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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섬김의 삶햇볕같은이야기
최용우  |  9191a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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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5월 01일 (일) 06:44:51
최종편집 : 2022년 05월 01일 (일) 06:48:14 [조회수 :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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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 튤립(사진:최용우)

7216.사랑과 섬김의 삶

기독교를 가리켜 한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가 하면 핵폭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빛의 에너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온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단번에 옮겨버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의 궁극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늘 영적인 빛과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일곱 번째는 사랑과 섬김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 용서입니다. 무조건 이해입니다. 무조건 안아주고, 무조건 섬겨주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마음의 기쁨과 희락과 하늘 영광 보좌에 이르는 빛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 튤립(사진:최용우)

7217.소수와 다수

기독교는 소수(小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기독교가 다수가 되고 복음이 다수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다수의 때요 어두움이 권세를 잡고 있는 시대’(눅22:5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다수의 힘 있고 권세 있는 대형 교회로 가셔서 웅장한 성가대의 찬양과 수많은 사람들의 할렐루야를 받으시며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저 이름 없고 힘없는 작은 개척교회에 가셔서 목회자의 눈물을 닦아 주실까요? 
복음은 소수(小數)의 의견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복음이 다수에게 인정받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수에게 복음은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병 낫고 먹을 것 필요했던 다수의 사람들, 그들은 이미 배부른 기득권층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남루한 차림의 예수가 자기들의 열성과 종교적인 업적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면서 ‘말씀 앞에 애통한 마음으로 자기를 쳐서 회개하고 복종시켜야 한다’고 선포하니 그것이 걸림이 된 것입니다.(요6:60~71)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6:61)라고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3재림은 소수(小數)에게 임할 것입니다. 육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재림에 대한 비밀이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수 있느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큰 것, 많은 것, 군중들, 무리들, 힘 있는 다수(多數)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오늘 글이 조금이라도 걸림이 되십니까?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다수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 아마릴리스(사진:최용우)

7218.내가 가야 할 곳

우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반석처럼 단단하고 시몬스 침대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몇 번 읽어보니 ‘교회’는 안으로 모이는 곳이 아니라 밖으로 흩어지는 곳이더군요. 그렇게 흩어졌기 때문에 2천년이 지난 지금 저에게까지 그 복음이 날아온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신념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요? 교회 안에 ‘자본주의’와 ‘세속주의’가 흘러들어와 교회를 오염시킨 이후부터입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의 무리이기 때문에 교단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한 형제이고 한 자매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교회를 철저하게 내교단, 내교파, 내교회로 산산조각 냈습니다. 이제 교회는 교인들 한명 한명을 ‘자본’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본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면 당연히 ‘교회 중심’이라고 해야 합니다.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은 그 교회 목회자의 신앙 수준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저는 1년 동안 ‘성령’에 대해 한번도 설교하지 않는 목회자를 본적도 있습니다. 교인들은 ‘성령’에 대해 말은 해도 실제로는 성령을 몰랐습니다. 교인들이 먼 잘못입니까?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목회자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남의 영혼까지 망치는 큰 죄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모여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 치욕을 몸에 지니고 성문(교회문)밖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히13:12-13) 오늘 글이 조금이라도 걸림이 되십니까?

   
▲ 튤립(사진:최용우)

7219.세상의 칭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똑같이 생각하고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복 받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하고 착하게 살아서 복 받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치를 볼 이유가 전혀 없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탄의 인정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상대편까지 인정할 만큼 자비로운 놈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은 사탄에게 굴복했다는 뜻입니다. 그까짓 것 세상의 인정 따윈 거들떠보지도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동의를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한다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지 세상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구미를 맞추며 끌려가는 것을 ‘세속주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과 기름은 서로 합칠 수 없는 것처럼 기독교와 세상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전쟁터에서 적을 칭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왜 세상의 칭찬을 들으려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합니까? 남의 교회에 가서 남의 교인 뺏어오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사탄의 종노릇하는 이들을 사탄에게서 뺏어와야 합니다.

   
▲ 5월의 푸르름(사진:최용우)

7220.신비로운 자연계

저는 어제 병원에서 심장초음파검사를 받았는데, 제 눈으로 본 제 심장의 파동이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비록 기계를 통해 모니터에 나타나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벌컥 벌컥 하면서 피를 순환시키는 심장 펌프의 모습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렇게 심장이 1분에 60번에서 100번 사이에서 뛰는 일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평생 반복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기계가 이 정도로 정밀하게 오랫동안 작동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만든 최첨단 반도체는 그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정밀하지만, 한번 고장이 나면 고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심장은 약간씩 고장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되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의 대부분은 자기도 모르게 오류가 났다가도 자동으로 복구되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면역력’이라고도 하고 ‘회복력’이라고도 합니다. 젊고 어릴수록 그 매커니즘(mechanism)이 더 잘 작동하겠죠? 
성경은 이렇게 인간이나 자연계에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을 ‘하나님의 신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1:20)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면 ‘산신령처럼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든 자연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어머어마하고 광대하고 깊고 오묘해서 인간의 ‘아는 지식’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모르겠다’는 것만 아는 것 같습니다. 
♥2022.5.1. 좋은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최용우  https://cyw.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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