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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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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년 03월 25일 (금) 23:42:43
최종편집 : 2022년 03월 26일 (토) 01:54:59 [조회수 : 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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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신화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 앞에 선 인간의 운명은 어떠한지, 인간 사회에 내재한 선과 악의 뿌리는 무엇인지, 그 속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역할은 무엇인지를 넌지시 드러낸다. 사람들은 인식의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태초’를 떠올린다. 물론 그 태초는 인간의 지각이나 경험 세계를 훌쩍 뛰어넘는 근원적 지평이다. 태초는 두레박을 아무리 내려뜨려도 닿을 수 없는 우물과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에 근거해서 태초부터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갈등, 행동, 폭력, 혼돈 등이 그것이다.

에누마 엘리쉬는 고대 바빌론의 창세신화를 담고 있는 송가이다. 마르둑이 자기의 조상신인 혼돈의 신 티아마트를 물리치고 최고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 내력을 소개한다. 전쟁이 벌어지자 티아마트는 킹구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만들어 그의 수하에 둔다. 티아마트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강력한 힘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마르둑 밖에 없다며 신들은 모든 권한을 그에게 위임한다. 마르둑은 최선봉에 서서 티아마트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둘로 갈라 반쪽으로는 하늘의 궁창을 삼고 나머지 반쪽으로는 그걸 덮을 수 있는 덮개를 만들어 땅의 기초로 삼았다. 그리고 킹구를 죽여 그의 피를 가지고 신들의 노역을 감당할 인간들을 만들었다.

바빌론의 창세신화는 강 주변에서 문명을 일궜던 이들의 고통이 반영되어 있다. 강은 문명의 기초이지만,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는 강은 인간의 문명의 토대를 뒤흔들곤 하는 폭력적 실체이기도 했다. 관개수로를 잘 유지하고 관리하여 물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왕들의 책임이었다. 마르둑이 바닷물의 신 티아마트를 죽여 질서를 회복했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제의적으로 반복하면서 바빌론 사람들은 신화를 내면화했고, 통치자들의 폭력적 지배는 정당성을 확보했다. 질서를 얻기까지는 폭력적 투쟁이 필요했다. 피지배자들은 신들이 각자에게 부여한 역할을 감당할 뿐이었다. 숙명론적 세계관이 제국 통치의 필요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창조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다. 초석적 폭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감싸는 따뜻한 품으로부터 빛이 솟아오르고, 신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고 기뻐한다. 기쁨이 창조의 핵심이다. 인간은 신들의 허드렛일을 감당하기 위한 하인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신의 뜻에 기쁘게 동참하는 창조적 주체이다.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그에게는 자기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차별 또한 금지된다. 인간은 상호 존중하고 협동하는 주체로 창조되었다. 인간 세계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창조 이야기의 심층을 이룬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제들은 이처럼 새로운 세상의 꿈을 인류 역사 앞에 내놓았다.

큰 이야기가 실종된 시대이다. 종교인들도 정치인들도 큰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경륜가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이 찾아가 길을 묻던 스승들이 사라진 후 우리는 빈곤해졌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정신은 빈곤을 면치 못한다. 전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의 현실이 심각하건만, 정치인들 가운데 그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기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문제 삼아야 하고, 욕망을 거스르는 담론은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일상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필요를 채우는 일에 몰두하는 동안 장엄한 세계를 보고, 삶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은 점점 어두워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허무의식이 슬그머니 우리 내면에 자리잡는다. 부지불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허무감을 화장기로 가릴 수는 없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세상이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말들이 범람한다. 후보들은 앞 다퉈 대중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사의 방향을 가리켜 보이지 않는다. 희망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각자가 대답할 때이다.

(*2022/01/15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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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나노 (121.172.7.17)
2022-03-26 18:34:57
저주가 나에게 다시 돌아와도.

방이동 나라도둑놈 집안을 저주 한다.

교회 = 예수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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