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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 현실주의를 넘어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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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6월 17일 (금) 00:49:15 [조회수 : 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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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선거가 끝났다. 승자들은 기쁨의 축배를, 패자들은 선거 국면을 반추하며 쓰디쓴 잔을 들고 있을 것이다. 후일담들이 쏟아지고 있다. 희망의 말들과 절망의 말들이 교차한다. 유세 기간 중 후보들과 지지자들이 쏟아낸 조롱과 비난, 분노와 분열, 냉소와 혐오의 말들이 홍수에 떠밀려 온 부유물처럼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정치에서 품격을 논하는 자체가 이상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품격이 사라진 정치 마당은 분열적이고 파괴적이다. 진영 논리에 사로잡히는 순간 상대편의 말은 경청되지 않는다. 정체성 정치가 지배하는 순간 연대의 정치는 불가능해진다. 그런 폭력적 파당 정치에 신물이 난 이들은 정치 혐오 계층으로 남는다. 정치적 무관심 혹은 혐오가 깊어갈수록 정치꾼들이 설 땅이 넓어진다. 

투표라는 행위가 종료되었다 해서 시민들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이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지를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이 약속한 모든 일들이 다 선한 일은 아니다. 공익에 위배되거나 사회적 취약 계층을 벼랑으로 내모는 공약은 철회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공약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비정상을 용인하는 셈이다. 통속적 현실주의가 마땅히 지켜져야 할 도덕적 원리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도덕성에 대한 감각이 사라질 때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전선이 되고 만다. 그 전투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개별화 되고 스스로 취약하다고 느낀다. 불안, 불확실함, 불안정, 두려움, 고립감이 그물처럼 확고하게 그들을 사로잡는다. 정치꾼들은 사람들의 그런 소외감을 타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꾸어 자기 설 자리를 만든다.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시켜 주고,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설 땅이 되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 혹은 영속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정치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종교가 할 일은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 아닐까? 비판적 기능을 잃고 종교가 정치에 순응할 때, 그래서 부적절한 야합이 일어날 때 역사는 파국을 면하기 어렵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유대 땅을 유린하여 거의 모든 성읍이 무너졌을 때, 유다 임금 시드기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예루살렘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던 때 그는 비상한 조처를 생각해냈다. 시드기야는 고관들을 불러 모아놓고 집집마다 거느리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자고 제안한다. 율법은 동족인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그 명령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왕과 고관들은 그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 히브리 종들을 방면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왕과 고관들은 성전에서 제물의 몸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를 걸어감으로 언약을 체결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제물과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자기 저주의 선언인 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국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굽이 군대를 파견하자 느부갓네살은 그에 맞서기 위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위기의 시간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시드기야와 고관들은 방면했던 히브리 종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다.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예루살렘을 치게 했다. 시드기야는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다의 역사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허릅숭이들이 지도자연할 때 역사는 퇴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고 시민들의 삶 또한 결딴난다. 공적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설사 자기 이익에 반한다 해도 그렇다. 약속이 지켜질 때 사회의 토대인 신뢰가 구축된다.

라틴어로 종교를 뜻하는 렐리기오는 딱히 뭐라고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이 자기 삶과 행위에 대해 느끼는 꺼림칙한 느낌 혹은 주저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한함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알아차릴 때 사람들은 경외심을 느낀다. 아름다움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신적 호의를 얻어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비열함과 천박함이 욕망의 옷을 입고 거리를 횡행하고 있는 시대이다. 타자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깊은 공감, 정의와 자비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도덕성의 핵심이다.

(2022/06/01 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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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2-06-17 12:19:09
다른 관점에서 보는 시드기야, 시드기야는 정세분석이 어두운데다가 극도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시드기야가 바빌론에 굴복할지 반기를 들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여호와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예레미아가 시드기야에게 말하기를 바빌론에게 굴복하면 왕실도 살고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굴복하지 않으면 왕실도 몰락하고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굴복하라고 간곡하게 권고한다.

예레미아의 간곡한 굴복 권고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자기가 굴복하게 되면 바빌론이 자기를 실제로 보호해줄까 하는 의심과 혹시 신하들이 반발하지 않으까 하는 2중의 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래도 당하고 저래도 당할 거라면 못 먹어도 GO’라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단행하게 된다. 도저히 승산이 없는 막강한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다. 螳螂拒轍!

사실 在野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시드기야를 왕으로 책봉하여 잘 먹고 잘 살게 해준 건 바빌론이었다. 별 볼일 없던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주었는데 시드기야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들자 극도로 분노한 바빌론이 시드기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까지 완전히 파괴해버리고 그 백성을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시드기야는 바빌론軍에 의해 삼년동안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자 견디지 못해 솔로몬의 채석장인 동굴을 통해 성 밖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군대에게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동굴이 지금도 시드기야가 도망치던 동굴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있다.

여호와의 선자자인 예레미아의 항복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의심의 포로가 되어, 국왕으로서 정확한 국내외의 판세를 읽는 데 실패한 시드기야가 몰락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것이야말로 기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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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11.54.116.232)
2022-06-17 13:18:36
시드기아의 몰락은 선지자의 권고를 무시했기 때문이지 그 외 자잘한 노예정책 잘못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당시 바빌론 전성기 시대상황에서 노예부리는 일은 숨 쉬는 일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미국의 남북전쟁 무렵만 하더라도 노예부리는 일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노예부리기가 사람에게 본격적으로 거부되기 시작한 건 불과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김기석 칼럼니스트의 분석이 맞는다면 조선은 30%의 양반이 70%의 노비를 부려먹다가 일본에 망했는데 조선의 노비정책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하면 도대체 몇 사람이나 납득하겠는가? 조선의 노비제도가 조선의 몰락에 끼친 영향력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참고로 조선의 노비정책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노예제도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과거 그리스로마 신화를 보면 전쟁 여부는 神託에 따라 결정되었다. 시드기야에게는 신탁에 해당되는 예레미아의 권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했다고 봄이 타당하지 수천년 전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노예부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김기석 칼럼니스트가 시드기야가 펼친 노예정책 때문에 하나님이 분노해서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하니 이런 주장이야말로 어떤 사실에 대한 針小棒大의 최고봉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김기석 칼럼니스트의 글을 쭉 읽어왔는데 매번 실망이 많았다. 그 이유는 자기만의 신념을 남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호와를 사용하는 게 빤히 들여다보여서다. 하기야 이런 건 김기석 칼럼니스트만이 아니고 대부분이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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