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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햇볕같은이야기
최용우  |  9191a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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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5월 15일 (일) 21:09:08
최종편집 : 2022년 05월 15일 (일) 21:13:17 [조회수 :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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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 (사진:최윤식)

7226..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죄사함, 성결하게 된, 중생, 기도의 응답등등 모든 유익한 것들은 모두 믿음의 문(門)을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또한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대해 비성경적인 개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믿음’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과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은 생사를 가르고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는 믿음을 너무나도 소홀히 생각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증거인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5-8)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과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이 세상 가치관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믿음’은 아무 영향력도 끼치지 못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아무런 힘도 없는 영향력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 (사진:최윤식)

7227.믿음을 모른다는 증거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지도자들은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정의해 주고 있지 못합니다. 심지어 비슷하게도 설교를 못 해주고 있습니다. 아무개 부흥사님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데 “오늘 저녁으로 보신탕을 대접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청중들이 자동적으로 “아~멘” 하는 모습에 기가 막혔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면 ‘할렐루야’의 맞장구로 영혼 없는 ‘아멘’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찬양집회 인도자는 청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습관적으로 ‘할렐루야’ ‘아멘’을 반복합니다. ‘아멘’은 그런 용도가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활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상처를 받고, 삐치고, 고소 고발을 하고, 교회를 풍지박살나게 하고, 평생 원수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히나 교회 지도자들, 중직들이 그런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교리로 받아들여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은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믿어!”라고만 합니다. 저는 이해되고 설득되지 않는데 그냥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인들이 예배를 해치우고(?) 모여서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온갖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전문가 수준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인들이 믿음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 (사진:최용우)

7228.의지와 지성에 기댄 믿음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마음 수양’이나 사람들을 만나 ‘인맥을 넓히는 수단’으로, ‘현실의 도피처’로,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감추고 ‘위안받는 도구’로, 진지한 반성과 사고(思考)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이용합니다. 지도자들도 곤란한 상황에서는 그냥 ‘믿음으로 합시다’ 또는 ‘은혜로 합시다’하고 대충 퉁치고 넘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말로 진짜로 참말로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천적으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낙천주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하거나, 찬양이나 설교를 통해서 느끼는 짜릿한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를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거나 많은 헌금을 하면서 느끼는 자기만족을 믿음이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언젠가 기도원에서 유명한 아무개 목사님이 “우리교회 장로가 어찌나 믿음이 좋은지 주의 종은 가장 좋은 차를 타야된다며 포텐샤를 사줬습니다.”라고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저건 믿음이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잘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진짜인지 점검해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어떻게 잘 못 믿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 잘못된 믿음은 인간의 ‘의지(意志)’와 ‘지성(知性)’에 기대어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즉, 사람들 눈에 좋아 보이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 (사진:최용우)

7229.진짜 믿음

 진짜 믿음은 참되신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3:4) 참이신 분에게서만 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사야 선지자는 사단의 대갈통을 아작내버리고 사단에게서 사람을 다시 찾아올(구원) 여자에게서 태어날 메시아(구원자)를 예언합니다.(사53:5-6)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그 ‘하나님의 일’이 진짜 믿음이라니까요. 2천년 전 예수님 당시에도 랍비들마다 ‘믿음’에 대한 정의가 다 다르고, 율법은 믿음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혼돈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자기 주관적인 생각이나 경험을 ‘믿음’이라고 자꾸 규정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그 예수를 믿으니까 지금 교회에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착하고 선한 일, 남을 도와주는 일로 자신의 믿음이 증명된다고 생각하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는 일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피스티스(π?στι?)’인데, 그 의미는 ‘어떤 존재’입니다. 그 존재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이 무엇이냐? 질문하면 “하나님의 일이 믿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자꾸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어떤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 (사진:최용우)

7230.새로운 십자가

 어느 민속촌에 갔더니 옛날 동헌을 재현해 놓은 마당에 ‘곤장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곤장 틀에 엎드려 보면서 웃었습니다. 짓궂은 사람들은 친구의 엉덩이를 까고 곤장을 내리치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 곤장틀은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옛날에는 진짜였는데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가짜 곤장입니다. 옛날에는 곤장틀을 보고 벌벌 떨었는데 지금은 ‘체험’을 위한 오락 도구일 뿐입니다.
 제가 <십자가 묵상>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십자가’를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십자가는 옛날 예수님이 달렸던 그 십자가가 아니라 ‘새로운 십자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겉모양은 분명히 십자가가 맞는데 진짜 십자가가 아닙니다. 마치 민속촌에 있는 ‘곤장틀’처럼 십자가 체험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새 십자가’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예수님이 매달렸던 ‘옛 십자가’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생긴 인류의 교만한 죄를 박살내버렸습니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선과 악’의 율법을 끝장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새 십자가’는 아담의 죄와 친구가 되어 더 이상 죄를 지적하지 못합니다. 율법과 짝꿍이 되어서 이 세상을 열심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나는 선이고 나를 반대하는 너는 악이라며 배타(排他)를 합니다.
 ‘새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든 그 상태애서 새사람을 만들어보겠다고 합니다. 시류에 영합하고,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떻게든 십자가가 ‘돈’이 되게 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 십자가는 ‘체험이나 해보는’ 도구가 아닙니다. 

   
▲ (사진:최용우)

7231.옛 십자가

 옛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시대 십자가를 지고 길을 떠나는 사람은 이미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고 사형장으로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마16:24, 막8: 34, 눅9:23) 그것은 십자가 체험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죽으러 가자’는 선언입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지는 사람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죽인 다음에 ‘새 생명’으로 다시 살리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어야 ‘내 안에 새로운 존재가 들어와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새로운 존재는 ‘피스티스(π?στι?)’입니다. 그 존재가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성령의 열매를 자동으로 맺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자꾸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어떤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내가 하는 일이란 그냥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 나의 야망을 이루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예수 생명의 믿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아무것도 변명하지 말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 앞에서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하고 항복하면 됩니다. 
 회개하지 않은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를 거치지 않은 구원은 진짜 구원이 아닙니다. ⓒ최용우 https://cyw.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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