교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프랑스에 패배하였다. 당시 스페인의 영향력은 유럽 전역에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럽 전반의 경제 또한 상당한 침체기를 겪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페인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광대한 해외 영토를 유지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 식민지 통치를 19세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또 한 번의 쇠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났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여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단절되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발생한 왕위 계승 전쟁은 귀족 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전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럽 내 스페인의 영향력은 물론 대륙 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도 사실상 잃게 됐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방대한 영토를 내주면서 해상 강국의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의 결과,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의 왕위계승이 확정되면서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은 막대한 영토와 부를 토대로 다시 회복기를 맞는다. 더불어 유럽 내 스페인의 지위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의 재도약의 시작과 함께 부르봉 왕가는 행정 체계 정비에 박차를 가해 견제하는 한편 상당수의 유럽 군주 또한 스페인의 발전에 귀 기울이게 됐다.

  1763년에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하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주, 유타주, 빌링스, 캐스퍼, 시애틀, 애리조나주, 미니애폴리스, 덴버,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배턴루지, 댈러스 등 미시시피 강 서부에 있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쇠퇴

1793년 스페인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전쟁을 겪게 됐다. 프랑스의 공격으로 스페인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장에서 패하면서 1795년에 프랑스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종속국이 된다. 스페인 왕실 자체가 멸족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듬해 스페인은 영국과 포르투갈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잇따른 전쟁으로 되레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국력만 허비하게 된다.

   
▲ 민중봉기 참여자를 총살하는 프랑스군 (1808년 5월 3일)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포르투갈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스페인 영내에 진주한 나폴레옹은 1808년 5월에 스페인 전쟁에 개입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나폴레옹은 형인 조제프를 새로운 스페인 왕으로 책봉하였다. 원래 스페인의 왕은 나폴레옹의 맹장(猛將)인 조아생 뮈라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아생 뮈라에 대한 스페인 군중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던 관계로 조아생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임명하고 원래 나폴리의 왕이었던 조제프가 스페인의 왕으로 오게 된 것이다. 1808년 5월, 스페인 민중이 봉기하여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기 위한 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반도 전쟁)

  프랑스 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스페인 민병대를 격파하는 한편 참전한 영국군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스페인 군의 게릴라전과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전략이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가 겹치면서 프랑스는 1813년 완전히 스페인에서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폐위 당했던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하였다.

남미 식민지 독립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은 1세기가 넘도록 스페인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뺀 모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게 되면서 이전의 부와 국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스페인-미국 전쟁

  스페인이 19세기 내내 식민지 지배권을 잃고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필리핀과 쿠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진다. 식민지 내 독립 전쟁은 결국 미국 지역에서도 일어나 미국의 예견치 못한 공격으로 스페인은 패배하고 만다. 당대의 주역이었던 98세대(1898년 세대)는 전쟁을 뼈저린 “재난”("El Desastre")으로 느꼈다. 그에 따라 국가 안팎에 문제를 야기하였고 특별히 알폰소 12세가 쌓아놓은 치적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혼란한 20세기

  1900년대부터 1910년대에 이르러서 스페인은 잠시 평화를 누린다. 서사하라와 모로코, 적도 기니를 식민지로 차지했고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대륙 침탈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로코의 리프 공화국(Rep. of Rif)과 전쟁(1920년)을 겪으면서 시민들의 군주제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한편 스페인 군인으로서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군림하나 1931년에 스페인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공화국 정권은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한다.

  좌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민전선/우파연합과 제휴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모로코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인민 전선과 국민전선 간의 스페인 내전이 촉발됐다. 3년 뒤 스페인 내전의 시민 세력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주도로 승리를 얻게 된다. 상당 부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멕시코 등은 스페인 내전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비밀리 지원을 하나, 서방 세계는 영국이 주도하던 내정 무간섭주의(Non-Intervention)에 따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이 인민 전선을 지원하여 참전했으나 결국 내전에서의 승리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다. 민간인 학살 범죄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나치 독일 공군에 의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1937년). 내전으로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오십만 명 정도의 인구가 자신의 모국을 떠나게 됐다. 이들의 후예가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만 30만 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세계대전의 최초 시작이자 유럽의 시민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프랑코 정권은 은밀히 추축국에 협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행적이 국제 사회로의 진출에 대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반대를 부른 명분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스페인은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고 당시 스페인 사회는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함을 보일만큼 부가 지주계층, 군벌, 로마 가톨릭 교회에 편중돼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인민 전선으로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이 창궐하였다. 인민전선에서는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는 등 심각한 빈부의 격차라는 사회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프랑코 독재 정권은 유럽의 마지막 군사 정권으로 불리는데, 집권 후 좌파 탄압, 비밀경찰을 통한 통제 등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당은 팔랑헤당(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ONS)뿐이며, 1937년 창립 후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로마 가톨릭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코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내비치자 1949년에는 국민 운동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하였다. 2차 대전이 종결되자 스페인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고립 상태를 겪기도 했다. 1955년이 돼서야 미국이 공산세력의 남하를 우려해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에 군사 주둔을 꾀함에 따라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의 기적을 이루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이 이뤄졌으며, 특히 관광 분야의 활성화와 더불어 산업 국가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학력 수준 향상으로 인력 개발이 진척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의 마지막 군사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 스페인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현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영단으로 스페인에서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1979년 스페인 국민들은 처음으로 보통 선거에 참여하였는데, 《스페인사》(청아)에 수록된 사진에 의하면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에서 길게 줄을 설 만큼 보통선거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프랑코 정권 때 수감됐던 양심수들이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의 자유·결사·정치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1978년 스페인 헌법이 선포되면서 각 지방을 이루는 지방 정부가 출범한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독립을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진적인 양상으로 번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스크의 경우이다.

  1981년 2월 23일 군사 쿠데타가 날 조짐이 나타나기도 하나 대다수의 군부 세력은 왕실에 충성을 다짐한다. 사실 쿠데타 조짐을 억누르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국영 방송을 통해 월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의 촉발로 국회가 군부에 점령되기도 했으며, 긴급 내각이 설립돼 국내 정치 양상에 격변기를 맞기도 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실시된 선거로 1982년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내전 이후 기구 자체가 거의 운용되지 못하다 43년 만에 다시 생겨나면서 정권을 잡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은 1986년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다. 14년이나 스페인의 정권을 독점하던 좌파계열의 사회노동당은 개혁을 요구받으며 결국 1996년 우파에 참패하고 정권이 교체되었다.

  스페인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Euskadi Ta Askatasuna”)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59년 결성됐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게릴라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연합과 미국은 ETA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주장은 '지금껏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40년간 800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바스크 자치 정부는 자유 민족 바스크의 도를 넘은 폭력에 대해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라는 것이다.


21세기

  2002년 1월 1일 스페인 페세타가 유로화로 대체되면서 15개국과 함께 유로존으로 편입, 새로운 변혁기를 맞게 된다. 유로존으로의 편입은 스페인에 새로운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다. 도입 후 스페인의 경제 성장률은 유럽 연합 평균을 웃돌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국부 팽창이 미칠 악영향과 최근 대외 적자가 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4년 3월 11일 2004년 마드리드 동시 다발 테러 사건이 일어나 아침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희생됐으며 ETA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2004년 3월 13일 토요일 정오, 중도 우파인 스페인 국민당(Partido Popular)의 대변인이었던 Eduardo Zaplana는 검찰 수사가 ETA에 집중되어 있다고 발표한다. 이는 스페인 총선거 하루 전날 일이었다. PRISA 그룹에 속한 la SER 에선 정부 대변인 발언을 부인하며 검찰 당국이 이슬람 세력을 수사 중이라고 발언, 총선거 하루 전날 시민들은 SMS와 전화 등을 통해 오후 6시 국민당 본부 앞에 모여 "사실을 원한다.", "거짓말쟁이들", "선거 전에 우린 사실을 알고 싶다.", "Aznar(당시 국민당의 스페인 총리) 너는 알고 있다!" 등의 슬로건을 내달고 시위가 이루어진다. 결국 다음 날 총선거에서 중도좌파인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 총선거에 2500만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이 선거에 참여했으며 국민당과 사회노동당, 두 정당에 표가 가장 많이 집중된 선거(82%)로 기록되었다.

  2009년 11월 부로 스페인 정부는 양성 평등 비율이 거의 평균으로 동등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공표했다. 18명의 정부 각료 중 9명은 여성이며 현재 호세 로드리게스 총리 하의 내각에서 스페인은 양성 평등에 관해서만큼은 상당히 안정된 평가를 받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 이외의 유럽 국가에서는 성평등 문제를 의식적으로 정부 내 문제로 각인하고 있는 정부가 스페인 이외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7년 입법 절차를 거쳐 성별에 관련한 정치, 경제에 대한 평등 문제를 용인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Gender Equality Act). 현재 입법부에서 350명 의석 중 128명은 여성으로 36.3%이다. 현재 하원의 경우 여성 의원이 더 많은 13번째 국가가 됐으며 상원의 경우에는 263석 중 79명이 여성으로 30%에 머물고 있다.

[이상 출처 : 위키백과] 

 

 

   
 

 

제 1 일 6/14(화) 몬세라토, 바르셀로나

몬세라트 수도원 Monestir de Montserrat 
  ‘톱니 모양의 산’을 뜻하는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5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해발 1,236m의 높이를 자랑하는 바위산이다.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인 ‘검은 마리아상’을 보관하고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은 725m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 카톨릭의 최고의 성지인만큼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가장 많은 영감을 얻은 장소답게 트래킹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9세기에 처음 알려진 수도원은 이후 증개축되었지만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상당한 부분이 파손되었고 수도사들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후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야 다시 재건에 들어가고 수도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몬세라트 수도원
   
▲ 몬세라토
   
 

  20세기 초에 들어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지금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약 8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바실리카 대성당에서는 13세기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성가대이자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으로 손꼽히는 ‘에스콜라니아’와 카탈루냐의 성인인 ‘검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다. 대성당 정면의 파사드는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예수님과 12제자를 조각해 놓았는데 원래는 은으로 세공된 파사드였지만, 1900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제 2 일 6/15(수)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Barcelona 
  바르셀로나는 이베리아 반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로서, 스페인 제2의 도시인 동시에 최대의 산업 도시이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따뜻한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나타낸다. 기원전 3세기에 바르셀로나를 지배한 카르타고는 이 지역을 ‘바르카 가문의 거리’라는 뜻의 ‘바르시노’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바르셀로나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은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이자 중요한 관광 자원이며, 세계 최고의 축구 클럽인 FC 바르셀로나 또한 바르셀로나의 자부심이다. 바르셀로나는 1992년 제25회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인연이 있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 파밀리아 성당 내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큰 감명을 받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가 바르셀로나만의 대성당을 짓자는 운동을 벌여 시민 모금이 시작되었다.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F. de P. Villar)가 좋은 뜻에 동참하여 무보수로 성당 건설을 시작했지만 무조건 싸게 지으려고만 하는 교구에 질려 1년 만에 포기하고 자신의 제자였던 가우디를 후임자로 추천하였다. 젊은 건축가에게 맡기면 공사비를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교구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는데, 그는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면서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43년간 이 공사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쳤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 직접 인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설계도를 그려 나갔고, 마지막 10년 동안은 아예 작업실을 현장으로 옮겨 인부들과 함께 숙식하면서까지 성당 건축에 몰입했다. 그러나 1926년 불의의 사고로 그는 결국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해는 자신이 지은 이 성당의 지하 납골묘에 안장되었다. 원래 이 납골묘에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될 수 있는데, 로마 교황청에서 그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사서 허가해 준 것이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내부

  그의 사후, 스페인 내전 과정에서 설계 도면이 불에 타 사라져 공사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후배 건축가들의 기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성당의 건축은 계속되었다. 오로지 기부금과 입장료 수입만으로 공사 비용을 충당하고 있어 착공된 지 130년이 넘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언제 완공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총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가 있는데, 각각 ‘예수 탄생’, ‘예수 수난’, ‘예수 영광’을 주제로 설계되었고, 이 중 ‘예수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생전에 직접 완성시킨 것이다. ‘예수 수난’ 파사드는 1976년에 완공되었고, 마지막 남은 ‘예수 영광’ 파사드는 아직 착공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3개의 파사드 위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이 세워지고, 중앙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거대한 탑이 세워질 계획인데, 현재까지는 8개의 종탑만 완공되었다.

   
 

 

   
▲ 구엘 공원 Parc Güell

구엘 공원 Parc Güell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함께 가우디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이 평소 동경하던 영국의 전원 도시를 모델로 하여 바르셀로나의 부유층을 위한 전원 주택 단지를 만들고자 계획했던 곳이다. 1900년부터 약 14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60채 이상 분양되어야 했지만 공사가 진행되던 중 구엘이 사망하면서, 3채만 분양되고 미완성 단지로 남게 되었다. 공원 입구에는 관리실과 경비들의 숙소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2채의 집이 있는데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다. 그 앞으로는 알록달록한 타일 조각으로 옷을 입은 도마뱀 분수와 그리스 신전을 모티브로 삼은 시장이 있다. 시장의 지붕 위에는 구엘 공원의 꽃이라 불리는 타일 벤치가 있는데, 마치 누워 있는 용이나 바다의 파도처럼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관광객들을 동화 속으로 초대하고 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미를 추구하는 가우디의 철학은 이 공원에도 적용되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길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자연 그대로를 설계에 담기 위해 울퉁불퉁한 땅을 고르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길을 만들었으며, 마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이 신기하게 이어져 있다.

 

   
▲ 카사 밀라 Casa Milà

카사 밀라 Casa Milà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팬이었던 페드로 밀라 이캄프스가 카사 바트요를 보고 의뢰한 연립 주택으로, ‘카사 밀라(밀라의 집)’라는 이름보다 ‘라 페드 레라(채석장)’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거대한 돌덩이처럼 생긴 건물의 외관에서 가우디가 추구하는 곡선과 자연에 가까운 디자인이 한눈에 느껴진다. 바다의 물결을 연상하게 하는 곡선의 외관과 미역 줄기를 닮은 철제 발코니는 주변 건축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 시민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옥상은 투구를 쓰고 있는 로마 병사와 타일로 만든 십자가 등 독특한 디자인의 굴뚝이 인상적이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된 건축물이다.

 

   
▲ 카사 바트요 Casa Batlló

카사 바트요 Casa Batlló
  그라시아 거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로, 바다를 연상시키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외관은 단연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카사 바트요는 바르셀로나의 사업가였던 바트요가 의뢰해 설계한 것으로 1905년부터 약 3년간 지어졌다. 카사 바트요의 외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골 모양의 테라스와 뼈를 형상화한 기둥이다. 그래서 ‘인체의 집’이라는 의미로 카사 델스 오소스(Casa dels ossos)라고도 한다. 현재는 글로벌 캔디 브랜드 추파춥스 회사의 소유이며, 200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람블라스 거리

람블라스 거리(보케리아시장,미로광장,레이알 광장,구엘 저택) 
  카탈루냐 광장에서 바르셀로나 해안가 방향으로 콜럼버스의 탑까지 이어지는 거리로, 바르셀로나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자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기념품과 꽃을 파는 곳을 지나면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산 호셉 시장(보케리아 시장)이 나오는데, 이곳에 들러 생과일 주스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좋다.
  유럽에서도 최고의 퀄리티를 보여 주는 거리의 예술가들도 람블라스 거리의 관광 포인트이다. 람블라스 거리 중간쯤에는 호안 미로가 디자인한 모자이크 타일이 깔려 있다. 근처에는 용과 우산 모양의 조형물로 장식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예전에 우산 가게였다고 하며, 용 조각은 호안 미로의 작품이다. 조금만 더 내려오면 왼편에 야자수가 가득한 레이알 광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가우디가 학생 때 디자인한 가로등을 볼 수 있고, 오른편에는 가우디의 작품인 구엘 저택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해안가에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종류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거리의 화가들이 많이 눈에 띈다. 람블라스 거리에서는 거리 자체를 즐기며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을 추천한다.

                       

   
출처 : blog.daum.net/leeke2000
   
▲ 바르셀로나 레이알 광장 밤마실.
   
▲ 세계 3대 분수쇼 중의 하나인 몬주익 분수쇼 밤마실
   
▲ 길거리 비보이들

 


제 3 일 6/16(목) 사라고사. 마드리드

 

   
▲ 사라고사 Zaragoza
   
 

사라고사 Zaragoza
  BC 1세기말 이곳에 있었던 켈트이베리아인의 도시인 살수바를 로마인들이 점령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카이사라우구스타(아랍식 이름인 사라구스타와 현재 이름의 기원)라는 이름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에브로 강 유역의 주요 상업·군사 중심지였으며 스페인에서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도시들 중의 하나로, AD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주교관구가 되었다.

  전 스페인의 수호 성인 필라르의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누에스트라세뇨라델필라르 대성당은 야고보(그의 묘는 산티아고데콤폴스텔라에 있음)를 기려 건립된 기념주 위에 성모 마리아가 AD 40년 1월 2일에 나타난 것을 기념하여 지어졌다. 이 대성당은 1681년 소(小)프란시스코 에레라(엘 모소)의 설계로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고야의 프레스코를 몇 점 소장하고 있다.

 


제 4 일 6/17(금) 살라망카. 메리다

   
▲ 살라망카 대학교

살라망카 대학교 
  살라망카 대학교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 살라망카에 있는 대학교이다. 현존하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자 유럽에서 두 번째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1218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13세기 동안 바티칸으로부터 스투디움 게네랄레를 인정받았다. 대항해 시대에는 항해 계획을 면밀히 계획된 장소가 되었다. 종교 개혁 후, 스페인의 학술의 중심이자 유럽의 가톨릭 신학의 중심이 되어 16세기에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중심으로하는 학파, 17세기부터 18세기에는 가르멜회를 중심으로하는 학파가 신학 · 철학 · 법학 연구를 하여 살라망카 학파라고 불렸다. 1988년, 살라망카의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된다.

 

   
 

 

 

   
▲ 살라망카 마요르 광장

살라망카 마요르 광장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요르 광장은 대학 도시 살라망카 (Salamanca)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크 건축 양식의 마요르 광장 (Mayor Square)은 도시 전체의 중앙 광장으로 유명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광장은 매우 넓고 도시 전체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다. 광장 가장자리에 많은 카페가 있으며, 광장에는 상점이 가득하고 밤에는 레스토랑과 바의 테이블이 가득하다.

 

   
▲ 살라망카 대성당

살라망카 대성당

 

   
▲ 살라망카 대성당 우주인

스페인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것들은 바로 성당으로 살라망카에는 대성당이 두 곳이 있다. 구 성당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바로 옆에 이어져서 지어진 신 대성당. 신 대성당을 통해서 구 대성당을 들어갈 수 있기에 동시에 두 성당을 볼 수 있다. 살라망카 대성당 입구에는 예루살렘의 입구와 성인들의 모습,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헌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살라망카 대학교 입구의 개구리 조각만큼이나 여행객들의 눈길을 끄는 조각이 이 살라망카 대성당에도 있으니, 바로 우주인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용이다. 13-14세기에 건설된 성당에 현대적인 우주복을 입고 있는 조각상이 많은 미스터리’설’을 만들어 냈는데, 1992년 신대성당을 보수하면서 조각팀들이 현대적인 요소를 포함시킨 결과다. 2010년에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제 5 일 6/18(토) 메리다. 세비야


메리다 Mérida 스페인의 작은 로마
  메리다는 기원전 25년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에메리타 아우구스타Emerita Augusta로부터 이어져왔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로마시대의 다리, 원형 경기장, 원형극장, 수로시설 등 로마제국의 잘 설계된 도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메리다 고고 유적군Archaeological Ensemble of Mérida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메리다는 강력한 로마의 권력을 배경으로 영화로운 시대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게르만, 서고트, 이슬람, 아라곤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주인이 바뀌며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여왕 이후 잠시 안정된 시기도 있었으나 여전히 이어지는 전란과 분쟁으로 메리다는 쇠락하게 되었다.

  메리다의 로마 유적지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구아디아나강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로마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교량을 건설하였다. 로마는 식민 도시마다 크고 작은 다리를 건설하였는데 이곳의 로마교는 전체 길이 792m에 이르는, 로마가 건설한 다리 중에서 가장 긴 다리이다. 아치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보기에도 튼튼해 보여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수천 년은 거뜬히 견딜 것 같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많은 로마교를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메리다의 다리는 보수한 흔적이 거의 없이 고대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리 건너에는 메리다의 요새 알카사바가 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다리를 건너 그 곳으로 향하고 있다.​ 

 

   
 

​  로마교를 건너 알카사바 지역으로 들어서니 로마의 포로 노마노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 그대로 로마의 유적지였다. 스페인에 로마의 유적이 많은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스페인의 도시 안에 이렇게 완벽한 로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개선문은 현재는 아치부문만 남아있어 위용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당시 로마 황제의 권력을 증명하는 데는 한몫을 하고 있었다. 디아나 신전은 보는 순간 이 곳이 로마의 유적지가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디아나 신전은 메리다에 지어진 로마의 건축물 중 유일하게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황제에 대한 숭배를 의미하는 상징물이다. 사실 디아나 신전은 해체되었다가 후일에 다시 짜 맞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세기 코르보스라는 공작이 자신의 궁전을 짓는데 신전의 기둥을 석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다행히 기둥의 조각들은 소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다시 짜 맞추어 원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알카사바 내에는 옛 귀족들의 집터와 당시의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가옥 구조와 생활 모습들을 유추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메리다는 로마의 도시답게 수도교와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었는데 로스밀라그로스 수도교, 산로렌소 수도교, 지하수로, 프로셀피나 저수지와 가르나르보 저수지 등의 유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로마시대의 목욕탕 시설과 식수 저장고 등의 유적은 당시의 수로시설이 생활에 얼마나 유용하게 적용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알카사바 내의 식수 저장고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가득 저장되어 있어 그 안에 금붕어들이 살고 있는데 이것은 이곳의 물이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물이 유입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메리다 원형경기장

  메리다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히는 것이 로마의 원형극장과 원형경기장이다. 알카사바를 나와 구시가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곳을 만날 수 있다. 원형극장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이자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에 의해 기원전 15년경에 지어졌다. 로마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극장의 전면은 32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2층의 구조물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부채꼴처럼 펼쳐져 있는 계단식 관람석은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극장에서는 지금도 오페라나 음악회 같은 공연들이 활발히 개최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원형경기장은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로마시대의 경기장 중에서도 큰 규모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2두 마차, 4두 마차 같은 전차 경기와 검투사끼리의 결투는 물론이고 검투사와 맹수가 싸우는 등 다양한 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맹수와 싸우는 검투사의 모습은 벽화로 기록되어 있다.
 

   
▲ 메리다 수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루시타니아 지방의 수도 메리다는 스페인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고대 로마의 유적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적들이 무수히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직도 이곳에는 당시의 많은 유적들이 지하에 묻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메리다 시당국은 고대 유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지 유적 발굴이 경제 부흥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발굴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고고학자들은 발굴 신청서를 지속적으로 제출해왔으나 시당국은 물론 법원까지도 번번이 시당국의 손을 들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시당국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 유적 발굴에 협조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발굴된 유적이 수십 개에 이르며 유적을 보호하려는 예산도 늘고 있다고 하니 머지않아 지하에 잠들어 있는 유적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기대해 본다.

 

   
▲ 메리다 다이아나 신전
   
 

   국립 로마 박물관Museum of Roman Art은 1986년 건축가 요세 라파엘 모네오의 작품이다. 현대적 감각으로 로마를 형상화 시킨 독특한 구조로 건축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예술 작품이다. 거대한 아치가 겹겹이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부의 구조는 로마의 수로나 신전이 연상되는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이중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창을 통해 햇빛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 자연채광은 백색 대리석으로 된 로마 유물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메리다 지역에서 발굴된 로마의 유물들은 조각상, 화폐, 묘비, 모자이크 벽화, 그 외에도 생활용품과 공예품 등 다양하다. 이곳에는 로마의 유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술품들도 전시되어 있으니 메리다에 가게 된다면 놓치지 말고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라파엘 모네오는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스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아토차역 등 스페인의 굵직한 건물은 물론 세계 각국의 유명한 건축물들 중에도 그의 작품이 많다.

 

   
▲ 플라맹고 공연장
   
▲ 플라맹고
   
 

플라맹고
  14세기부터 발전한 플라멩코는 집시·안달루시아인·아랍인·유대계 스페인인의 민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집시들이 직업적으로 춤을 추게 되면서 플라멩코가 집시의 음악과 춤을 일컫게 되었다.
보통 기타 음악과 즉흥춤을 수반하는 칸테(노래)로 구성된다. 심오하고 장중한 플라멩코는 비장감을 동반하며 죽음·번뇌·종교 등을 다룬다. 중간조의 플라멩코는 덜 심오하나 음악에 동양적 색조가 가미되는 경우가 많다. 경쾌한 플라멩코는 사랑·시골·즐거움을 소재로 한다.

  춤을 출 때 남성들의 발놀림은 발끝과 뒤꿈치로 탁탁 소리를 내는 등 복잡하게 펼쳐진다. 여성들의 춤은 발놀림보다는 손과 전신의 아름다움에 의존한다. 공연에는 복잡한 리듬의 손뼉치기·손가락 튕기기·추임새가 수반되기도 하며, 종종 캐스터네츠도 등장한다.

 

   
 

 

   
▲ 주일예배

 

제 6 일 6/19(일) 세비야. 론다. 미하스. 말라가


세비야 Sevilla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인 세비야는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5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안달루시아의 심장이라고도 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지방 중심지로 번창했던 세비야는 수세기를 걸쳐 수많은 민족들의 침입을 겪었는데, 이슬람의 지배를 받던 시기 알카사르, 히랄다의 탑 등이 세워졌고,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항구 도시였던 세비야는 무역의 기지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배를 타고 들어온 무역인들이 집시들의 플라멩코에 관심을 보이면서 세비야는 화려한 플라멩코의 본고장이 되었다. 스페인의 대표 화가 ‘벨라스케스’, ‘무리요’를 배출해 내고,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오페라로 재탄생시킨 〈세비야의 이발사〉와 〈카르멘〉,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의 배경이 될 정도로 세비야는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관광지는 산타 크루스 지구와 엘 아레날 지구에 모여 있다

 

   
▲ 세비야 스페인 광장 Sevilla Plaza de España
   
▲ 세비야 스페인광장

세비야 스페인 광장 Sevilla Plaza de España
  마리아 루이사 공주가 1893년 산 텔모 궁전 정원의 반을 시에 기증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만들어졌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안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히는 세비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인 스페인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1929년 라틴 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당시 본부 건물로 지어진 건물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건물 양쪽의 탑은 대성당에 있는 히랄다 탑을 본 따 만들었고, 건물 아래층 반원을 따라 타일로 장식된 곳은 스페인 모든 도시의 문장과 지도,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여 준다. 

 

   
▲ 황금의 탑 Torre del Oro

황금의 탑 Torre del Oro 
  왕립 마에스트란사 투우장 맞은편 과달퀴비르 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13세기 이슬람 시대에 지은 12각형 형태의 탑으로 강 상류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원래는 강 맞은편에 똑같이 생긴 은의 탑이 있었지만 지금은 황금의 탑만 남았다. 두 개의 탑을 쇠사슬로 연결해서 적의 침투를 막았다고 한다. 이슬람 시대에 지어진 군사용 건물로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건물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탑 위에 작은 부속 탑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새롭게 증축된 것이다. 탑은 소성당, 화약 저장고, 감옥 등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해양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왕립 마에스트란사 투우장

왕립 마에스트란사 투우장 
  스페인에서 가장 큰 투우장으로 마드리드에 있는 라스 벤타스 투우장과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투우장이다. 투우 경기는 매년 성주간이 시작되는 날부터 10월 12일 건국 기념일에 끝이 나며 축제 기간에는 매일 경기가 있고, 나머지 기간에는 홈페이지나 관광 안내소에서 스케줄을 확인해 봐야 한다. 투우장 주변으로는 오페라 하우스 겸 극장인 마에스트란사 극장이 있고, 돈 주앙의 실제 모델이었던 돈 미구엘 마냐라(Don Miguel Mañara)가 자신의 방탕함을 뉘우친 후 전 재산을 투자해서 지은 자선 병원과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타파스 가게가 밀집되어 있다.

 

   
▲ 산타 크루즈 옛 지구 Barrio de Santa Cruz

산타 크루즈 옛 지구 Barrio de Santa Cruz 
  대성당과 알카사르 동쪽에 위치해 있는 옛 유대인 거주 지역이다. 뜨거운 날씨 때문에 햇볕을 피하고자 만든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 17세기 유대인들이 추방된 후 이곳은 귀족들이 들어와 정착했던 지역으로 카사노바와 함께 세기의 바람둥이로 손꼽히는 돈 후안이 귀족 부인들을 유혹했던 밀회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도 당시 돈 후안이 수백 명의 여자들과 사랑을 나눴던 여관이 1년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머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작은 호텔로 성업 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바로 ‘돈 후안’으로 ‘돈 조반니’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알마비바 백작이 한눈에 사랑에 빠진 로지나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 발코니도 이곳에 있다.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도 몰려 있는 만큼 여유 있게 산책하듯 산타 크루스 지구를 걸어 보도록 하자. 

 

   
▲ 세비야 마차투어
   
▲ 세비야 대성당 Sevilla Cathedral

세비야 대성당 Sevilla Cathedral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르네상스 양식),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네오르네상스 양식)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고딕 양식 성당 중에서는 세비야 대성당이 가장 크다. 

  1401년 성당 참사회의 “그 어떤 다른 성당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크게 지어 이 성당이 마무리되면 성당을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해야 한다”라는 결정으로 무조건 톨레도 대성당보다 크게 지어야 한다며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짓기 시작해 105년 후인 1506년에 완공된 세비야 관광의 핵심이다. 대성당 종탑인 히랄다 탑은 오렌지 정원과 함께 유일하게 남은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의 한 부분이다. 17~18세기에 들어와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면서 여러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종탑까지 걸어 올라가 세비야 시내를 조망해 보자.

 

   
▲ 콜럼버스의 묘(Sepulcro de Colón)

콜럼버스의 묘(Sepulcro de Colón) 
  세비야 대성당 내부에 있다. 스페인 정부는 콜럼버스가 세운 공을 인정하여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으리라’라는 그의 유언을 지켜 주기 위해 당시 스페인 4대 왕국이었던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의 4명의 왕들이 그의 무덤을 짊어지게 했다. 앞에 있는 카스티야, 레온 왕국의 왕들은 고개를 들고 있고, 뒤에 있는 나바라, 아라곤 왕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이것은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지했던 왕은 고개를 들도록, 반대했던 왕은 고개를 숙이도록 한 것이란다. 그리고 오른쪽 레온 왕의 창살 아래에는 그라나다를 뜻하는 석류가 꽂혀 있는데 국토 회복 운동으로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왕들이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문장이 해당 왕국을 의미한다. 오른쪽 레온 왕의 발과 왼쪽 카스티야 왕의 발이 유난히 반짝이는데, 이것은 이들의 발을 만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세비야에 다시 온다는 속설과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 론다 Ronda

론다 Ronda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론다(Rond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인 말라가주의 도시로 말라가에서 약 1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론다 인근에 위치한 쿠에바데라필레타 동굴에서 동굴 벽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세기에 켈트족들에 의해 Arunda라는 이름의 마을이 설립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곳에 Acinipo는 이름의 마을을 세웠다. 기원전 3세기에는 고대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에 의해 요새화되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 도시 칭호를 받는다.

  론다는 헤밍웨이에게 노벨상을 안긴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의 배경지이자 촬영지이고,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헤밍웨이는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문학도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인물로는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생 떽쥐베리, 파블로 네루다, 옥따비오 빠스, 세사를 바예호 등을 들 수 있다. 사진의 누에보다리 건너 오른편이 구시가지이고 그 아래에 헤밍웨이가 집필했던 집이 있다. 

   
▲ 론다 누에보 다리 Ronda Puente Nuevo

  누에보 다리는 스페인 남부의 론다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지고 있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다리로,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타호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1735년 8개월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무너져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다리의 높이는 98미터이며,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다.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 때 무어인들에게 정복당했고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공화파와 파시스트파가 번갈아 가면서 점령하면서 양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피와 죽음이 이 계곡을 흘렀다.

  론다는 투우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1784년에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투우장인 론다 투우장은 스페인에서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6천 명 정도가 입장할 수 있다. 

                           


제 7 일 6/20(월) 미하스. . 네르하. 그라나다

 

   
▲ 미하스


안달루시아의 하얀 마을 미하스 Mijas
  안달루시아 지방 고유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해발 428m 산 중턱의 동화속 아름다운 도시로, 흰색 벽과 갈색 또는 붉은색 기와 지붕이 특징인 안달루시아 전통 양식의 주택이 산기슭부터 중턱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안달루시아 자치지역에 속한 일명 백색의 도시'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해 흔히 '안달루시아의 에센스'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세계적인 해변 휴양지 코스타델솔(Costa del Sol)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휴양 도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코스타델솔의 보석'이라는 애칭도 있다.

   
▲ 네르하
   
 

 

   
▲ 네르하

네르하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말라가 주에 위치한 휴양도시로 스페인 왕 알폰소 12세가 1885년 네르하를 방문하면서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유럽의 발코니Balcón de Europa’라고 불렀다.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코스타델솔(Costa del Sol) 지대를 형성하는 도시 가운데 한 곳이며 말라가에서 동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59년 네르하 동굴이 발견된 뒤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다.

 

그라나다 Granada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다. 내륙에 위치하여 한여름에는 매우 덥지만,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끼고 있어 겨울에는 수많은 스키어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8세기 초반부터 이슬람 왕조의 지배 아래 크게 번영을 누렸으며 1492년 기독교 세력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거점 도시였던 그라나다는 서유럽에서 이슬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알암브라 성과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의 거리는 다른 유럽 도시에서 만나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 그라나다 Granada 알함브라 궁전

알함브라 성 Alhambra Palace
  그라나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알함브라 성은 기독교와 이슬람 양식을 절묘하게 융합해 건축한 궁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9세기에 이미 알함브라 언덕에 작은 성이 건축됐는데, 1238년 나스르 왕조가 그라나다에 자리를 잡은 뒤 성 안에 궁전이 건설되기 시작해 1333년 7대 왕인 유수프 1세 시대에 화려한 궁전의 모습이 완성됐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라는 뜻으로, 성벽이 붉은빛을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에 둘러싸인 폐쇄적인 형태의 궁전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궁전 내의 아치와 돔, 기둥에는 무어인의 뛰어난 손재주로 만들어 낸 아라베스크 무늬와 종유석 모양으로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으며 궁전 내부의 연못에 비치는 궁전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다. 작곡가이며 기타 연주자였던 프란시스코 타레가는 알함브라 성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 유명한 〈알함브라 성의 추억〉이라는 기타 연주곡을 작곡했다. 

 

 

   
▲ 헤네랄리페(Generalife)
   
▲ 그라나다 헤네랄리페

헤네랄리페(Generalife) 
  알함브라 성 인근에 위치한 헤네랄리페는 ‘건축가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14세기 초에 이슬람 군주들이 여름 궁전으로 삼기 위해 건축했던 곳이다. 13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던 나스르 왕조에 의해 지어졌으며, 원래 알암브라 성과는 골짜기 형태의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헤네랄리페에는 크게 2개의 정원이 있는데, 그중에서 페르시아 양식으로 지어진 아세키아의 정원은 긴 연못 주변에 분수를 만들고 다양한 꽃을 심어 놓아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 그라나다 대성당 Granada Cathedral

그라나다 대성당 Granada Cathedral
  이슬람 왕조가 번영을 누릴 당시에는 모스크가 있었던 자리에 1518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1704년에야 완성된 대성당이다. 초기에는 톨레도 대성당의 고딕 양식을 본떠 건축을 시작했으나 2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공사가 끝날 무렵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고딕 양식, 무데하르 양식까지 혼재된 기묘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 알카이세리아 Alcaiceria

알카이세리아 Alcaiceria 
  대성당 옆에 자리한 알카이세리아는 ‘카이사르의 집’이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200개가 넘는 비단 상점이 있던 큰 시장이었으나 지금은 다양한 기념품과 도기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있다. 1843년 성냥 상점에서 발생한 화재로 알카이세리아가 전소되었으나 다시 재건되었다. 아랍의 전통적인 쪽매 붙임 세공인 타라세아비롯하여 다양한 기념품을 구입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 알함브라 밤마실
   
▲ 그라나다 밤마실

                                       


제 8 일 6/21(화) 그라나다 똘레도

 

   
▲ 톨레도 전경

 

시간이 멈춘 중세도시 톨레도 Toledo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톨레도는 타호 강에 둘러싸여 있는 관광 도시이자 스페인의 옛 수도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예술에 있어서 마드리드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식민 도시를 거쳐 8세기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 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톨레도는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 가지 종교의 유적지가 공존하는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 도시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톨레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스페인의 고성 호텔 파라도레스의 테라스에서 차 한 잔을 즐겨보자.

 

   
▲ 호텔 파라도레스의 테라스
   
 
   
 
   
▲ 톨레도가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서

 

산토 토메 성당 Iglesia De Santo Tomé 
  14세기에 재건된 무데하르 양식의 탑이 있는 성당으로, 톨레도에서 작품 활동만 40년 이상 해 온 종교화의 대가인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전시되어 있다. 신앙심 깊은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에 성 어거스틴과 성 스테판이 나타나 도왔다는 전설을 다룬 이 작품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성 어거스틴과 성 스테판이 오르가스 백작의 유해를 매장하는 장면을 그렸고, 상단에는 백작이 천사가 되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그의 영혼을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산토 토메 성당 Iglesia De Santo Tomé

 

   
▲ 스페인 가톨릭 총 본산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스페인 가톨릭 총 본산 톨레도 대성당 Toledo Cathedral 
  1225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난도 3세의 명에 따라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 양식을 기반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493년 완성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쳐 현재의 엄청난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현재는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다. 본당 보물실에는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 현시대(Custodia)가 보관되어 있는데, 5,000개의 금 · 은 · 보석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무려 180kg, 높이가 3m가량 된다. 또한 본당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성가대석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전쟁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조각이 있으며, 성물실에는 엘 그레코의 종교화와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마치 작은 미술관에 온 것처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 톨레도의 근사한 식당
   
▲ 톨레도가 한 눈에 보이는 식당에서 우아하게~
   
 

 

제 9 일 6/22(수) 똘레도, 마드리드


마드리드 Madrid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 지방의 대표 도시이자 스페인 교통의 요충지이다. 16세기부터 펠리페 2세가 왕궁을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스페인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스페인의 정치, 경제의 중심 역할을 맡아 왔다. 왕실에서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들을 전시하여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라도 미술관이 마드리드에 자리 잡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소피아 왕립 미술 센터에 전시되면서 마드리드는 세계적인 미술의 도시가 되었다.

 

   
▲ 국립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국립 프라도 미술관 Museo Nacional del Prado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18세기에 자연사 박물관을 개관하기 위해 지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완공하지 못하다가, 1819년 페르난도 7세의 명으로 스페인 왕실이 소장한 9,000여 점의 회화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미술관으로 바꾸어 개관하였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 3대 거장의 전시관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이고, 그 밖에 티치아노, 루벤스, 리베라, 무리요, 수르바란의 작품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 푸에르타 델 솔 Puerta del Sol

푸에르타 델 솔 Puerta del Sol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부르는 푸에르타 델 솔은 국도의 기점에 해당하는 장소로, 스페인 각지로 통하는 10개의 도로가 이곳에서 뻗어 나간다. ‘태양의 문’이라는 뜻의 푸에르타 델 솔에는 16세기까지 태양의 그림이 그려진 성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광장 한편에 있는 소귀나무와 곰의 조각상은 마드리드의 상징이며, 만남의 장소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 일대는 마드리드의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푸에르타 델 솔에서 마드리드 왕궁까지 구시가지가 이어진다. 광장 주변에는 레스토랑, 백화점, 쇼핑센터, 카페, 서점 등이 자리하고 있어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 마요르 광장

마요르 광장
  마요르 광장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광장이다. 푸에르타 델 솔 및 빌라 광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거리에 있다. 129m × 94m의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광장에 접해있는 237개의 발코니를 가진 3층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마요르 광장은  펠리페 3세 때인 1619년에 완성되었으며, 광장을 만든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공공 행사가 주로 열렸으며 투우 경기나 교수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중세에는 마드리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많으며, 이색 거리 공연도 수시로 펼쳐지는 등 활기찬 거리다. 특히 야경이 보기 좋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늘 사람들로 붐빈다.

   
 

산 미구엘 시장 Mercado de San Miguel 
  마요르 광장 동쪽에 자리한 시장으로, 마드리드 시민들의 식재료를 공급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처음엔 전통 시장에 가까웠으나 화재로 인해 폐쇄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농산물과 식재료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철골을 세우고 통유리로 둘러싸면서, 개방형이던 시장이 실내 시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흔히 생각하는 재래시장과는 달리 굉장히 깔끔한 분위기로, 간단하게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바르와 다양한 먹거리가 진열된 상점들이 발길을 잡고 있다. 과일, 채소, 생선, 하몬, 꽃, 견과류 등의 식재료와 식품을 파는 상점들은 바둑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쇼핑하는 동선도 어렵지 않다. 부담 없이 와인 한잔이나 타파스를 먹기에도 좋은 곳이다.

 

 

제 10 일 / 6월 23일(목) 마드리드

 

   
▲ 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 Plaza de España, Madrid의 동키호테 동상

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 Plaza de España, Madrid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에스파냐 광장은 마드리드 최고의 번화가인 그란 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1930년 〈돈 키호테〉로 잘 알려진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사후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다. 기념비 중앙에는 작가 세르반테스가 앉아 있고 그 앞에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타고 있는 산초 판사의 청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해가 지면 주변 나무들이 빛을 막아 어두워 늦은 시간 혼자서는 찾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 그란 비아 Gran Vía

 

그란 비아 Gran Vía
  마드리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그란 비아는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을 모티브로 하여 건설된 거리이다. 에스파냐 광장에서부터 알칼라 거리까지 약 1.5km에 이르는 거리에 고급 호텔, 명품 숍,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자리하고 있다.

 

   
▲ 마드리드 왕궁 Royal Palace of Madrid
   
 

마드리드 왕궁 Royal Palace of Madrid
  원래 9세기에 세워진 무슬림의 요새가 있던 자리로, 무슬림이 물러난 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요새를 궁전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밤에 대형 화재로 소실되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 출신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펠리페 5세가 이 자리에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왕궁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탈리아 건축가였던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a)가 설계를 끝내고 착공 전 사망하자 그의 제자였던 사게티가 승계 받아 사바티니, 로드리게스와 함께 17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스페인 왕의 공식 거처이지만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되고 실제 거주하지는 않는다. 사방 150m의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모방해서 만든 ‘옥좌의 방’, 건축가 유바라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걸작으로 정교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가스파리니 방’, 벽 전체가 황금 비단으로 꾸며져 있는 ‘황금의 방’, 145명이 한꺼번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탁이 자리한 ‘연회장’에서 스페인의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다. 

 

   
▲ 왕궁앞 광장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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