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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적 현실주의를 넘어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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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6월 07일 (화) 02:07:58 [조회수 : 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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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선거가 끝났다. 승자들은 기쁨의 축배를, 패자들은 선거 국면을 반추하며 쓰디쓴 잔을 들고 있을 것이다. 후일담들이 쏟아지고 있다. 희망의 말들과 절망의 말들이 교차한다. 유세 기간 중 후보들과 지지자들이 쏟아낸 조롱과 비난, 분노와 분열, 냉소와 혐오의 말들이 홍수에 떠밀려 온 부유물처럼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정치에서 품격을 논하는 자체가 이상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품격이 사라진 정치 마당은 분열적이고 파괴적이다. 진영 논리에 사로잡히는 순간 상대편의 말은 경청되지 않는다. 정체성 정치가 지배하는 순간 연대의 정치는 불가능해진다. 그런 폭력적 파당 정치에 신물이 난 이들은 정치 혐오 계층으로 남는다. 정치적 무관심 혹은 혐오가 깊어갈수록 정치꾼들이 설 땅이 넓어진다. 

투표라는 행위가 종료되었다 해서 시민들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이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지를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이 약속한 모든 일들이 다 선한 일은 아니다. 공익에 위배되거나 사회적 취약 계층을 벼랑으로 내모는 공약은 철회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공약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비정상을 용인하는 셈이다. 통속적 현실주의가 마땅히 지켜져야 할 도덕적 원리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도덕성에 대한 감각이 사라질 때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전선이 되고 만다. 그 전투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개별화 되고 스스로 취약하다고 느낀다. 불안, 불확실함, 불안정, 두려움, 고립감이 그물처럼 확고하게 그들을 사로잡는다. 정치꾼들은 사람들의 그런 소외감을 타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꾸어 자기 설 자리를 만든다.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고, 끊어진 관계를 복원시켜 주고,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설 땅이 되어야 할 정치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 혹은 영속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정치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종교가 할 일은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 아닐까? 비판적 기능을 잃고 종교가 정치에 순응할 때, 그래서 부적절한 야합이 일어날 때 역사는 파국을 면하기 어렵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유대 땅을 유린하여 거의 모든 성읍이 무너졌을 때, 유다 임금 시드기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예루살렘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던 때 그는 비상한 조처를 생각해냈다. 시드기야는 고관들을 불러 모아놓고 집집마다 거느리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자고 제안한다. 율법은 동족인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그 명령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왕과 고관들은 그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 히브리 종들을 방면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왕과 고관들은 성전에서 제물의 몸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를 걸어감으로 언약을 체결했다.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제물과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자기 저주의 선언인 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국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굽이 군대를 파견하자 느부갓네살은 그에 맞서기 위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위기의 시간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시드기야와 고관들은 방면했던 히브리 종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다.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예루살렘을 치게 했다. 시드기야는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다의 역사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허릅숭이들이 지도자연할 때 역사는 퇴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고 시민들의 삶 또한 결딴난다. 공적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설사 자기 이익에 반한다 해도 그렇다. 약속이 지켜질 때 사회의 토대인 신뢰가 구축된다.

라틴어로 종교를 뜻하는 렐리기오는 딱히 뭐라고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이 자기 삶과 행위에 대해 느끼는 꺼림칙한 느낌 혹은 주저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한함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알아차릴 때 사람들은 경외심을 느낀다. 아름다움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신적 호의를 얻어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비열함과 천박함이 욕망의 옷을 입고 거리를 횡행하고 있는 시대이다. 타자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깊은 공감, 정의와 자비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도덕성의 핵심이다.

김기석/청파교회(2022/06/01 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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