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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명환 씨의 생애그는 진정 순교자인가 ?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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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12월 12일 (화) 00:00:00 [조회수 : 6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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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섭. [탁명환,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도서출판 두로. 1994년

제1장 탁명환 씨의 생애

탁명환(본명 탁경술, 1964년 11월 17일 개명) 씨는 1937년 7월 8일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리 179번지에서 아버지를 탁두섭 씨로, 어머니를 안삼례 씨로 해서 3남3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백산국민학교, 백산중학교, 신흥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960년 4월 26일 육군에 입대하여 대구 16헌병대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1961년 9월 대구영남신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 수학했다.

1963년 2월 2일 육군에서 만기 제대한 후 그는 1965년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 장로(현재는 목사)가 운영하는 복음신보(현재의 복음신문)의 취재부 기자로 일하면서 신흥종교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개신교계는 나운몽 장로를 이단시했다. 그리고 탁명환 씨도 1976년 11월 27일 기독공보 지면을 통해서 용문산 기도원 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한편 1969년 7월 탁명환 씨는 사이비종교 용화교의 정체를 폭로하는 논픽션 『용화교』라는 책으로 인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18일 만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당시 탁명환 씨는 순수한 사명감과 투철한 정의감으로 불의와 투쟁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형편이 어려워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70년 10월 1일 탁명환씨는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마포 성결교회의 한 사무실을 빌려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1972년에 그는 『한국의 신흥종교 기독교편』이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에 관한 원론적인 비판을 조금 시도했다.

1973년 3월에 탁명환 씨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1975년 3월 졸업했다. 그때의 지도 교수는 문상희 교수였고,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동방교 신도 교육에 있어서 비판적 고찰’이었다. 또한 1973년 3월 20일 탁명환 씨는 사이비종교인 동방교의 정체를 폭로했는데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얼마 후 동방교는 와해되어 버렸다.

1974년 12월 2일 그는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99인의 통일교 지지성명’ 광고에 대한 반박문을 발표했다.

1974년에는 11월 25일 『세칭 구원파의 정체』 란 150쪽 분량의 단행본을 출판했다. 그 책 출간 후 1975년 1월 18일 극동방송국 전 선교부장 권신찬 씨가 그 책의 내용을 이유로 삼아 탁명환 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그는 1976년 4월 2일 제9차 공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김덕환 씨는 탁명환 씨가 과거 군대 생활중 대구영남신학교 야간부에 재학할 당시 권신찬 씨가 영남신학교의 성경강해 과목을 맡고 있던 강사였다고 주장했다(『탁명환 그는 과연 가룟 유다인가?』,김덕환 著,p,111~112.). 그리고 권신찬 씨와 탁명환 씨는 탁명환 씨가 죽기 직전까지 서로 교리 문제로 싸웠다.

그후 탁명환 씨는 1978년 1월초부터 6월 중순까지 신흥종교에 대한 강연회를 3회에 걸쳐 가나안 농군학교(당시 교장 고 김용기 장로)에서 했다.

탁명환 씨는 1978년 9월 10, 11일 양일간에 걸쳐 갑자기 각 신문을 통해서 ‘통일교회에 대한 사과문’이라는 광고를 냈다. 그후 1979년 6월 10일 탁명환 씨는 통일교는 십자가가 없는 이단이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동년 11월 25일 통일교 비판서인 『통일교의 실상과 그 허상』이란 책을 발간했다.

1980년 1월 1일 그는 신흥종교문제연구소를 국제종교문제연구소로 개칭했다. 1981년 4월에는 한국예수교 협의회 (KCCC) 기관지인 월간지 「성별」을 인수했고, 그 다음해 6월 잡지 이름을 「현대종교」로 바꿨다.

그런데 탁명환 씨는 1980년 2월 18일 자신을 죽인 임홍천 씨의 소속 교회인 대성교회에서 이단 비판 강연회를 열었는데 그것을 그 자신도 시인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성교회에 출석하는 신도들의 착하디 착한 신앙의 색깔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3년 전 바로 이 교회에서 이단의 정체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그들 신도들의 진리를 향한 갈망을 그 눈빛에서 보았기에 더욱 이 교회 신도들을 위하는 애정이 강렬해진다. 그렇기에 그 어떤 수난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바른 신앙의 진로를 그들 신도들에게 제시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필자의 욕심 없는 소망이다"(「현대종교」 1983년 3월호 p. 81.).

"물론 대성교회는 이단은 아니자만 박윤식은 문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같은 책 p. 82.).

"또한 박윤식 목사의 성품에 인간적인 장점도 있는 것을 알지만 그가 주장하는 교리적인 문제에 하자가 있는 한 이단 시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현대종교」 1990년 8월호 p. 222.).

위와 같은 언급을 한 후 바로 그는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에 대한 비판의 표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돈의 문제에 있어서 초연해야만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이 지구상의 여러 종교 중에서도 특히 이단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 연구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탁명환 씨는 그렇지 못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어떤 교회가 금전적 지원과 협조(「현대종교」에 광고 게재 등)를 해줄 때는 그 교회에 대해서 일절 비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다가 (C목사의 S교회는 탁명환 씨가 죽기 직전까지 그를 도와 주었으므로 그는 그 목사에 대한 이단 사이비 시비 논쟁을 한 번도 걸지 않았음) 그 교회가 그의 비리나 부정직함으로 인해서 그에게 경제적 지원과 협조를 하지 않으면 그 얼마 후부터는 그 교회에 대한 이단 사이비 시비 논쟁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대성교회와 성락교회다(기독교 남침례회, 담임 목사 김기동,57세). 그런데 대성교회가 탁명환 씨에게 물질적 지원과 협조를 중단했던 이유는 그가 1978년 9월 10, 11일 ‘통일교회에 대한 사과문’이라는 광고를 냈기 때문이었다(「신동아」 1994년 4월호 p. 358.).

그러나 성락교회는 탁명환 씨의 ‘통일교회에 대한 사과문’발표 이후에도 1983년 말까지 「현대종교」 구입비, 협조비, 광고비 명목으로 탁명환 씨를 계속 도와주었다. 하지만 성락교회도 1984년부터 「현대종교」의 보도 자세를 그 이유로 해서 탁명환 씨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협조를 일절 중단했다.

그런데 탁명환 씨 사후, 임홍천 씨의 소속 교회인 대성교회가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와 탁명환 씨가 서로 적이 되어버린 이유는 대성교회로부터 탁명환 씨에게 매달 50여 만 원 씩 지급되던 것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갓에 대해서 탁명환 씨 측은 그 돈이 「현대종교」의 광고비 명목이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동아일보 1994년 2월 22일자).

월간지를 운영함에 있어서 가장 큰 소득원은 광고료이다. 이 점은 탁명환 씨도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시인한 적이 있다.

"목숨을 내어 걸고 유서를 써놓고 18년간 추적하면서 8번이나 고소를 당한 필자를 그대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 집단(구원파를 지칭함 : 필자 주)의 광고를 내주고 이익을 얻고 그야말로 그 집단의 보도에 놀아나면서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현대종교」1991년 9월호 p.151.).

또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인 김동섭 씨도 「월간 조선」 1994년 4월호의 ‘신흥종교연구가 탁명환의 생애, 찬반 엇갈리는 이단 고발자의 비상한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의 단점이 ‘종교연구갗라는 입정보다 ‘잡지 경영자’라는 위치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단이라 규정된 집단에서 주로 걸고 넘어진 것이 “광고 줄 때는 말을 안 하다가 광고를 안 주면 몰아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단 규정과 광고 문제를 결부짓는다는 것은 말로 안된다. 이단은 성경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론이고, 광고는 잡지의 생명인데 이단 종파라고 고지식하게 안 싣는다면 어떻게 잡지를 운영할 수 있겠는갚라고 반박한다"(p.366)

금전적 지원과 협조를 1984년부터 중단했던 성락교회에 대해서 탁명환 씨는 「현대종교」를 통해서 1986년 3월부터 죽을 때까지 수십 차례 직,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이 점을 통해서 탁명환 씨의 모순점과 표리부동함을 여러 가지로 파악하게 된다.

첫째,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탁명환 씨는 어떤 교회의 경제적 지원과 협조가 있는 동안에는 그 교회에 대한 이단 시비 논쟁을 걸지 않다가 그것들이 끊어진 후 그 교회에 대한 이단 시비 논쟁을 걸었다.

툴째, 탁명환 씨가 어떤 교회의 물질적 도움이 있었던 기간에는 그 교회의 이단성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원조가 중단된 후 그 교회의 이단성을 발견했다면 이단 사이비 종교연구가로서의 탁명환 씨의 능력과 자질이 의심스럽다.

셋째, 탁명환 씨가 나중에라도 그 교회의 이단성을 간파했다면 과거 그 교회로부터 받았던 경제적 도움을 되돌려 주었어야만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 과거 탁명환 씨는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를 비판할 때면 항상 박윤식 씨의 교리적인 문제와 더불어 윤리 도덕적인 문제도 거론했으나,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를 비난할 때는 직, 간접적으로 김기동 목사의 교리적인 문제만 지적했지 윤리 도덕적인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 주, 작금 김기동의 적지 않은 윤리 도덕적 문제점들이 보고되고 있다. 여기서 또 다시 한번 고 탁명환 씨의 수준 낮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고소, 고발의 명수였던 탁명환 씨는 1984년 10월 10일 목사와 장로 106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잡던 고소하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고의 진기록을 세웠다.

그후 그는 1985년 5월 3일 그의 집 앞에 세워둔 그의 승용차에 승차했다가 그 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그 당시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그 사건이 자신의 입지 강화를 노린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 진상을 알아낼 길은 막연하다.

1985년도는 탁명환 씨에게 대단히 어렵고 힘든 한해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개신교계의 상당수가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탁명환 씨는 그의 「현대종교」1985년 9월호 p.183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들소리자(탁명환 씨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 : 필자 주)가 지난 5월 3일 폭탄 테러를 당하고 입원 수술 후 퇴원하여 그간 한국교계에 진 사랑의 빚에 대하여 인사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유료 광고를 교계 신문 네 곳에 게재하고 기독신보(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 기관지 : 필자 주)에도 게재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다."

소위 구원파와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1986년 5월 박윤식 씨가 교계 신문에 사과 광고를 낸후 탁명환 씨는 1990년 말까지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현대종교」 1990년 8월호 p. 222.)를 꾸준히 비판하던 탁명환 씨는 1987년 12월 5일 드디어 전대미문의 사건을 하나 일으킨다.

그것은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당시 대통령 후보 김영삼 통일 민주당 총재에게 통일교 정치자금 수수 여부에 대해서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 질의를 그가 직접 했던 것이다.

또한 탁명환 씨는 1987년 8월 29일에 발생했던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 직후부터 그 사건의 뒤에는 배후세력(소위 구원파)이 있다고 계속 주장하여 1991년 7월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0년 12월경에는 어떤 사람이 몰래 탁명환 씨와 함께 어떤 여인(김모)이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촬영하여 그 사진들을 그 당시 탁명환 씨의 출석 교회였던 새문안교회에 집중적으로 뿌렸던 사건이 발생했다(크리스챤 신문 1991년 3월 30일자).

또한 1991년 2월경 또 다른 사람이 탁명환 씨의 전화기를 수개월 동안 불법 도청 녹음하여 그 녹음테이프와 그것의 녹취록을 교계에 유포했는데, 거기에는 탁명환 씨와 앞의 김모와의 전화통화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다. 하지만 탁명환 씨는 이상과 같은 것들이 이단 사이비 종교집단의 허위 조작극이라고 주장했다(같은 신문 같은 날).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는 정들었던 새문안교회(당회장 김동익 목사, 사모 전 환경처 장관 변호사 황산성 씨)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탁명환 씨의 여자 문제에 대한 소문은 그 후에도 계속 교계에 맴돌았지만 그것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확인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탁명환 씨 사후 검찰 측이 작성한 임홍천 씨에 대한 공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임홍천 씨의 증언이 들어 있다.

"그 즉시 자신의 차로 되돌아가 뒤따라 출발하여 위 승용차를 미행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그곳에서 약 2Km 떨어진 같은 구(區) 중화3동 307-1 소재 태릉시장 입구의 제일플라자빌딩 앞에 잠시 정차하여 위 ○○○은 내리고 위 탁명환 혼자 차를 운전하다가 하차하여 부근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다시 차를 운전하여 같은 구 묵2동 249-2 소재 중랑경찰서 앞 노상에 이르러 성명 미상의 30대 여자를 조수석에 태워 같은 구 중화 2동 326-33 소재 4층 건물의 2층에 있는 중국음식점 대왕각으로 들어가 약 1시간 30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나와 차를 운전하여 1Km 가량 떨어진 같은 구 중화3동 332-28 앞 고수부지의 외진 곳으로 가서는 차를 세우고 위 여자와 함께 뚝 밑으로 내려가서 서로 포옹을 하고 애무하는 것을 보게 되자 소위 이단 사이비종교를 척결한다는 의로운 사명감은 동인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에 불과할 뿐 사실은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는 파렴치한이라는 생각에 동인을 살해할 뜻을 더욱 굳히고.... "

탁명환 씨 사후 발간된 「현대종교」 1994년 5월호 p.203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함으로써 위의 공소장의 내용의 신빙성을 뒷받침했다.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에서 가장 의문의 여지가 있는 대목은 임 씨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이다."

그런데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은 임홍천 씨의 범행 동기를 탁명환 씨가 대성교회의 박윤식 씨를 근거 없이 비방만 하고 이단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했다. 1991년부터 탁명환 씨는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 을 집중적으로 계속해서 비난했다. 그후 그는 1992년 10월 29일 괴한들로부터 칼에 찔리는 테러를 당했다.

그 동안 탁명환 씨는 약 20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1994년 2월 18일 사이비종교인 영생교에 대한 문제로 출장을 다녀오던 탁명환 씨는 대성교회의 임홍천 씨의 칼에 찔려 그의 부인과 3남을 남겨둔 채 58세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탁명환 씨의 월간 「현대종교」는 그의 차남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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