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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묵시적 종말 그리고 정치신학의 물화(物化)
박일준  |  원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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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5월 13일 (금) 05:30:56
최종편집 : 2022년 05월 18일 (수) 03:06:03 [조회수 : 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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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묵시적 종말1) 그리고 정치신학의 물화(物化)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
번역: 박일준(원광대학교)

   
▲ Catherine Keller (Drew University)

저는 오늘 창조와 종말(apocalypse)의 비선형적 상호작용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창조’와 ‘종말’은 기독교 성서의 시작과 끝을 점유하면서, 적어도 서구에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역사라는 선을 따라 움직이면서 시간의 틀을 구성하는 (중요한) 두 상징입니다. 이렇게 물질 우주의 공간은 하나의 단일한 시간에 의해 구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구원사(Heilsgeschichte)로, 세속적 어휘로 번역하면 진보(progress)로 읽힙니다. 저는 그 시간성이 함축하는 정치신학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는데, 왜냐하면 통치권력(sovereignty)의 세력들이 세계의 물질성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혹은 ‘무엇이 물화[物化]하는지, what matters)에 대하여 집단의 감수성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물(物) 자체의 정치신학을 구성하는 알파와 오메가(Omega)에 대하여 함께 성찰해보려고 합니다. 

고전적 형식의 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절대적인 무(無)로부터 도래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래서 물질세계는 시간의 결정론적 흐름들을 따라 전개되고, 그 시간의 흐름은 부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가 이후 완전한 종말로 끝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초자연적 새창조와 같은 형태로 새로운 물질세계가 시작된다. 그래서 물질 우주는 무로부터(ex nihilo) 창조되었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무로(ad nililam) 끝이 난다. 이 절대적 시작과 끝의 개념이 전능한 무로부터의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 개념을 지탱해왔으며, 여기서 전능한 창조주는 역사를 주재하시고 그 역사가 종말의 파국에서 종료될 것도 주관하신다. 또한 그 전능한 창조자는 인간에게 물질세계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수행한 지배의 성과를 심판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이 세계는 종말론적 성취에 도달한다. 하지만, 종말(the End)로 (잘못) 읽히는 대파국(apocalypse)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파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예견되어왔던 결말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을 풍자화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우 신실하고 책임감 있고 창조적인 기독교가 이 관점을 일정부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보수적인 신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의 상당수도 그렇다. 

그러나 애초부터 시작과 끝에 대한 또 다른 이독(異讀)이 가능했다. 사실 그 이독은 성서의 모습을 가장하고 나타나서 기독교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성서는 항상 신학을 통해 걸러졌다. 그리고 신학은 대체로 전지전능한 무로부터의 창조자라는 관점을 유지해왔다. 이 신학이 말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자는 통제권을 유지하면서도, 자유에 대해서 다르면서도 교묘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말하자면, 이 창조자 관점에는 통치권력의 일방성을 강조하는 특정한 정치신학을 지지하는 관점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용인된 지배권이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인간의 통치권으로, 즉 지구행성 위에서 펼쳐질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지금은 너무나 파괴적이고, 참으로 묵시적인 대파국을 함축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물론 인간의 지배권이란 언제나 위로부터 개입 당하여 억제될 수 있고, 인간이나 신적인 존재의 손에서 통치권력(sovereignty)은 이길 수 있는 권력(powers to trump)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독해에서 영어 단어 trump가 ‘물리치다, 이기다’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기묘한 동시성의 신호로 느껴지는데, 슬프게도 이것이 한국 상황과도 무관한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창조의 궁극적인 승리는 묵시(apocalypse)를 세상의 종말로 읽어내는 표준적 독해를 통해 도래하는데, 이것은 다시 무(無)로 되돌려졌다가 신제품으로 창조된 피조세계를 그려준다: [무로부터의 새로운 창조(the nove creatio ex nihilo).] 

그래서 역사의 이 시점에서 시작과 끝을 읽는 다른 방법을 검토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즉 시작과 끝을 서로와 관련하여 읽어내는 또 다른 방식, 다시 말해서 창세기와 계시록(묵시록)을 읽는 또 다른 방식 말이다. 그리고 곧 보게 되겠지만, 성서적 상징들을 이렇게 다르게 읽어내는 방식이 고대 텍스트 자체에 보다 더 충실한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대화를 위해 이렇게 사려 깊고 모험적인 신학사상가들이 모여 있으니, 나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시작과 끝의 이야기를 정치신학의 문제(matter)와 연결해서 보다 체계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신학하는 장으로서 정치와 연관하여 창조와 종말(apocalypse)의 대안적 이야기를 고려해보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지구정치신학을 뒷받침할 이야기 말이다. 

만약 그 ‘무로부터’(ex nihilo)의 성서 이야기를 전능한 통제권력의 신학이라는 방향으로 몰아붙였다면, 그것의 정치신학은 무엇일까? 우리는 절대적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서구 역사와 식민주의 그리고 지금의 신식민주의로 점철된 세계화된 문명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출간된 지 20년 가까이 지난 나의 저서 『심연의 얼굴』(Face of the Deep, 2003)에서 나는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의 역사를 2세기 후반 정통주의 기독교의 두 창설자인 이레니우스(Irenaeus)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에게로 소급해서 추적하였다. 이들은 타티아누스(Tatian)와 테오필로스(Theophilus)의 초기 작업에 기초하여, 이단으로 선포된 신학적 입장에 반대하여 논증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가 게르하르트 메이(Gerhard May)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아이디어가 이 모든 논쟁보다 한 세대 전에 살았던 사람이며, 당시 유명한 영지주의 스승이었던 바실리데스(Basilides)에게서 이미 발견된다는 사실을 전해주는데,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영지주의는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가 싸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바실리데스는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 예술가나 장인의 경우처럼 단순히 이전에 [실존하는] 소재를 가지고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존재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의 발명은 물질 자체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담지한 영지주의적 단일신론에 기인하고 있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이 교리를 통해 그 이단을 흉내 내며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내 책의 요지는 진정한 정통 창조론을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처음 두 구절에 대한 심도있는 독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formless, tohuvabohu) 흑암이 깊음(the deep, tehom)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개역개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성경학자들(웨스터만, 폰 라드)조차 창세기에는 물(物)이 창조되는 절대적 무와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인정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고백록』에서 표현하듯이, 거기에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형태없음(formlessness)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무라는 어떤 것’(somethingnothing, nihil aliquid)이라고 불렀다. 

본래 이 글의 요점은 그 시원적 심연, 태홈이라 불리는 어떤 것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로마제국이라는 매우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무로부터’의 교리가 그 영지주의적 뿌리를 거쳐 기독교 정통주의로 발전해 갔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초기 신학자들은 여기에 걸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 (영지주의적) 대안의 신학을 조롱하면서, 터툴리아누스(Tertullian)는 만일 하나님의 능력이 ‘무’로 연장될 수 없다면, 그래서 “무로부터 모든 만물을 만들어”내실 수 없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자(Almighty)라고 불리실 수 없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무로부터의 교리는 절대적인 전능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He)가 선택한 대로 모든 것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지지한다. 그렇다 바로 그분(He) 말이다. 이렇게 무로부터의 교리는 고대 세계의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권력의 교리로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 교리가 기독교 문명의 정치신학을 거의 추동해오고 있다. 신학의 이러한 세속화는 분명히 인간적인 거버넌스의 민주적 형식보다 오히려 권위주의적 방식을 지향하며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성서 독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통상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라고 불린다. 나는 이것을 ‘심연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profundis, creation out of the deep)라고 불러왔다. 태홈의 대양적 형상 없음으로부터의 창조 말이다. 여기서 ‘심연’(the deep)은 물(物) 자체의 형상 없는 잠재성, 즉 무한한 에너지로 읽힐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심연, 즉 신성 그 자체의 심연으로 말이다. 

전통적인 성서읽기 관행에 따르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무로의’(ad nililam) 창조라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이것은 이 세계의 소멸(annihilation)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초자연적 창조를 의미한다. 그래서 아포칼립스는 세계의 종말로 읽히고, 이런 맥락에서 새 예루살렘을 위한 청소로 간주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로부터의 새로운 창조’(novo creatio ex nihilo)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는 사도 요한의 묵시(Apocalypse)를 담고 있는 예언적 텍스트에 대한 무척 위험하고 과도한 단순화(over-simplification)이다. 

이 텍스트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영향력들에 관하여 내가 이미 두 권의 책을 저술했음을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지난 세기말에 한 권 그리고 가장 최근에 쓴 『묵시적 종말에 맞서서: 기후, 민주주의, 그리고 마지막 기회들』(Facing Apocalypse: Climate, Democracy, and Other Last Chances,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이 그것이다. 당장은 기후의 취약성보다 민주주의의 취약성에 여러분의 신경이 더 곤두설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여러분은 이 두 문제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반민주적 세력들이 당장의 자본주의적 권력의 이익을 위해 생태적 아포칼립스를 줄곧 무시하려고 하는 때에 말이다. 

무엇보다도 지구온난화가 나를 성서의 마지막 책으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우리(미국)의 공화당처럼 지구온난화를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말이 도래하고 있다는, 그리고 곧 도래한다는 자신들만의 관점을 확신한다! 왜 기후변화를 걱정해? 몇 해 전 생태문제에 관심이 있는 나의 학생 중 한 명의 부모님이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들아, 우리는 농부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들을 알고 있단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아라. 그건 그저 예수님이 곧 다시 오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학생의 아버지는 현재 남부의 큰 도시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시장이 되셨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정치신학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는 중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태도, 그 아버지의 태도가 미국 개신교의 거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성서의 아포칼립스가 절대적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서는 꿈속 이미지들을 통해서 인간과 비인간(nonhuman) 모두의 파국적 파괴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야수적 권력과 매춘적 세계경제의 형상들 때문이다. (물론 바빌론의 창녀 이미지는 여성혐오적 이미지로, 나의 페미니즘 정신에 모욕적이지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는 생명의 완전한 상품화, 실로 자기-상품화를 포착하고 있으며, 이것은 아직 자본주의적 신제국주의의 현실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이미 제국의 세계경제적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은 여러 왕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도시에 대한 비전이다. 즉 새로운 시작은 분명히 이 지구와 그 정치사의 계속을 의미한다. 그 새로운 시작은 세계 제국으로부터 자유롭고, 그리고 생명의 물과 나무가 그 중앙에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태정치문명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비전, 즉 급진적인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한다. 이것을 무로의 창조(creatio ad nihilam)가 아니라, ‘새로움으로의 창조’(creatio ad novum)라고 부르도록 하자. 하지만 역사의 변화를 위한 많은 운동들이 그랬듯이 만약 우리가 책임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새로움으로의 창조는 권위주의적인 하향식 권력이나 정치적 수동성이 아니라, 급진적인 변혁(radical transformation)을 위해 일하라고 우리를 촉구한다. 포기하지 말고, 세상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신의 전능이 모든 것을 처리하도록 하라. 

그래서 나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전개하는 정치신학이, 그래서 무로의 종말론을 향한 직선적 시간표을 따라가도록 만드는 정치신학이 현재 시제의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정치신학의 세속화된 형태로서 구원사(Hilesgeschichte)는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도구화와 오늘날 우리 몸의 퇴화, 즉 현재 시제의 물질성의 퇴화에 기여하면서, 행성 생태학의 퇴화에도 기여한다. 그렇다면 물질에 대한 어떤 대안적 이해가 가능할까? 계시록 초반에 말씀을 공표하는 묵시적 메시아(the apocalyptic messiah)가 그 단서를 제공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만약 알파와 오메가가 한 사람으로(as one) 함께 육화(incarnate)한다면, 그것은 시간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해준다. 

지구의 모든 물화(物化)하는 몸들과 연결된 우리 몸에서 현재 시제와 그의 물질화가 어떻게 “나로서의 나”(“I am”)를 체현할 수 있을까? 현재 시제의 도피나 철수 대신 우리는 육화적(incarnational) 창조성을 분별할 수 있을까? 심연으로부터의 창조가 매 순간 새로움으로의 창조와 더불어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물질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내가 과정신학에 의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내 생각에 여러분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철학과 그가 1929년에 출판한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를 통해서는 아니더라도, 신학자 존 캅(John Cobb)의 작품을 통해서는 과정신학을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적 진보신학에 대한 과정사상의 영향력은 여전히 상당히 간접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은 물질에 대한 과정 사상의 설명만을 끄집어 내보고자 한다. (과정 사상은 소위 신물질주의(new materialism)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중시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제인 베넷(Jane Bennett)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대의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던 화이트헤드에게 상대성 이론과 양자물리학의 관점으로 물질을 재사유하는 작업은 자신만의 우주론을 만들어내도록 자극했다. 그의 우주론은 하나님의 존재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충격적인 비전이었다. 그에게 피조세계는 신학적으로도 혹은 물리적으로도 무로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실체가 아니었다. 창조는 창조성의 물화(materialization)였다.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창조적 과정의 물화 혹은 물질적 체현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그 창조성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한다. [나는 이 창조성을 성서의 태홈과 연관시켜왔다. 그리고 과정신학은 고전적 전지전능성 개념에 대한 가장 일관성있는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래서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젊은 페미니스트 시절 나에게 과정신학은 결정적이었다. 신성은 각 피조물을 매 순간 자기-실현을 향하여 부르고, “유혹”한다(lure). 그 다음에 각자가 무엇이 되든지 간에 그것을 자기 안으로 내면화한다. [이를 전문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시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이라 한다.] 우리는 이 두 극성을 알파와 오메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초적 목적 혹은 유혹은 유입되는 관계들의 세계로부터, 다시 말해서 심연으로부터의 실현을 초청한다. 그리고 실현된 사건 계기(actualized occasion)2)는 얼마나 사소하든지 간에 새로운 어떤 것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새로움으로의 실현인 것이다. 각 순간의 끝에서 역사가 아닌 신 안으로 취하여져서, 즉 다른 모든 것과의 상호관계성으로 진입하면서, 화이트헤드가 인용하듯이, “하늘나라가 오늘 우리와 함께 있”게 된다.

화이트헤드의 초점은 물질화의 리듬에 있다. 신학자가 되었든 전자(electron)가 되었든 모든 피조물은 이 순간에 창조적 과정의 물질화이다. 존재한다는 것, 즉 “현실체”(actual entity)가 되는 것은 순간의 사건이 되는 것으로 과정의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내용은 피조물이 그의 세계와 맺는 관계들이다. 그래서 물질은 한 무더기의 정적이고 분리된 사물들이 아니다. 물(物)은 관계 속에 되어가는 과정(process of becoming in relation)이며, 물질은 물질화 혹은 물화(materialization)이다. 그리고 각각의 물화는 물리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전자(electron)도 그렇다. 그 어떤 피조물도 불활성의 죽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살아 있다(alive). 그래서 물질은 자신의 세계를 경험한다. 제인 베넷의 말로 표현하면, 물질은 진동한다(vibrant). 이것은 경험의 종과 류 사이의 광대한 차이들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의 종과 류들을 다양하게 분기하는 물화들로서 철저하게 서로 연결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알파인 신의 유혹으로서 새로운 물화를 향한 어떤 가능성이 항상 제시된다. 그리고 그 동일한 순간의 오메가 속에서 이 실현은 피조물이 자신의 우주와 맺는 관계들로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통합된다. 각 현실적 사건 계기는, 다시 말해서 각 피조물은 그 복잡한 무한한 흐름으로부터 심연, 즉 태홈의 휘저어지는 물들의 역동적 잠재성으로부터 창발한다. 무로부터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초대받았지만 통제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의 물질화는 우주가 맞이할 다음 순간의 ‘되기’(becoming)를 위한 물질이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성하는 세계의 외부에 있거나 또는 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세계와 동일하지도 않다. 이는 고전적 유신론도 아니고 범신론도 아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생성의 소우주적(microcosmic) 사건이 초점에 놓여있다. 사건은 창조의 순간적인 자리, 즉 창조의 현장이다. 이 사건들이 모두 함께 하나의 우주를 만들고, 그렇게 대우주(macrocosm)가 만들어진다. 이 대우주는 하나의 우주(universe)라기보다는 다중우주(multiverse)라고 불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과정 우주론이 반세기도 넘는 시간 동안 생태지향적 신학을 어떻게 키워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현재 97세인 존 캅은 인터넷 운동들을 만들어내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활동적이다. 가장 최근에 캅은 중국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있는 지구 운동’(the Living Earth movement)을 태동시켰다. 이 작업은 거의 전적으로 세속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캅은 (거의 1년에 1권꼴로) 책을 계속 집필하고 있으며, 대부분 세속의 언어로 쓰고 있다. 

살아있는 지구는 과정 생태 신학의 핵심 맥락이다. 이 과정 생태 신학의 장 속에서 지구는 특정한 종류의 정치신학을 유발하는데, 내가 지구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으로 간주해왔던 것의 중요한 일부로서의 정치신학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생태-정치적(eco-political)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정치도, 그 어떤 도시 즉 폴리스(polis)도 지구 생태학 안의 특정한 생태학으로서 그 물질화와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문명의 대부분 정치가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목적들에 맞추어 좌표화되도록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목적들은 정의롭고 민주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물질적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가능성과는 대부분 모순된 채로 머문다. [여러분 역시 한국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지역화된 힘, 그것이 민족주의와 맺고 있는 복합적인 관계, 아울러 부패와 맺고 있는 관계뿐만 아니라, 반부패 운동과 맺고 있는 관계를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소위 국힘당 혹은 한국기독교의 방대하고 다양한 성향들과 더불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분명히 한국도 생태적,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으로 글로벌 관계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이것은 심지어 성 역할에 대한 젊은 남성들의 반응으로까지 표명되고 있는데, Z세대 남성의 60%가 윤 후보에게, Z세대 여성의 60%가 진보당에 투표했다. [나는 이러한 반동적인 유권자들에 의해서 경제적 기회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영향이 세계화의 해로운 영향으로 느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창조 생태 신학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세계성(globality)에 대한 비판적 기술을 통해 현재 시제에게, 즉 이 순간의 창조적 가능성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세계의 다른 지역들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르침을 살아있는 지구에 대한 자신의 지역적 참여로 번역해 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두 명의 한국신학자가 제시하는 실마리들이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서로 교류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나에게 박사논문을 지도받았던 이들이다. 그들은 모두 세계시민적 신학(cosmopolitan theology) 개념을 기치로 세우고 있다. 

강남순은 우주에 대한 페미니스트 디아스포리아적 서술과 그에 걸맞은 탈식민지적 정의의 정치를 통해 세계시민적 신학을 제공한다. 나는 한국에서 그녀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녀의 글은 거의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그녀의 저서인 『코스모폴리탄 신학』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다차원적인 강력한 대안으로서 그녀만의 기독교 페미니즘을 제시한다. 또한 강남순은 젠더의 단일문제 분리주의를 비판하는데, 그녀의 비판은 철저하게 관계적이고 체현적인(embodied) 세계시민정치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안연태는 어린 시절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가정에서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지적 트라우마와 사회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그만의 다원주의적인 독해를 세워나가고 있다. 나는 세미나에서 그저 부정신학에 대하여 (아마도 아포파시스 혹은 그렇게 알려진 주제들에 대하여) 가르쳤을 뿐인데, 그는 2017년에 「탈식민지적 심연: 폐허들로부터 구성하는 신비주의와 세계시민정치」(“The Decolonial Abyss: Mysticism and Cosmopolitics from the Ruins”)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탈식민지적 심연을 창세기의 태홈이라는 아주 다른 심연과 연결시키면서, 심연적 중용(abyssal middle)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는 캐러비언 출신의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의 중간 항로(the Middle Passage)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는데, ‘중간 항로’라는 이름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국에 노예로 팔려가면서 항해했던 항로의 이름으로, 그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상징한다. 이 심연은 대양적 상처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양적 자궁(oceanic womb)으로도 읽힌다. 안연태는 “모든 시작은 새로운 시작으로서, 자아를 창조하고, 정처 없는 중간의 폐허들로부터 근거를 세워나간다. … 생명은 이 중간(this middle)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생성의 지평선으로서 거기, 즉 이전의 되기(becoming)의 행위가 끝난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삶과 새로운 되기의 희망이 인식된다”라고 썼다. 이 세계시민정치(cosmopolitics)는 물질적 되기(material becoming)의 정치신학으로도 읽힌다. 

여기에는 적어도 한국인의 종교적 디아스포라 사유에 대한 무언가가 담지되어 있으며, 그것이 결정적인 세계시민적 비전으로 물질화(materializing) 된다. 나는 단지 이 작품에 대부분 비인간 존재들로 구성된 물질적 현실 우주의 세계시민정치를 덧붙이고 싶다. 그래서 이 우주가 언제나 사회생태적으로, 말하자면 생태우주(ecosmos)로 읽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들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그리고 생태적으로 물화하는(mattering) 신학의 가능성들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공유된 생각을 자극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굳이 지구정치신학이나 세계시민정치로 부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의 순간(apocalyptic moment)에 함께 모였다. 요즘 내가 거듭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다시 말하자면, 아포칼립스는 세계의 끝(the End)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베일을 벗음” 혹은 “드러냄”(unveiling)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포칼립스는 민주주의나 지구의 끝 또는 종말이 아니라, 심각한 위협들과 진동하는 모든 가능성의 ‘드러냄’(unveiling)이다. 그래서 아포칼립스는 끝남(closure)이 아니라, 열림(dis/closure)이다. 기후위기 속에서 물질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이 열림의 폭로(disclosure)가 알려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구의 물질 과정 전체와 철저하게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의 생물 종으로서 우리는 단지 (우리 중) 소수에 의해 식민화하거나 또는 신식민화되기도 하면서 그 상호의존성의 시험을 지금까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에 상호의존에 대한 우주론적 통찰력을 가졌던 기독교 신학들이 존재한다(1420년 쿠자의 니콜라스). 그렇지만 기독교는 대체로 이 아포칼립스에 대해 제대로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그리스 철학을 흡수하면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모든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까지도 형이상학적으로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존재, 즉 물질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독립성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치적으로 이상화되어 버렸다. 

현재 문제의 일부는 미국 내 민주주의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비록 그 독립운동이 반제국적인 특징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독립성이라는 이상이 미국적 감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독립성의 이상이 ‘자유’와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이 강력한 상징을 상호의존의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행히도 매우 어렵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독립에 대한 집착이 이 나라를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생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타임지의 헤드라인 기사에서 저스틴 월랜드(Justin Worland)는 “민주주의 적자”(democracy deficit)에 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양극화 시대에 얼마나 도전적인 과제이든지 간에 민주주의 적자를 극복하는 일은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을 가속화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영향과 그에 따른 필수적 변화들에 가장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래서 기후변화와 같은 체계적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들 수 있는 종류의 협력은 우주의 상호의존적 구조 자체를 반영한다. 

이 세계시민정치적 상호의존성에 기독론적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나는 다른 곳에서 성육신(incarnation)만이 아니라, ‘사이적 육화’(intercarnation)에 관해서도 언급해 왔다. [박일준이 이 주제를 우리의 대화로 가져왔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고유한 사건을 의미심장하게 가리킨다. 그 사건은 창조와 종말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한 사건으로, 그 직선적 시간표의 절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금 그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래서 “서로의 지체가 된다면(members of one another, 롬 12:3-5),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다면, 우리는 단지 나사렛 예수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영으로 우리 서로에 대한 철저한 관계 안에서, 그래서 원리적으로 피조세계의 모든 다른 존재들에 대한 철저한 관계성들 안에서 참여한다. 

우리가 철저한 상호의존성 안에 있는 지체로서만 물화하기 때문에, 우리 각자 안에 체현되기를 추구하는 로고스는 모든 사람, 모든 것 그리고 모든 다른 존재들과 우리의 상호의존성 안으로 우리를 부른다. 이 로고스는 정확히 과정신학자 존 캅이 50년 전에 『다원주의 시대의 그리스도』(Christ in Pluralistic Age, 1975)에서 보다 나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도래하는 모든 순간의 시초적 목적(the initial aim)으로 동일시했던 그 로고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심연으로부터(ex profundis) 그리고 새로움으로(ad novum) 부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로고스가 언제나 보다 풍성한, 보다 더 세심한 사이적 육화(intercarnation)로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다양한 어휘들로 다양한 형식들의 생태신학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예언적 생태 정의, 과정 신학, 생태여성신학 등과 같은 형식으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신학들은 우리가 인간의 체계적인 악들의 이것 혹은 저것을 고치기 위해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듣는다면, 부르시고 인도하신다. 아포칼립스의 핵심은 너무 늦었다거나 종말이 우리에게 닥쳤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가 지금이라는 것이다. 실로 기후위기는 바로 최근 10년 사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이 불가피해지기 전에 아직은 생태우주시민적(e-cosmopolitan) 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 온도가 1.5℃를 넘어서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도 종말 이후의 미래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시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문명으로서, 교회로서 그리고 심지어 이러한 문명에 비판적인 교회와 학계로서 실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작가 새뮤얼 베켓(Samuel Beckett)이 실패의 그 불가피성에 관하여 쓴 적이 있는데, 최근 잭 할버스탐(Jack Halberstam)이 『실패의 퀴어적 예술』(The Queer Art of Failure, 2011)에서 이를 다시 인용했다. 베켓은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한다(Fail better).”라고 썼다. 

십자가는 실패의 예술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부활을 단지 “성공”으로 축소시키기를 원하는가? 그때의 성공이나 미래의 성공으로? 신학적으로 우리는 포용하는 사랑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궁극적인 성공을 보장받지는 못했다. 신(theos)의 로고스(logos)는 독재 권력이나 우주적 통제의 공식이 아니다. 이 로고스는 ‘포에시스’ 즉 유혹하는, 끌어당기는 그래서 모든 물질적 피조물들의 응답을 통해 물화하는 시학(poetics)이다. 그래서 신학(theology)을 말하는 대안적 방식으로 신시학(theopoetics)이라는 말을 보다 더 빈번히 듣게 되는데, 여기서 포에시스는 ‘만든다’(to make)는 의미이다. 그래서 신시학은 우리 모두의 사이적 육화들(intercarnations)을 통한 하나님의 만드심(divine making)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만드심은 단순한 성공 대 단순한 실패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시학적 만들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조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창조의 모든 순간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무력감이나 절망감에 굴복할 필요는 없다. 더 잘 실패하는 것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기를 그만두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물화하는 것, 즉 물화하는 지구의 정치신학이 물질화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다시금 지금 시작한다. 심연으로부터 그리고 새로움으로.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끝’이다. 지금은. 여러분의 질문과 관심을 기대하며, 우리의 대화를 통해 내가 더 잘 실패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주)

1) apocalypse는 생각보다 다양한 의미의 지층들이 담지되어 있어서 한 마디로 번역하기가 애매하다. 우선 apocalypse는 계시(revealation)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계시’는 대파멸의 예고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의 종말’이나 대파국을 의미하거나 그 연장선에서 대재난이나 파괴를 ‘apocalypse’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켈러가 창조와 apocalypse를 병치할 때, 이것은 창조와 종말의 대파국이라는 의미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2) ‘사건 계기’(occasion)는 현실체(actual entity), 존재 혹은 실존하는 것을 가리키는 화이트헤드의 용어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현실체이지만, ‘사건 계기’라는 범주로 묶인 존재에 신은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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