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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품이 되어준다는 것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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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4월 06일 (수) 16:44:44
최종편집 : 2022년 04월 06일 (수) 16:45:13 [조회수 : 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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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의 마음에는 다양한 이미지와 상념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저절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되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오싹한 불쾌감을 자아내는 이름도 있다. 어떤 이름도 텅 빈 기표가 아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대상과 인격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교도소나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호명되는 까닭은 그 얽힘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와 내가 더 이상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나타낸다.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듣고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즉시 자기를 부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 호명 행위에 깃든 어조와 정서는 부정할 수 없는 한 영혼의 지문이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인 올레나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죽은 아이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함으로 전쟁의 참상을 폭로했다. 비정한 세상은 희생당한 사람들을 숫자로 환원시킴으로 고통을 추상화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통계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대체 불가능한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혹은 개신교인이라는 이름이 발화될 때 교회 밖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파동이 일어나고 있을까? 개신교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따갑다. 조롱과 혐오의 말들이 서슴없이 퍼부어지고 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예수의 이름을 오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는 세상이 만든 차별과 배제의 장벽을 허물어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고 함께 생을 경축하도록 이끄셨건만, 이 땅의 교회는 오히려 장벽을 높이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교회는 품이 넓어야 한다. 예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오히려 배제와 혐오의 기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박남준 시인은 ‘아름다운 관계’라는 시에서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에 주목한다. 그 소나무가 뿌리를 내린 바위는 이전에는 이끼조차 살 수 없었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는 불모의 바위였다.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잠시 싹을 틔우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바위에 소나무가 우뚝 섰다. 어찌된 일일까? 세월이 흐르고 흐르는 동안 돌이 늙어 품이 넓어졌기 때문이었다. 바람에 날아온 솔씨 하나가 이끼와 마른 풀들 사이에 떨어져 안기자 바위는 그 작은 것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다.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자기 품에 안긴 생명을 키우기 위한 바위의 안간힘, 얼마나 놀라운 비전인가. 그 사랑으로 바위는 소나무를 키웠고, 소나무는 마침내 푸른 그늘을 드리웠고, 새들을 불러 노래하게 했다.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인은 자신에게 묻는다. “뒤돌아본다/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몸의 한편을 열어 누군가의 품이 되어준다는 것, 이보다 더 거룩한 일이 또 있을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 분의 삶이 이러하지 않았는가?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은 ‘그 이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으로 성전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켜 세웠고,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던 이들을 해방하여 다른 이들과 덩더꿍 자유의 춤을 출 줄 아는 이들로 만들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굳은 몸을 이리저리 틀어 소나무가 자랄 틈을 만들어준 그 늙은 바위를 생각한다. 교회의 품이 넓어져야 한다.

(* 2022/03/16일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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