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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한다는 것햇볕같은이야기
최용우  |  9191a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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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4월 11일 (월) 13:41:13
최종편집 : 2022년 04월 11일 (월) 13:43:44 [조회수 : 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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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 (사진:최용우)

7198.용서한다는 것

성경을 읽으면서 최근에 ‘너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라’ 심지어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용서를 받으라’는 말씀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용서해 주어야지 남에게 용서받을 짓을 하고 살면 안 됩니다. 라는 글도 썼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일은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남에게 용서받는 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용서를 해 달라고 사정을 해도 상대방이 나를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용서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 알고 보면 ‘용서받는 일’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용서하는 일과 용서를 구하는 일, 그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남에게 용서를 받아라’라는 말씀은 안 하신 것입니다. 
남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남을 용서하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족쇄에서 풀려나는 유일한 방법이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로저 윌쉬는 <영성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용서는 용서하는 쪽과 용서받는 쪽을 치유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변화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남을 억지로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의 할 일은 할 수 있는 한 남을 용서하는 것뿐이다. 용서의 효과가 온전히 나타나는데 몇 년의 세월이 흐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내 삶이 막혀있는 가장 큰 원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용서받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성령님을 따를 때, 용서하게 하시고 용서받게 만들어 주십니다. 

   
▲ (사진:최용우)

7199.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39)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엄청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 엄청나게 힘든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요일5:3)
예를 들어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키지 않는 것보다 100배는 더 쉽습니다. 간음하려면... 음, 그게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 하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음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비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니 얼마나 쉽습니까?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키지 않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도둑질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들키지 않으려면 굉장히 신중하고 은밀해야 합니다. 또한 만약 들켰을 경우 당할 보복까지 생각하면 정말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도적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다.
제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지키지 않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거짓 증거하는 일이 쉽습니까, 정직하게 증거하는 일이 쉽습니까? 당연히 정직한 것이 쉽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이라니 이것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 (사진:최용우)

7200.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시신 수습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마27:57) 한밤중에 예수에게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했습니다.(요19:39) 그 시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게 밥을 사 주시고 떡을 떼어 주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눅24:31) 예수님을 알아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때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마24:25)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관계 지향적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 신경에는 ‘관계회로’(relational circuits:RCs)라는 것이 있는데 관계회로는 차단되거나, 연결되거나, 고장 나거나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그들의 희망이었던 예수님이 허망하게 죽어 버렸다는 마음이 관계회로를 차단시켜 버려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설마 예수님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이죠. 
오늘날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관계회로’가 연결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예 망가져버린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방언도 가짜고, 치유도, 임재도 심지어 중보기도 조차도 반대하는 글을 기독교신문에 기고하는 유명 신학대학 교수님도 본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 교수님은 무얼 믿고 무얼 가르치는 것일까요?  

   
▲ (사진:최용우)

7201.하나님의 생각이냐 내 생각이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도 계십니다.(요15:5) 내 안에 계신 주님을 가만히 불러보면 주님께서 대답을 해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건 내 마음의 소리지요.”라고 말합니다. 아직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내 마음의 소리’ 인지 ‘하나님의 소리’인지 분별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에는 ‘대상피질’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대상피질이 하는 일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존재 간에 ‘사고 공유 상태(mutual-mind stste)’를 만들어 하나의 생각을 하게 하는 일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면 그 생각이 대상피질을 통하여 나의 생각과 ‘생각 공유 상태’가 됩니다. 이 교류는 나의 의식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집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계산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을 공유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엡2:10)에서 ‘작품’을 헬라어로 ‘포이에마’라고 하는데, ‘작품’이라는 번역으로는 본래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포이에마에는 소리의 운율뿐만 아니라 생각의 운율도 맞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딱 맞춘다는 뜻입니다. ‘포이에마’는 하나님과 나의 ‘사고 공유의 상태’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떠오른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냐 내 생각이냐? 그것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는 않습니다. 자꾸 분별하다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네 맞아요. 하나님께 물었을 때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사고 공유 상태’가 이루어진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 (사진:최용우)

7202.하나님과 나의 생각 공유 상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셔도 그것을 내가 알아 차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지 점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하는 ‘사고 공유 상태’가 되면 그 증거로 내 안에 내적 평화 즉, ‘샬롬(평강)’이 찾아옵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며 잘 조화된 순조로운 평강의 상태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골3:15)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렇게 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냥 대충 내 뜻대로 살면서 말로만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합니다. 나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 ‘사고 공유 상태’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도 삶이 안 풀리고, 얼굴은 곧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 것처럼 찡그리면서 삽니다.
골로새서3:1-17절은 하나님과의 ‘사고 공유 상태’가 되면 삶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옛 본성을 벗고 새롭게 하나님의 옷(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안내)으로 덧입게 되고, 그것이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삶이 ‘샬롬’의 상태가 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금 나는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잘 맞추고 있나? 진정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가?’ 하고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 (사진:최용우)

7203.털실뭉치 던지기

서울에 사는 두 딸들이 가끔 엄마아빠가 사는 집에 옵니다. 고속버스가 몹시 막혀서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 어느 날, 큰딸은 집에 들어오더니 인사도 안 하고 다짜고짜 옷을 벗어서 던져버리고 거실에 큰대자로 누우면서 “아이고, 차 타는 것은 힘들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우리 집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저렇게 완전 무장을 해체하고 누울 수 있는 사람은 딸들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절대로 저렇게는 못하죠. 저 아이들은 아내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배꼽이 그 증거입니다. 아빠와는 혈연으로 묶여 있습니다. 아빠도 ‘최’가이고 아이들도 최가인 것이 그 증거입니다.
2.털실 뭉치를 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먼저 한 사람이 한쪽 끝을 잡아 몸에 묶고 털실 뭉치를 상대방에게 던집니다. 상대방이 그걸 잡아 자기 몸에 감고 다시 던집니다. 그렇게 털실 뭉치가 왔다갔다 하면 할수록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실은 많아지고 그것을 모으면 강해져서 나중에는 두 사람을 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교류 관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교류’가 부족하면 예수님을 만나도 남 같고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겠죠? 
기도하는 것은 내가 털실 뭉치를 하나님께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해 주심으로 털실 뭉치를 나에게 다시 던져 주십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교류’가 많아질수록 하나님과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있는 털실 뭉치를 하나님께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죠.ⓒ최용우  https://cyw.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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